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녀의 정체
“제 생각이라도 한 건 아니죠?”
농담 섞인 제리헤이드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잠시……. 그냥 혼자 딴 생각을 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던 그녀는 순간 민망해져서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곤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쪽은 신경 쓰지 말아요.”
어리숙하던 그녀의 모습에 제리헤이드가 더 크게 미소 지었다.
“레이디, 혹시 지난번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나요?”
그 얘기에 플로리아는 지난 만남을 잠시 떠올렸다.
“……무슨 말이요?”
“다음에 만나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었던 거, 기억해요?”
“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도 똑바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그렇다고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제드’라고 불러 달라고 했었는데……. 기억을 못 하시나 보네요.”
낯선 남자에게 애칭으로 부르다니. 생각만 해도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봐요, 제리헤이드 씨. 우리가 서로 그렇게 부를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플로리아는 우연히 다시 마주친 그가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황후로서 너무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가 한 얘기의 다른 부분에 집중한 것 같았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네요? 잊은 줄 알고 섭섭할 뻔 했는데……. 조금 감동해도 되죠?”
플로리아의 눈에 그는 참으로 사교적이고 낯가림이 없는 남자 같았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 뭔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경계심 없이 살 수가 있을까?’
제리헤이드도 사실 그녀에게만 적극적이란 사실을 알 리 없던 플로리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는 제대로 못 봤었는데…….”
그때, 제리헤이드가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플로리아의 모습을 다시 바라봤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신데요?”
“……네?”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마치 수많은 꽃들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같아요.”
마침 바로 옆이 꽃밭이라 그가 꽃들이 만발한 곳을 가리켰다.
“크흠. 칭찬해줘서 고맙군요.”
플로리아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자 내내 해맑던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저기 혹시 진짜 고마운 거면…….”
“…….”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은 저한테 알려줄 수 있나요?”
그 부탁에 플로리아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제리헤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
몇 분 전, 연회장 반대편.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제리헤이드 옆으로 바벨 경이 급하게 뛰어왔다.
“공작님! 공작님!”
“바벨, 무슨 일이야?”
요란하게 뛰어올 때는 언제고 그는 어느새 제리헤이드의 귓가에 바짝 다가와 소곤대기 시작했다.
“제가 좀 알아보니 이곳 타레트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정부를 여섯이나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 중 몇 명이 서로 싸워서 큰 소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바벨 경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인상을 구겼다.
조금 전, 연회장 입구 쪽에서 있었던 싸우는 소리가 황제의 정부들이 그런 거라니…….
그는 카르티스에게 몇 명의 정부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여섯 명이나 들였을 줄은 몰랐었다.
‘황후까지 포함하면 일곱 명의 여자들을 전부 사랑한다는 건가?’
에리튼 제국은 예로부터 정부를 들이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황제든…….
누구라도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리헤이드는 정부를 그렇게 수시로 들이는 카르티스의 행동이 특히나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황제가 들인 정부들이라면 안 봐도 어떤 싸움 일지 뻔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대놓고 말은 못 해도 그 일에 대해 뒤에서 다들 숙덕거리는 것 같습니다.”
“숙덕거리다니? 무엇을 말이오?”
그때, 마치 일부러 때를 맞춰 찾아온 듯이 카르티스가 그들 옆으로 다가왔다.
“아, 황제 폐하!”
깜짝 놀란 바벨 경이 인사를 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폐하, 여기서 뵙는군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리헤이드도 썩 내키진 않지만 카르티스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은근슬쩍 인사는 무시한 채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상한 제리헤이드가 조금 더 큰 키로 카르티스를 내려다봤다.
“본인과 관련된 얘기를 혼자만 모르시나 보군요.”
“조금 전 그 말이 내 얘기란 말이오?”
“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저 쉬쉬하고 넘어갈 생각인 것 같으니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아루비스 공, 그게 대체 무슨 뜻이오?”
“폐하의 정부라는 사람들이 오늘 파티에서 소란을 피운 모양입니다.”
“……?”
제리헤이드의 말에 그의 표정이 일순간 구겨지는 게 보였다.
“그 말, 확실한가?”
“소문으론 그렇습니다.”
“정말 확실히 내 정부들이 그랬단 말이지?”
거듭되는 카르티스의 질문에 제리헤이드가 약간의 비소를 머금은 채 그를 쳐다봤다.
“제게 자꾸 의미 없이 되묻지 마십시오. 더 확실한 대답을 원하신다면 폐하께서 직접 모든 정부들을 불러다 확인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
“아, 너무 많아서 한자리에 모으기 힘드려나…….”
“이보시오, 아루비스 공!”
“그럼 제 대답이 부디 폐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만족 되셨길 바랍니다. 조금 답답해서 저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와야겠군요.”
그 말에 카르티스가 자신의 팔로 제리헤이드의 앞을 막았다.
“잠깐! 오늘 이 연회에 그대를 초대한 것은 좋은 분위기에서 교역 협상에 대해 다시 얘기하기 위함이었소. 지금 이대로 어딜 간다는 것이오?”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아니, 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하셔도 이런 큰 파티에서 일 얘기를 꺼내시다니요. 지난번에도 느끼긴 했지만, 폐하는 매번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분이군요.”
“……지금 뭐라 하였소?”
“폐하, 적당히 하시지요. 좋은 분위기는 정부들이 한 번 망친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그의 얘기에, 카르티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제리헤이드가 그대로 거리낌 없이 걸음을 옮기자 바벨 경이 그의 뒤를 급하게 따라왔다.
“공작님! 왜 그러세요?”
“내가 왜?”
“뭔가 화가 나신 것 같아서요.”
바벨 경의 말에 제리헤이드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해봤다.
“화가 난다기보단 왜인지 저 황제라는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나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러다 협상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넌 여기서 놀고 있어. 난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크흠,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래. 그래도 되니까 걱정 마.”
“네, 알겠습니다. 공작님. 이번엔 절대 멀리 가지 마세요!”
제리헤이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벨 경이 신이 난 듯 인사하며 다른 귀족들 틈으로 서둘러 사라졌다.
그리고 제리헤이드는 복잡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제리헤이드가 사라진 후에도 아직 제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카르티스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식식거리고 있었다.
“이보시오, 모르크 후작!”
“예, 폐하.”
그의 부름에 모르크 후작이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그대의 말을 따랐다가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지?”
“폐, 폐하……. 망신이라뇨?”
“이게 망신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그저 상황이 틀어지는 바람에 예측이 조금 빗나간 것뿐입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어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일단 서둘러 아무 말이나 대답했다.
“폐하, 지금은 아루비스 공작 각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오늘 싸움을 일으킨 주동자를 찾아서 죄를 물으셔야 합니다. 그게 지금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주동자?”
“예,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신다면 아루비스 공작 각하의 입을 통해 에리튼 제국에도 폐하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나돌 게 분명합니다.”
“…….”
그의 말에 카르티스가 잠시 고민을 하다 대답했다.
“흠…….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
“예,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도대체 누가 소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일단 제가 얼른 가서 알아볼까요?”
“가서 당장 무슨 일인지 확실히 알아보고 관련된 자들을 전부 데려오도록 하시오.”
“네, 폐하.”
모르크 후작은 혹시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봐 서둘러 다른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
밖으로 나온 제리헤이드는 잠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그런데 혼자 꽃밭을 거닐던 그의 눈앞에 지난번에 마주쳤던 여자가 나타났다.
플로리아였다.
‘오늘 여기서 만나길 바랐지만 정말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그녀는 아주 우울해 보이던 지난번 모습과는 다르게 오늘은 살짝 웃고 있었다.
멀리서 플로리아를 바라보는 제리헤이드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일까. 그는 용기를 내서 다시 플로리아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은 저한테 알려줄 수 있나요?”
잠깐의 대화 끝에 제리헤이드가 그 말을 하자, 왜인지 모르게 플로리아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역시 예상대로 남편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싫은 건가?’
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이런 다정한 말들은 그대의 애인이나 아내에게 해주는 게 어떤가요? 나중에 알면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녀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오히려 더 섭섭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는 애인이 없습니다. 아직 결혼을 한 적도 없고요.”
“아…….”
그러자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플로리아에게 그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그동안 제일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혹시 남편이 있는 건가요? 그래서 그대가 누군지 알려주길 두려워하는 건가 해서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잠시 말이 없던 플로리아가 이번에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는 남편이 있습니다.”
“…….”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제리헤이드는 어쩔 수 없이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에 실망감보다 더 큰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내 남편은 황제 폐하이시죠.”
“……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남편이 황제라는 건…….
“나는 이곳 타레트 제국의 황후, 플로리아 아리안느입니다.”
제리헤이드는 순간 머릿속에 조금 전 연회장에서 마주쳤던 카르티스를 떠올렸다.
그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 보내야 할 황후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여자였을 줄이야.
“아…….”
그는 조금 전의 플로리아처럼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저 시선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황후 폐하!”
그리고 그때, 어색한 침묵을 깨고 플로리아 옆쪽에서 한 여자가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저는 에이니 님의 하녀인 베일리라고 합니다.”
“베일리? 무슨 일이지?”
“잠시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베일리는 곧바로 다음 내용을 대답하지 못하고 제리헤이드를 바라봤다.
“아,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죠.”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차마 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베일리라는 하녀가 지금 이 상황에 나타난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황후 폐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는 플로리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다시 서둘러 연회장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