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봄의 연회에서 생긴 일 (2)
낯선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핏 누군가를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뭐 하는 사람이지? 저 자도 귀족인가?”
벨라가 의심스러운 듯 그의 행적을 눈으로 좇으며 뚫어지게 바라봤다.
사실 그 남자는, 조금 전에 안젤리나를 만나고 온 트리스탄이었다.
안젤리나에겐 곧바로 황궁에서 사라질 것처럼 말하고 떠났지만 트리스탄은 아직 연회장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벨라와 플로리아의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연회에 오기 위해 차려입은 것 같기는 하지만 행색이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내가 웬만한 귀족 가문은 다 아는데 오늘을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 두기도 했고……. 근데 저 사람은 모르겠어.”
“…….”
“그래도 일단 혹시 모르니까 저런 사람은 조심하도록 해.”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벨라 너도 조심하고.”
그때였다.
쨍그랑—.
예리하게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커다란 연회장 전체에 울렸다.
“깜짝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누군지는 몰라도 1층 연회장 입구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이 엉켜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크레티안 경!”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뒤쪽에서 대기하던 자신의 호위기사를 불렀다.
“예, 황후 폐하.”
“내려가서 무슨 일인지 좀 확인해 보고 와요.”
“알겠습니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다시 여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틈에 서 있는 에이니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에이니? 지금 저기서 뭐하는 거지?”
***
한편 그 시각. 1층 연회장.
에이니는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리 사람을 한 명 구해놨었다.
헬렌에게 접근한 후 그녀가 안젤리나의 뒷말을 하는 분위기를 부추기는, 바람잡이 역할을 할 귀족 부인이었다.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을 수소문한 후, 원하는 돈을 주는 대신 오늘 연회장에서 제 역할을 해내기로 미리 약속했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되자, 그녀의 계획대로 바람잡이 역할을 맡은 여자는 헬렌에게 다가간 뒤 먼저 안젤리나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하녀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여자는 황궁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얼마나 떵떵거리고 다니는지…….”
“…….”
“옆에서 매일 그 꼴을 보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니까요?”
처음에 헬렌은 쉽게 이야기에 끼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긴 듯 두 사람 주변에 다른 귀족 부인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제법 모이자 어느덧 그 자리를 주도하고 싶어진 헬렌이 갑자기 자연스럽게 먼저 나서서 안젤리나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제 생각엔…… 그 여자가 황궁에 들어오기 위해 일부러 폐하의 아이부터 가진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왜요?”
그러자 바람잡이 역할의 귀족 부인이 이때다 싶어서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그렇게 가난한 집안 여자를 들이겠어요? 폐하의 체면이 있는데…….”
“맞아요.”
“그건 그렇네요?”
다른 귀족 부인들의 맞장구에 헬렌은 더 신이 난 듯 떠들었다.
“도대체 폐하랑 어디서 만난 건지도 수상하고, 솔직히 그런 질 떨어지는 여자랑 같은 정부로 묶이는 게 너무 불쾌하네요.”
헬렌이 그 말을 하며 인상을 구기는 사이,
“……그래서?”
어느새 그 곁으로 다가온 안젤리나가 헬렌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안젤리나?”
당황한 듯 더듬거리는 헬렌의 말투에, 모여 있던 귀족 부인들이 깜짝 놀라서 자리를 옆으로 비켜주자 그 앞으로 안젤리나가 다가섰다.
“그쪽이 헬렌인지 뭔지 폐하의 다섯 번째 정부라는 사람이야?”
“그렇긴 한데 초면에 반말은 삼가죠? 보는 눈도 많은데 말이에요.”
헬렌이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자 안젤리나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풉. 당신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뒤에서 욕해 놓고 나보곤 예의를 지키라 이거야?”
날카로운 안젤리나의 말에 일순간 주변이 싸해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바람잡이 역할을 하던 귀족 부인은 제 역할을 마친 듯 소리소문없이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
“왜 말을 못 해? 본인이 잘못한 건 아나 보지?”
“이봐요, 안젤리나. 내가 당신 험담을 조금 한 건 미안하지만 그게 이렇게나 무례하게 굴 일인가요?”
“무례하다니? 내가?”
“정말 수준 떨어져서, 참나.”
“뭐? 수준이 떨어져?”
헬렌의 마지막 말을 듣던 안젤리나는 너무 열이 받은 나머지, 옆을 지나가던 하인의 손에 들린 트레이를 바라봤다.
그 위엔 여러 개의 와인잔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순간, 안젤리나는 거침없이 양손에 와인잔을 집어 들고 새하얀 헬렌의 드레스 위로 붉은 와인을 모조리 뿌려버렸다.
“악! 지금 뭐하는 짓이야!”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안젤리나는 이번엔 들고 있던 빈 와인잔을 헬렌을 향해 던져버렸다.
쨍그랑—.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람!”
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자, 모여 있던 귀족 부인들은 다들 깜짝 놀라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게 진짜!”
흰 드레스가 얼룩덜룩하게 물들어버린 헬렌은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옆에 있던 와인잔을 똑같이 집어 들고 그대로 안젤리나에게 부어버렸다.
“뭐야! 당신 미쳤어? 내 드레스…….”
안젤리나는 아직 무도회를 참석하기도 전에 엉망이 된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저기, 진정들 해요.”
“그래요. 좀 참아요.”
이젠 그냥 구경만 하기엔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자 남은 귀족 부인들은 갑자기 저마다 양쪽에 나뉘어서 두 사람을 달래려고 하기 시작했다.
“됐으니까 다들 비켜요!”
그러나 헬렌은 자신의 드레스를 닦아주는 도움의 손길들을 뿌리치고 화난 표정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고 다들 그녀에게 시선이 쏠려있던 그때, 안젤리나의 뒤쪽에서 에이니가 다가가며 제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얼른 가서 드레스 좀 수습해야겠어요.”
“아, 에이니. 고마워요…….”
“고맙긴요. 우린 같은 처지잖아요. 안하무인인 헬렌한테 큰소리 쳐줘서 내가 더 고마워요.”
그 말을 하며 드레스를 털어내 주는 에이니를 안젤리나가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혹시 에이니…….”
“네?”
“오늘 처음 만난 사이긴 하지만 우리 친구 할래요?”
“친구요?”
에이니가 깜짝 놀라며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황제 폐하는 요즘 바쁘시기도 하고, 황궁 안에서 사실 하녀들 말곤 대화할 사람이 딱히 없어서……. 조금 외롭던 참이거든요.”
안젤리나의 말에 에이니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좋죠.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정말요?”
“네, 그런데 우선 파티를 더 즐기려면 아무래도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괜찮다면 저랑 같이 갈래요?”
에이니의 제안에 안젤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사이에 그녀를 완전 신뢰하게 된 안젤리나는 별 의심도 없이 에이니를 따라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회장을 돌아다니는 트리스탄의 뒷모습이 보였다.
“……트리스탄?”
당황한 안젤리나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트리스탄은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그녀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아까 만났던 곳에 다시 찾아가도 안 보이길래 혹시 여기 있나 해서…….”
“왜 아직 안 갔어?”
안젤리나의 차가운 물음에 트리스탄이 그녀 옆에 있는 에이니를 보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게 중요한 할 말이 남았는데…….”
그리고 곧바로 그의 표정을 눈치챈 안젤리나가 에이니 쪽을 바라봤다.
“저기, 에이니?”
“네?”
“아,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순간 에이니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려던 걸 멈췄다.
‘조금 전에 친구하자고 먼저 말해놓고 곧바로 비밀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좀 서운하겠지?’
그 생각을 하던 안젤리나가 결국 고민 끝에 시선을 옮겨 트리스탄을 쳐다봤다.
“이쪽은 에이니라고 믿을 수 있는 내 친구니까 그냥 말해도 돼. 남은 할 말이란 게 뭔데?”
그래봤자 아까 정말 중요한 얘기는 다 끝냈으니 남은 얘기도 별 거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 그게…….”
그러자 트리스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저 얘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얼마 전에 마을에 널 찾는 사람이 다녀간 적이 있어.”
“뭐? 날 왜?”
“네 뒷조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거 같더라고. 조심하라고 말해주려고 기다린 거야.”
“정말이야?”
“그래, 진짜야. 그럼 난 이만 간다.”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이번엔 정말로 연회장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누가 내 뒷조사를 한다고?’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안젤리나는 에이니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갑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에이니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고, 안젤리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플로리아는 헬렌과 안젤리나, 에이니까지 끼어있던 싸움에 대해 크레티안 경에게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그리곤 잠시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이제 곧 무도회가 열릴 시간이라, 절대 멀리 가면 안 된다는 벨라에게 알겠다고 여러 번 대답한 끝에야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아.”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카르티스의 정부들끼리 싸움이 나다니.
얼핏 듣기론 에이니는 예정대로 안젤리나와의 친분을 쌓은 것 같긴 했는데 마음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남편의 정부들 사이에 끼어있는 자신의 처지가 어이없어서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즐거운 일이 있나 봐요?”
그때, 혼자 허탈하게 웃는 플로리아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누구죠? 다, 당신은?”
당황한 그녀에게 티 없이 미소 짓는 이는 며칠 전에 만났던 그 남자, 제리헤이드 아루비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