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황제의 네 번째 정부 (1)
“네, 황후 폐하. 부르셨어요?”
마음이 급해진 플로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에쉬에게 물었다.
“혹시 에이니의 밑에서 일하는 하녀랑 친하느냐?”
분명 예전에 에쉬가 황궁 내의 많은 하녀들과 폭넓게 인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황제 폐하의 정부인 에이니 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내가 급하게 에이니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 플로리아가 말하는 사람은 에이니 시슬리였다. 그녀는 1년 반 정도 전에 카르티스의 네 번째 정부로 들어온 여자였다.
사실 에이니는 무엇보다 최단 시간 내에 황제에게 버림받은 여자로 유명했다.
카르티스가 작년에 다섯 번째 정부를 들이던 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에이니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새로 온 정부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크게 실망한 카르티스는 다신 에이니에게 찾아가지 않았고,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지쳐 별궁 내의 개인 공간 외엔 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완전 친한 건 아니지만 서로 안부 정도는 묻고 지냅니다.”
에쉬의 대답에 플로리아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 정도면 에이니를 불러내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강한 질투심을 잘만 이용하면 안젤리나의 뒷조사를 하는 일에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 그럼 그 하녀를 통해 에이니를 내 방으로 좀 불러주겠느냐?”
“지금 당장이요?”
“그래. 대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꼭 전하고.”
“네, 알겠습니다.”
플로리아의 당부가 끝나자 에쉬가 서둘러 별실을 빠져나갔다.
***
한편. 카르티스는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탁자 위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고 바닥으로 내팽개치듯 던져 버렸다.
“버릇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모르크 후작!”
그의 부름에 비서가 긴장하며 옆으로 다가와 섰다.
“예, 폐하.”
“아루비스 공작이라는 자는 원래 에리튼의 교역 담당이 아니지 않았는가?”
“네. 이번에 교역 업무를 새로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후. 아무리 그가 공작이라고는 하나, 상대국의 황제에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다니……. 계속 이렇게 협조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번 기회에 에리튼 제국과의 모든 거래를 끊어버리는 걸 검토해야겠소.”
매우 화난 듯한 카르티스의 눈치를 보던 모르크 후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죄송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에리튼 제국은 아시다시피, 다른 대륙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고급 가죽 원단이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작년부터는 그곳에서만 재배가 가능한 품종의 원두도 대량으로 들여오고 있고요.”
“…….”
“요즘 귀족들과 평민들을 막론하고 모든 제국민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가죽 신발과 커피의 원료이지요. 아마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민들에게까지 불만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물론 카르티스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너무 현실적인 얘기만 하는 모르크 후작을 그가 매섭게 쳐다봤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무시를 당하면서까지 회의를 진행하라는 것이오?”
“폐하, 진정하십시오.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이다 보니 아루비스 공작 각하 쪽에서 신경전을 펼치려 하는 것 같은데 거기에 휘말리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카르티스가 동요한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신경전?”
“예. 첫 협상을 하는 자리에선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요. 내일은 폐하께서 기선제압을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말인가?”
“그게…….”
모르크 후작은 좋은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잠시 후 뭔가 생각난 듯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폐하! 봄의 연회를 이용하는 건 어떠십니까?”
카르티스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파티 얘기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또 무슨 말인가? 봄의 연회를 이용하다니?”
“내일이 바로 연회가 열리는 날 아닙니까? 그 자리에 아루비스 공작 각하를 초대하는 겁니다.”
“…….”
“그러고 나서 분위기 좋은 때를 노려 저희 측에 유리한 협상이 되도록 잘 구슬려 보는 것이지요.”
“지금 고작 그게 기선제압을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오?”
“예. 분명 확실합니다.”
확신에 찬 말에도 카르티스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당황한 모르크 후작이 더 열심히 재잘대기 시작했다.
“파티만큼 사람을 들뜨게 하는 곳은 없지요. 그리고 기분이 들뜨다 보면 자연스레 이성과 판단력이 흐려지게 될 것입니다.”
“…….”
“지금 당장은 별로 내키지 않으실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아루비스 공작 각하와 친분을 쌓거나 한다면 오히려 나중에 폐하께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흠, 내게 도움이 된다…… 어째서지?”
“마주 보고 선 적군을 일단 옆에 두면, 당장은 아군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카르티스가 솔깃하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는 나쁘지 않겠군. 어차피 에리튼 제국과 당장 모든 걸 끊을 수 없다면 오히려 내 편을 만들어 두는 게 안전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제야 화가 좀 누그러진 듯 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모르크 후작, 내일 회의는 일단 좀 더 미뤄두고 아루비스 공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폐하.”
황후 때문인지 요즘 부쩍 업무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진 황제 덕분에 모르크 후작은 할 일이 많아져 몸은 힘들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입지를 잘 다져두면 나중에 내 아들에게도 수석비서 자리를 넘겨줄 수도 있겠어.’
그는 그 생각을 하며 카르티스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
한편 그 시각. 플로리아도 자신의 응접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들어왔다.
“황후 폐하,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그녀는, 카르티스의 네 번째 정부 에이니 시슬리였다.
“에이니, 못 본 사이 많이 여위었구나.”
“갑자기 저를 왜 부르신 겁니까? 몰래 오라고까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플로리아의 걱정 어린 표정에도 에이니는 대놓고 그녀를 경계했다.
그동안 이 넓은 황궁 안에서 외톨이처럼 지내다 보니, 소문과는 다르게 불같던 질투심은 많이 누그러진 듯 보였다.
“솔직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동안 몰랐겠지만 사실 난 폐하의 여섯 정부들 중 네가 제일 믿음직하고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플로리아의 말에 에이니가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네? 제가요?”
“그래. 비록 황제 폐하께서 네가 궁에 들어온 후 넉 달도 채 되지 않아 새 정부를 들이셨지만, 난 너와 친하게 지내던 그 짧은 시간이 꽤 즐거웠으니 말이야.”
사실 그녀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 과장한 것도 있지만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동안 플로리아는 안젤리나를 포함한 다른 정부들 모두와 교류를 하고 지내왔지만 에이니는 그중에서도 제일 말이 잘 통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황후의 자리를 넘보거나 남을 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저 정부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게 전부였다.
“에이니, 혹시 말이다. 작년 그날, 왜 헬렌에게 달려들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헬렌은, 처음 황궁에 들어오던 날 에이니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다섯 번째 정부의 이름이었다.
“…….”
이런 질문을 하면 자신은 억울하다며 모든 사실을 바로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에이니는 의외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모든 걸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뭔가 다른 속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궁금해진 플로리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좀 더 캐물었다.
“혹시 네가 먼저 시비를 건 게 아니었느냐? 지금 널 돕고 싶어서 묻는 것이니 부디 내게 진실을 알려다오.”
에이니는 우물쭈물하며 한참을 주저했다.
“……에이니?”
그러나 플로리아의 다정한 목소리에 결국 마음이 바뀐 듯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 제가 하는 말을 믿어주실 건가요?”
“그래. 약속하겠다. 대신 너도 내게 진실을 말하겠다고 약속하거라.”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황후 폐하 앞에서만큼은 진실만을 말하겠어요.”
에이니는 그 말을 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플로리아는 그저 그녀가 다음 말을 꺼내길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실은 그날이…….”
곧 에이니는 울먹이던 걸 진정하고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있을 제 생일을 축하해 주신다며 폐하께서 직접 별궁으로 선물을 들고 찾아와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날이었습니다.”
“…….”
“그런데 시간이 다 되도록 안 오셔서 제가 직접 본궁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우연히 폐하와 마주쳤습니다. 한 여자와 있으시더군요. 그리곤 제게 새로 온 정부라며 헬렌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플로리아는 일단 그 말을 끊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그때까지도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게 주시기로 한 생일 선물은 어딨는지 여쭤보니 바빠서 잊어버리셨다며…… 그렇게 선물이 갖고 싶었다면 다음에 언젠가 시간이 날 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
“정말 폐하께서는 헬렌을 정부로 들일 시간은 있고, 미리 약속한 제 생일 선물을 준비할 시간은 없으셨을까요?”
“…….”
“그런데 그 순간, 그 여자…… 헬렌이 저에게 이제 그만 비키라고 하더군요. 가던 길 그만 막고 비키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너무 화가 나서 헬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아.”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저 머리카락을 잠시 잡은 것뿐인데 헬렌은 제가 목이라도 조른 것처럼 바닥에 쓰러지며 소리를 질렀고 폐하는 그 자리에서 그 여자의 편만 들어주셨습니다.”
“…….”
“황후 폐하, 이건 황제 폐하께서 너무하신 일 아닌가요? 결국 그때 이후로 저만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플로리아가 에이니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폐하께서 그런 면이 있으신 건 알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무심한 분이시구나.”
그러자 에이니가 슬픈 표정을 뒤로한 채 플로리아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 이런 제 이야기를 이제 와서 듣자고 부르신 건 아닐 텐데……. 진짜 이유가 뭔가요?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