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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봄의 연회에서 생긴 일 (1) (13/106)

13화. 봄의 연회에서 생긴 일 (1)

황궁 연회장 안은 이제 막 시작된 파티에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각양각색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귀족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화려한 꽃장식과 와인의 향이 은은하게 코끝에 스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던 안젤리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고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꿈에 그리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오는 것 같았다.

‘어느 쪽부터 가면 되려나?’

서둘러 고위 귀족 남성부터 물색을 해야할 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와, 이게 누구야? 너무 예뻐져서 못 알아보겠다?”

안젤리나의 뒤쪽에서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서, 설마 트리스탄?”

한없이 행복하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안젤리나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기억하네? 하도 연락이 없길래 날 잊은 줄 알았는데…….”

안젤리나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를 보자, 지금 이 순간이 혹시 꿈인지 착각이 들었다.

행복해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불안함이 밀려오자 손끝이 시리기 시작했다.

트리스탄 페이쿠스. 그는 사실 안젤리나가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였다.

“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그 말을 하며 트리스탄을 바라보는 안젤리나의 얼굴이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쩐 일?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 한 통 없었잖아. 너라면 가만히 기다릴 수 있겠어?”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 잊었나본데 나도 이래봬도 귀족이라고.”

트리스탄이 얄밉게 웃음 지었다.

“허! 고작 귀족 말단 자리나 차지하는 주제에……. 준남작도 귀족은 귀족이다 이거야?”

“뭐? 너 지금 말 다 했어?”

“시끄러워! 어디서 큰 소리야?”

큰 목소리에 당황한 안젤리나가 그의 손목을 급하게 잡아끌었다.

“조용히 하고, 일단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다른 데서 얘기해. 따라 나와.”

“지금 어딜 가는데?”

“…….”

“어디 가냐니까!”

입에 풀이라도 칠한 듯 안젤리나가 아무 말 없이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자, 트리스탄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연회장 뒤쪽의 한적한 공터.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안젤리나가 급한 걸음을 멈추자, 트리스탄이 그녀에게 잡혀있던 손을 거칠게 빼냈다.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왜 인적 드문 곳까지 끌고 오고 난리야?”

“제발 조용히 하라고!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돈 받기 싫은가 보지?”

안젤리나의 말에 트리스탄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과거 그와 교제하던 중에 황제의 정부로 들어가게 된 안젤리나가 이별을 요구하자, 트리스탄은 헤어져 주는 대신 돈을 달라고 요구했었다.

정부로 들어간 이후에 돈을 좀 두둑이 챙겨주면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다신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그때 당시 안젤리나는 카르티스에게 그동안 남자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순수한 여자인 척 연기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 남자친구를 그냥 버리고 떠났다가 트리스탄이 나중에라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고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에게 원하는 돈을 주겠다고 덜컥 대답해 버렸었다.

“그래, 트리스탄 당신은 늘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

“왜 그래?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돈에 눈이 멀어서 오래된 남자친구도 버린 주제에…….”

그의 말에 안젤리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말 조심해. 내가 누군지 몰라?”

“하, 이제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됐다 이거야? 그럼 진작 약속한 돈을 보냈으면 될 일이잖아. 왜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그건……. 나도 여기서 생활이 바쁘다 보니 연락한다는 게 정신이 없었어. 아직 정부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돈이 없기도 하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조만간 하녀를 통해서 연락 넣을 테니까 일단 오늘은 돌아가.”

그녀의 말에도 트리스탄은 의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이야!”

“좋아. 옛정을 생각해서 한 번은 봐주겠어. 대신 이번 달 안에 연락이 없다면, 황제 폐하께 직접 알현을 신청해서라도 네 앞에 다시 나타날 테니까 두고 봐.”

“…….”

“그럼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간다.”

안젤리나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트리스탄은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하아. 어쩌자고 저런 놈을 만나서…….”

안젤리나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저기, 안젤리나?”

그때, 뒤에서 누군가 안젤리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러자 안젤리나가 얼른 고개를 들어 올리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누, 누구시죠?”

“반가워요. 저는 에이니 시슬리라고 해요.”

방금 트리스탄이 떠난 자리에 다가와 서는 에이니를 보며 안젤리나가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다.

“아, 저를 모르나보네요. 저는 황제 폐하의 네 번째 정부예요.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줄 알았는데…….”

“네 번째 정부라면? 아! 폐하께 버림받았다던…….”

안젤리나는 그 말을 하다가 자신도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요.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요.”

에이니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이세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안젤리나가 묻자, 에이니가 주변을 살피며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사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무슨 얘기요?”

“혹시 헬렌 라플레시아라고 알아요? 안젤리나 당신이 들어오기 전에 있던 다섯 번째 정부죠.”

안젤리나가 누군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사람이 왜요?”

“아까 저도 우연히 들은 건데 헬렌이 다른 귀족들에게 당신의 욕을 하고 다니더라고요.”

에이니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최대한 호들갑스럽게 얘기했다.

“네? 저를요? 정말인가요?”

“네, 안타깝게도 사실이에요. 얼마나 질투심이 많은지 저를 처음 본 자리에서도 먼저 시비를 걸고 그랬거든요.”

“아, 혹시 그 초면에 머리채를 잡았다던…… 그 일 얘기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그게 사실 헬렌이 먼저 시작한 싸움이었거든요. 한동안 조용한 줄 알았더니 이제 안젤리나를 질투하는 건지……. 아무리 그래도 뒤에서 욕을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

안젤리나는 그 얘기에 몹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방금 꼴도 보기 싫은 트리스탄이 다녀가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뒤에서 욕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자 참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그게 카르티스의 정부 중 한 명이라는 얘기에 더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서 지금 그 헬렌이라는 여자, 어디 있어요?”

“음, 조금 전에 연회장 입구 쪽에서 봤어요.”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우린 다음에 또 만나죠.”

“네, 그래요.”

안젤리나가 식식거리며 다시 연회장 쪽으로 들어가자, 그녀에게 웃어주던 에이니가 미소를 거두며 근처에 있던 자신의 하녀를 불렀다.

“베일리!”

“네, 에이니 님.”

“지금 당장 황후 폐하께 가서 트리스탄이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해 보셔야 한다고 전하거라. 아! 그의 작위는 준남작이라고도 똑똑히 전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베일리가 황후궁 방향으로 뛰어가는 걸 지켜보던 에이니는 여유롭게 안젤리나가 사라진 연회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 시각. 플로리아는 벨라를 따라 연회장에 들어온 후, 곧바로 계단을 따라 한적한 2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우선 어떤 귀족들이 왔는지 전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였다.

“벨라,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다 해도 아무나 붙잡고 정부가 되어달라고 말할 순 없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본 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1층 연회장을 살피던 벨라가 옆에 있는 플로리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고위 귀족 가문의 장남보다는 차남, 직급이 조금 낮더라도 평판이 좋은 집안 남자를 찾아보는 거야.”

“…….”

“그런 정부들이 들어와야 큰 말썽을 안 일으킬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그들은 황후의 정부로 들어오는 게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

황후의 정부가 된다면 정치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귀족 입지를 탄탄히 하는데 도움은 될 것이었다.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장남이 거의 돈과 명예를 상속받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른 아들들은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고, 한미한 귀족 가문 사람들은 그저 정부의 자리일지라도 황궁에 발을 들이는 걸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곤 했다.

그리고 혹시 황후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거나 하면 그 아이를 곧바로 황자나 황녀로 올리진 못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자신의 가문을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뒷받침 해 주는 건 가능했다.

황족 혈통의 아이가 생긴 만큼 그 집안에 많은 돈을 지원해주기 때문이었다.

“음, 그건 나쁘지 않네.”

플로리아의 말에 벨라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1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일단 그전에 피해야 할 귀족들을 먼저 알려줄게. 소문도 안 좋고 여자관계도 문란하고 그런 사람들 말야. 잘 모르고 그들 근처에 가면 괜히 피곤해 질지도 모르니까.”

“그래, 얘기해 봐.”

“음, 누구부터 소개할까? 어?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누구?”

플로리아가 벨라가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처음 보는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연회장을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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