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후작 부인이나 공작 부인
타레트 제국의 본궁 동쪽.
제리헤이드는 비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과 옷을 손으로 툭툭 털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바벨 경 앞으로 다가갔다.
“공작님! 드디어 오셨네요.”
뒤늦게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던 호위기사 바벨 경이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에리튼 제국에서도 그러시더니……. 왜 매번 혼자 사라지십니까?”
바벨 경의 말에 그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누굴 좀 만나고 오느라.”
“누구요? 공작님이 아실만한 분은 여기 없지 않나요?”
“있어, 그런 사람. 나 많이 기다려서 화났나 봐?”
플로리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르게 제리헤이드가 편한 말투로 물었다.
“예! 당연하죠.”
그 말을 하는 바벨 경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닦았다.
“미안.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저 진짜, 공작님께서 더 많이 늦으시는 줄 알고 식겁했습니다.”
“뭘 식겁까지. 갑자기 내리는 비만 아니었어도 더 늦었을 텐데……. 아쉽군.”
제리헤이드는 문득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플로리아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지금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아쉽다뇨?”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바벨 경이 날카로운 실눈을 떴다.
“저기, 그보다 바벨. 혹시 이 황궁 안에 혼자 돌아다니는 여인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귀족 같긴 했는데…….”
제리헤이드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플로리아를 향한 궁금증을 가득 안고 물었다.
사실 그는 큰 기대 없이 타레트 제국에 억지로 온 거였고,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황궁 정원을 찾아간 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혼자 우울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던 플로리아를 발견했다.
예쁜 꽃을 보면서도 얼굴을 구기고 있던 여자.
평소 같았으면 절대 남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질척대다시피 붙잡고 늘어져 버렸다.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와서 생각하니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건 아닐까 싶은 말들도 이미 뱉어버린 후였다.
처음 본 여자에게 한 제국의 공작이 제 이름까지 술술 불어버리다니.
“귀족이라면 뭐, 남편을 따라온 후작 부인이나 공작 부인쯤 되지 않을까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이어지는 바벨 경의 무덤덤한 대답에 제리헤이드는 아차 싶었다.
아까 만났던 그녀가 정말 남편이 있거나 한 상황이라면, 자신이 했던 말들은 큰 무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했던 말을 부담스러워한 게……. 혹시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조금 전까진 산뜻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싸하게 식어버린 것 같았다.
“공작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제리헤이드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실은 그녀가 아주 많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그게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누군가 인연을 만들러 온 것도 아니었고.
그에겐 아직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보다, 황실에선 아직 연락 없었어?”
“아! 안 그래도 황궁 대회의실로 오시라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리헤이드는 오늘 이곳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회의 일정이 잡혀서 카르티스 황제를 만나러 왔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회의를 하기로 한 시각에 카르티스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약속 시간을 미뤘다.
심지어 미뤄진 시각은 알려주지 않은 채, 급한 일이 있다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아무리 일국의 황제라 해도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었지만 교역 사신단의 자격으로 방문한 공작이 딱히 황제에게 뭐라 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제리헤이드는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황실 정원까지 가게 된 거였다.
덕분에 우연히 플로리아를 만날 수 있었지만 괜히 자신이 감정적으로 실수를 한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다.
“이런. 지금 머리가 젖어버려서 첫인상이 너무 지저분 할까봐 걱정이네.”
제리헤이드가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기 위해 급하게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하지만 이미 젖은 상태라 딱히 지금과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음, 제가 볼 땐 그대로도 충분히 멋지시긴 합니다.”
제리헤이드의 머리를 눈으로 훑던 바벨이 중얼거렸다. 가볍게 한 얘기지만 진심이었다.
작은 얼굴에 담긴 뚜렷한 이목구비 덕분인지 지저분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에 살짝 젖은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날 너무 좋아하진 마, 바벨. 부담스러워.”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이 정도 애정 없이는 공작님의 호위기사로 일하기 힘들 겁니다. 워낙 극한 직업이라서요.”
익살스럽게 말하는 제리헤이드를 따라 바벨이 더 능글맞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그러다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바벨 경에게 물었다.
“아, 그래서 대회의실은 어디라고?”
“저쪽입니다.”
“일단 더 늦기 전에 서두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제리헤이드는 지금껏 장난스럽던 표정을 싹 거두며 진지한 얼굴로 앞장서서 회의실로 향했다.
***
큰 규모의 대회의실 안.
이미 상석에 앉아있는 카르티스에게 그의 비서인 모르크 후작이 다가갔다.
“폐하, 아루비스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제리헤이드가 회의실 안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처음 뵙겠습니다. 에리튼 제국의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이라고 합니다.”
“아루비스 공, 좀 늦었군.”
회의실 한쪽 벽면에 장식된 벽시계를 바라보던 카르티스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
“첫 회의에서 황제를 기다리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흠, 아루비스 공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도록 하겠소.”
카르티스는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에리튼 제국 사람이 회의 시간에 늦은 것에 불만을 표출하는 것 같았다.
“일단 그쪽으로 앉으시오.”
카르티스가 손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제리헤이드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실은 워낙 바쁘신 폐하를 기다리다 지쳐서 잠시 황궁을 구경한다는 게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습니다.”
“…….”
제리헤이드가 일부러 꺼낸 그 말에, 카르티스의 이마에 선명한 주름이 잡히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무슨 급한 일이 있으셨기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셨던 겁니까? 설마 이런 대낮에 정부라도 데리고 있으셨던 건 아니겠지요?”
자신의 잘못은 모른 채 지각을 지적하는 카르티스에게 제리헤이드가 일부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건넸다.
사실 그냥 농담 삼아 가볍게 한 이야기였지만, 진심으로 당황하는 것 같은 카르티스의 표정을 보니 정말 정부와 함께 있던 건가 싶기도 했다.
“그건 내가 그대에게 보고할 일은 아닌 것 같군.”
“아,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
“그저 처음 뵙는 자리라 궁금증이 넘쳤을 뿐이니 마음 넓은 폐하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자, 카르티스는 헛기침을 한 후 비서를 향해 손짓해 보였다.
“모르크 후작. 어서 준비된 서류나 가져오시오.”
그러자 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들을 두 사람 앞에 각각 한 묶음씩 내려놓았다.
“이번에 새로 제정된 교역 규정에 관한 서류요. 일단 한 번 읽어보시오.”
“그러지요.”
카르티스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꼼꼼하게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제가 잠시 훑어보니 전부 타레트 쪽에만 유리하게 적힌 내용들이군요.”
한참 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나던 회의실 안에 제리헤이드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어딜 봐서 그런 소릴 하는 것이오? 에리튼에서 요구한 것들을 모두 반영한 게 안 보이나?”
그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살짝 웃음을 내비쳤다.
“폐하께서는 다른 국가들과 교역할 때도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자국에만 유리한 문구를 사용하셨습니까?”
“이보시오, 아루비스 공!”
카르티스가 흥분한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도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공작 각하, 황제 폐하 앞에서 무례한 언행은 삼가시지요.”
참다못한 모르크 후작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자 제리헤이드가 그를 바라봤다.
“그쪽이 모르크 후작이라고 했나요? 방금 전 내 언행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모르크 후작, 그대는 가만히 있게.”
“……예? 죄, 죄송합니다, 폐하.”
예상치 못한 카르티스의 말에, 모르크 후작이 서둘러 사과를 한 후 이제 더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루비스 공도 알다시피 매번 에리튼 쪽에서 말썽을 일으키다 보니 교역 내용이 우리 쪽에 조금 유리한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오.”
카르티스는 그사이 흥분을 가라앉힌 듯했다.
“폐하,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지난 수년간 있었던 분쟁을 분석해 놓은 자료들만 보아도 대부분 문제는 타레트의 상인들 쪽에서 일으켰습니다. 제가 직접 그 서류를 찾아서 보여드릴까요?”
계속해서 제리헤이드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자,
“후, 이대로는 끝이 없겠군.”
결국 카르티스가 심기가 불편한 듯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
“피곤하니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 말을 남긴 채, 카르티스는 인사도 없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크흠. 그럼 저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모르크 후작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리헤이드에게 급하게 인사만 건넨 후 허겁지겁 그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런 카르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리헤이드가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런 황제를 믿고 따라야만 하는 타레트의 제국민들과 그의 황후가 참으로 불쌍하군.”
자신이 말한 그 황후가 플로리아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서류를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나 곧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그날 저녁. 황후궁 옆 벨라가 묵고 있는 별실.
벨라와 플로리아가 마주 앉아 내일 있을 봄의 연회가 어떨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문을 쳐다봤다.
“네, 들어와요.”
플로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레티안 경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크레티안 경, 무슨 일이죠?”
“저……. 황후 폐하.”
그는 뭔가 플로리아에게만 할 말이 있는 듯 어색하게 벨라를 쳐다봤다.
“아…….”
그러자 눈치 빠른 그녀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몸이 뻐근하네. 언니, 난 잠깐 산책 좀 다녀올게.”
“그럴래? 위험하니까 멀리 가진 말고.”
“걱정 마. 하녀들 몇 명 데리고 다녀올 생각이니까.”
두 사람이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벨라가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자, 크레티안 경이 말을 꺼냈다.
“황후 폐하께서 지난번에 제게 부탁하신 일 말입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다행히 벨라와 편하게 얘기하기 위해 시녀와 하녀들을 모두 밖으로 보내놓은 상태라 주변에 이야기를 엿들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이내 크레티안 경이 고개를 숙였다.
“시키신 대로 안젤리나님의 과거 행적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플로리아의 물음에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통 뒷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자를 고용하면 며칠 내로 상대방의 웬만한 정보는 다 알아내는 법인데……. 안젤리나 님 같은 경우는 누가 일부러 과거를 알아내지 못하게 덮어두기라도 한 듯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일부러 과거를 숨겼다는 건가요?”
“네. 그게 저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크레티안 경이 뒷조사를 실패한 덕분에, 플로리아는 오히려 안젤리나를 향한 작은 의심이 확신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굳이 자신의 과거를 숨길 필요가 없었을 테니.
그것도 일부러 막아놓기까지 하면서 숨긴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확실히 안젤리나는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해.’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여기서 더 깊게 안젤리나의 뒤를 캐고 다니는 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괜히 이러다가 자신이 그녀의 뒷조사를 한다는 사실이 안젤리나나 카르티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크레티안 경. 수고했어요. 이제부턴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네. 황후 폐하.”
플로리아는 그 말을 한 후, 일단 크레티안 경을 밖으로 내보냈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 안젤리나의 행적을 알아낼 방법이 과연 뭐가 있을까?’
그녀는 혼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쉬! 밖에 있느냐?”
그리곤 곧바로 밖에서 대기 중인 하녀 에쉬를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