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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황제의 네 번째 정부 (2) (12/106)

12화. 황제의 네 번째 정부 (2)

플로리아는 에이니의 마지막 물음을 듣는 순간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왠지 그녀와는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똑같은 정부지만, 적어도 에이니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뒤에서 수상한 짓을 하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플로리아는 아예 대놓고 모든 이야기를 꺼냈다.

“에이니, 실은 네가 나와 손을 잡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안젤리나에 대한 뒷조사를 좀 하려고 하거든.”

“안젤리나라면……. 얼마 전 새로 또 들어왔다던 정부 말씀이신가요?”

“그래. 나 혼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제일 적임자를 고르다 보니 에이니 네가 떠올랐단다.”

에이니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제안이니 고민이 될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흔쾌히 긍정의 대답을 내놨다.

“좋습니다. 무슨 일이든 황후 폐하를 돕겠습니다. 대신…….”

“대신?”

“저도 좀 도와주십시오.”

“좋다. 나도 네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 도와줄 테니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에이니는 기운 없어 보이던 아까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어느새 생기 넘치는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제가 헬렌과 황제 폐하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복수? 그것도 제국의 황제에게 복수를 한다고?’

플로리아는 의외의 제안에 놀라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오히려 긍정적인 부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조금 전 털어놓았던 과거가 거짓은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복수라면 방법은 생각해 둔 게 있느냐?”

“그건 아직…….”

“어쨌든 알겠다. 어떤 식으로 그 복수를 할지는 차차 생각하기로 하자꾸나.”

“네,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두 사람은 그제야 서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에이니가 플로리아 쪽으로 몸을 바짝 당겨 앉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이제 제가 뭐부터 하면 될까요?”

***

그날 저녁, 제리헤이드가 묵고 있는 남쪽 황궁의 침실.

노크 소리와 함께 바벨 경이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그게 뭐야?”

“공작님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초대장이라니? 타레트 제국에서 따로 참석할 곳은 없을 텐데……. 내 앞으로 온 게 맞아?”

“모르크 후작이라는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내일 회의가 미뤄졌다고 대신 이곳에 참석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모르크 후작이라면 그 성격 고약한 황제의 비서로군.”

바벨 경이 들고 있던 봉투를 넘기자 제리헤이드는 곧바로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흠, 내일 있을 봄의 연회에 초대한다는데?”

“정말요? 거기 가실 겁니까?”

바벨 경이 신이 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글쎄. 근데 바벨 넌 왜 그렇게 좋아해? 그게 뭐길래?”

“봄의 연회 모르십니까? 매년 이맘때 타레트 제국에서 열리는 황실 파티잖아요.”

그 말에 제리헤이드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아? 타레트 사람도 아니면서…….”

“젊은 나이에 그런 큰 파티에 관심 없는 공작님이 특이하신 겁니다.”

“그래, 난 특이해서 별로 관심 없으니까 초대장은 필요 없을 것 같군.”

그 말에 바벨 경이 깜짝 놀라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 안 가시려구요? 황제 폐하의 초대까지 받으신 건데…….”

“난 그런데 관심 없다니까.”

“그럼 저 혼자라도 다녀와도 될까요? 분명 아리따운 귀족 여인들이 다들 모이는 자리일 텐데……. 그런 파티를 놓치면 정말 아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던가.”

그 말을 하며 초대장을 바벨 경에게 넘기려던 제리헤이드가, 갑자기 그 손을 멈추며 물었다.

“잠깐! 그럼 이곳 귀족 여자들은 다들 그 파티에 참석하려나?”

“아마도요? 웬만하면 거의 참석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왜 그러십니까?”

그 순간 제리헤이드의 머릿속엔 우연히 정원에서 만났던 플로리아를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조금의 가능성만 있다 해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그녀를 다시 마주칠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결국 그의 시선은 다시 바벨 경에게 받은 봉투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 파티, 나도 참석해야겠어.”

“네? 갑자기요? 왜요?”

그리고 그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바벨, 네가 외로울까 봐 같이 가주려고.”

***

다음 날 아침. 황실 재단사에게 미리 주문해 놓았던 드레스가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와……. 언니 너무 아름다운 거 아냐?”

“황후 폐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연회용 드레스를 입는 걸 도와주던 벨라와 에르앙 백작 부인의 말에, 두 사람 사이에 껴있던 플로리아가 민망한 듯 수줍게 웃었다.

“둘 다 너무 칭찬이 과한 거 같은데…….”

“과하다니요. 황후 폐하께서 지금 스스로의 모습을 못 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맞아요! 이대로 연회에 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눈부셔서 곁에 오지도 못하겠는데요?”

잠시 심부름을 갔던 에쉬가 에르앙 백작 부인의 말에 적극 동의하며 이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역시 언니는 이렇게 어깨를 드러내야 더 아름다운 법이지. 그동안 목 끝까지 올라오는 드레스 입고 다니느라 힘들었지?”

“괜찮아. 다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플로리아는 그 말을 하며, 한쪽에 놓인 커다란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가 섰다.

훤히 드러난 어깨 부분에 풍성한 레이스와 프릴 장식이 돋보이는 밝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에서 플로리아의 금발 머리칼과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드레스 색에 어우러지며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그녀의 목에 있던 피멍들은 다행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황후 폐하의 희고 고운 피부 덕분인지 푸른빛 드레스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자, 이제 준비는 다 됐습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화려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고마워요, 부인.”

대답을 하던 플로리아는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마음에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상큼한 노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벨라가 플로리아의 곁에 다가서며 약간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니, 내가 지난번에 약속한 대로 오늘 정말 멋진 정부를 찾아줄게. 알겠지? 걱정 말고 나만 믿으면 돼!”

긴장한 듯한 플로리아의 기분을 눈치채고 그녀를 편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 너만 믿을게.”

그녀 덕분에 플로리아도 그제야 마음 편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

현재 시각을 확인한 벨라가 플로리아의 팔을 이끌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아, 그전에 잠깐만! 에쉬?”

플로리아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에쉬를 불렀다.

“네, 황후 폐하.”

“아까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아, 맞다! 죄송해요. 다녀와서 바로 말씀드린다는 게 황후 폐하의 드레스를 구경하느라 깜빡했어요.”

에쉬가 사과하자 플로리아가 웃으며 바라봤다.

“괜찮으니 지금 얘기해 보거라. 에이니가 뭐라 하였느냐?”

“말씀하신 대로 에이니님께 전달했더니 잘 알겠다고 황후 폐하께서는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플로리아는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에이니에게 중요한 일을 부탁한 상태였다.

오늘 연회장에서 안젤리나에게 접근해 그녀와 친분을 쌓을 것.

많은 고민을 해봤지만 몰래 안젤리나 뒤에서 움직이기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나을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일단 친분을 쌓아야 앞으로 안젤리나의 뒷조사를 하다가 들키거나, 혹시 대놓고 과거를 물어보는 일이 생기더라도 덜 위험할 테니까.

물론 에이니가 같은 정부의 입장에서 안젤리나와 과연 어느 정도까지의 친분을 만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플로리아가 그녀에게 이 부탁을 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긴 했다.

사실 에이니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평생 알던 사이가 아닌 이상 믿을 만한 사람인지 꼼꼼하게 확인해 두는 편이 안전하겠지.

“그래, 수고했다. 오늘 연회에서 에쉬 너는 티나지 않게 에이니를 주시하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에쉬의 당찬 대답에 그제야 플로리아는 마음 편히 봄의 연회가 열리는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안젤리나는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졌다.

오늘이 바로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봄의 연회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에도 별로 입맛이 없었다. 오로지 마음속엔 파티에 대한 환상뿐이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시간이 더디게 지나,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연회 시간이 다가왔다.

연회에 가기 전, 거울을 바라보던 안젤리나는 풍성하게 부푼 자신의 드레스에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연분홍색 드레스는 마치 봄의 정원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와, 너무 마음에 들어. 이 옷을 입고 오늘 파티에서 아름답게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들 나한테 반하겠지?”

안젤리나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분명 황후 폐하보다 내가 훨씬 더 눈에 띌 거야.”

이곳에 정부로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는 춤을 잘 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었다.

그저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 그때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참 아름다웠는데…….’

지난 과거를 떠올리던 안젤리나는 그 순간 깜짝 놀라며 표정을 구겼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제 이곳에 폐하의 정부로 들어온 이상 지난 과거 따윈 없는 건데……. 잊어버려야 돼.”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지난 기억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그리곤 오늘 열릴 연회의 무도회에서 제일 멋진 남성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다시 상상했다.

“이젠 앞으로 행복할 미래만 떠올려야지. 그런데 황제 폐하는 안 오시는 건가? 그래도 폐하랑 춤을 춰야 다른 귀족들이 나를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볼 텐데…….”

그녀는 수많은 귀족 사이에서 하나의 별처럼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 있었다.

사실 안젤리나는 처음 황궁에 들어오던 날 남들은 모르는 혼자만의 결심을 했었다.

황후보다 강력한 권력을 쥔 정부가 되겠다고.

남들은 그녀가 착하고 순한 줄로만 알지만 알고 보면 야욕이 넘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껏 황후 자리를 탐낸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황후 자리에 운 좋게 올라간다 한들, 다른 귀족들이 대놓고 무시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쥔 정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황제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황후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정부는, 귀족들도 무시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일 게 분명했다.

그게 바로 그녀가 바라는 자리였다.

“황제 폐하가 안 오시게 되면 같이 춤출 고위 귀족이라도 찾아봐야겠어.”

그녀는 하나라도 흐트러지지 않게 머릿속으로 오늘 파티에서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두었다.

“그래도 혹시 폐하께서 오실 수도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지.”

그렇게 안젤리나는 행복한 기대를 하며 서둘러 연회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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