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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파티의 꽃 (16/106)

16화. 파티의 꽃

플로리아는 지금 순간이 너무 서글펐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큰 결심 끝에 자신이 황후라는 사실을 밝힌 거였는데,제리헤이드가 이렇게 곧바로 도망치듯 가버릴 줄은 몰랐었다.

“하아.”

자신이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도 똑같은 태도로 살갑게 대해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냥 알 수 없는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괜히 말한 건가? 더 속였어야 했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신분을 감출 수는 없는데…….’

“저기, 황후 폐하?”

그녀가 혼자 상념에 잠겨 있자, 옆에 있던 하녀 베일리가 플로리아를 불렀다.

“아, 그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무슨 일로 온 거지?”

현실을 직시한 후, 플로리아는 최대한 이성적인 말투를 냈다.

그러자 베일리가 주변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에이니님께서 트리스탄이라는 이름의 준남작을 조사해봐야 한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안젤리나 님의 과거와 연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

플로리아는 에이니가 오늘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하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알겠다. 에이니에게 수고했다고 전하거라.”

“네, 황후 폐하.”

베일리는 그 말을 끝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어느새 노을 지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플로리아는 느린 걸음으로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

플로리아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이제 곧 무도회가 시작되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벨라가 보이긴 했지만, 조금은 더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지금 당장 그녀를 부르진 않기로 했다.

연회장 구석에 서있던 플로리아가 저마다 춤을 추겠다며 가운데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황후?”

반갑지 않은 이가 다가왔다. 카르티스였다.

그 옆엔 매일 붙어 다니는 모르크 후작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도 오셨네요.”

“황후야말로 이런 데서 다 마주치는군. 정부허가서를 받은 후에도 한동안 잠잠하더니 오늘은 정말 정부라도 구하러 나온 건가?”

비꼬는 듯한 카르티스의 말투에 플로리아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펴졌다.

여긴 수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자리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표정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카르티스에게 순순히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네, 보다시피요. 이런 자리야말로 젊은 남자들을 자유롭게 만나기 좋은 최적의 장소 아니던가요?”

“그럼 어디 한 번 지금 당장 골라보시오. 내가 혹시 도와줄 수도 있을지 모르지 않소?”

분명 카르티스는 온전히 빈말을 하는 중이겠지만 플로리아는 그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간섭하는 게 거슬렸다.

안젤리나나 다른 정부들한테라도 갔으면 좋겠는데, 왜 여기 붙어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폐하의 도움 따윈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그야…….”

플로리아가 혼자서도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려는 그 순간,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 앞에서 고개 숙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황후 폐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로리아는 고개를 들어 올리는 남자와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다. 당황스럽게도 그는 아까 먼저 사라졌던 제리헤이드였다.

“…….”

“저는 에리튼 제국의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입니다.”

“……네?”

살짝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 플로리아는 그대로 놀란 듯 굳어버렸다.

‘이 사람이……. 에리튼 제국의 공작이라고?’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의 정체를 알고 놀란 만큼 그녀도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놀란 상태였다.

“아루비스 공, 지금 황후와 내가 대화 중인 거 안 보이시오?”

매번 그를 거슬려하던 카르티스가 노려보며 말했지만 오히려 제리헤이드는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이제 곧 무도회가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말로는, 파티의 꽃이 바로 이 무도회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어쩌려는 거지? 황후와 춤이라도 추겠다는 건가?”

계속해서 비아냥대는 카르티스의 말에도 플로리아는 그저 제리헤이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그러자 그가 플로리아에게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조심스레 펼쳐 보였다.

“황후 폐하. 첫 번째 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리헤이드가 뻗은 손을 그저 바라봤다.

“황후가 불편할 테니 장난은 적당히 하시오. 내가 아는 플로리아는 춤을 추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자 플로리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카르티스가 누구보다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서도 그 확신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플로리아는 무도회에 나서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사교춤을 교육받았음에도 재능이 전혀 없기도 했지만, 애초에 이런 파티에 참석하지 않다 보니 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카르티스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고, 그저 그림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더는 없다고.

계속해서 비아냥대는 카르티스를 향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향해 뻗은 제리헤이드의 이 손을 잡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아루비스 공, 잘 부탁해요.”

긴 생각을 끝낸 플로리아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한 후, 덥석 제리헤이드의 손을 잡아버렸다.

다음 생각 따윈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뒤에서 카르티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에게 이끌리듯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

플로리아가 무도회장 중앙으로 향하자 다른 귀족들이 저마다 눈치껏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래도 이런 파티에선 황제나 황후가 가운데서 춤을 추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겠지만, 사실 지금 그들이 길을 터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플로리아가 카르티스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모든 파티가 그렇듯 의례적으로 황후의 첫 번째 춤 상대는 당연히 카르티스 황제일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보란 듯이 깨고 그녀가 이웃 나라의 공작이라는 사람과 나란히 걸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전에도 춤춰본 적 있어요?”

플로리아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제리헤이드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황후 폐하는요?”

“나도 물론 있긴 해요. 그런데 그대가 갑자기 그렇게 부르니까 어색하네요.”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의 호칭에 플로리아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전처럼 부를까요? 레이디? 아님 애칭으로 부를까요? ‘플리’는 어때요?”

“아,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이엔 존칭이 필요할 것 같네요.”

능글맞은 제리헤이드의 말투에 그녀가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아까…… 나랑 있는 게 불편해져서 급하게 가버린 거 아니었나요?”

“제가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어보는 플로리아 때문에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뭔가 오해를 하셨나 본데…… 저는 레이디께서 황후 폐하라고 해서 불편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럼 아까는 왜 그렇게 급하게 간 거죠?”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요?”

‘아,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꼬치꼬치 캐물었나?’

플로리아는 그 생각을 하자 약간의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마주 보던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혹시 곤란하다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곤란하긴요. 사실 별 뜻은 없었는데……. 그냥 옆에 온 하녀랑 편히 대화하시라고 자리를 피해드린 게 전부예요.”

“아…….”

그의 말 그대로 정말 별 뜻 없는 대답을 듣자,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왜 혼자서 넘겨짚고 오해한 건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혹시 제가 도망친 줄 알고 서운하셨습니까?”

“서운하긴. 누가 말이죠?”

새초롬하게 대답하는 플로리아를 바라보던 제리헤이드가 살갑게 웃었다.

“아니라고 하시니 일단 아닌 걸로 해두죠. 그럼 이제 춤에 집중해 볼까요?”

“그런데 제리헤이드, 아니 미안해요. 아루비스 공작.”

플로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의 이름을 다시 정정했다.

“저는 괜찮으니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저기, 실은 내가 춤을 못 춥니다. 그래서 그동안 웬만하면 파티를 피해 다닌 것도 있었는데…….”

“정말이요?”

“음, 저와 춤추다 보면 그대의 발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의 깨끗하고 반들반들한 가죽 구두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웃음이 터진 듯 작게 쿡쿡 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웃긴가요?”

“아, 아닙니다. 걱정마세요, 황후 폐하. 춤은 제가 잘 추니까 괜찮을 겁니다.”

“아마……. 괜찮지 않을 텐데…….”

사실 제리헤이드도 춤을 아주 많이 춰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렇듯 그에게 기본적인 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시키려는 말에도 플로리아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 때문에 얼떨결에 여기까지 나오긴 했지만 저는 지금 걱정이 큽니다.”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저만 믿으세요.”

“…….”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플로리아는 아직까지 맞잡고 있는 손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제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가 손을 쳐다보고 있는 걸 눈치챈 건지 제리헤이드가 때맞춰 그 얘기를 꺼냈다.

“막상 손은 뻗었는데 잡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아.”

“어? 이제 음악이 시작되네요. 제 손 꼭 잡으세요.”

그 말과 동시에 제리헤이드가 비어있는 반대편 손을 들어 플로리아의 허리에 가볍게 올렸다.

“엇.”

“오늘 춤추는 동안은 저만 믿고 따라와요.”

생각보다 빠른 음악에 플로리아는 지금 당장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려 천천히 그에게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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