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소나기 같은 남자
제리헤이드가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벨라와 에르앙 백작 부인이 플로리아의 곁으로 급하게 뛰어왔다.
“황후 폐하. 아직 여기 계셨습니까?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인데 회랑에 들어가 계시지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점점 빗물에 젖어가는 플로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지금 막 비를 피하러 들어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이제 다시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 돌아가야만 할 테니까요.”
낯선 이의 곁에서 잠시 황후로서의 위엄을 내려놓고 있던 순간을 떠올리며 플로리아가 나직이 내뱉었다.
“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에르앙 백작 부인이 그 뜻을 되묻자, 그녀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바람이 불기 전에 어서 서둘러 돌아가도록 하지요.”
“네, 황후 폐하.”
자신의 드레스를 붙잡아주는 에르앙 백작 부인을 바라보던 플로리아는, 옷이 더 젖어버리기 전에 급하게 황궁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한편, 그 시각 황제의 침실.
카르티스는 갑자기 큰일이 생겼다며 찾아온 안젤리나 때문에 급한 업무들도 미뤄놓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아무도 대화를 엿들어선 안 되니 비서를 포함해 그 누구도 방 안에 들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안젤리나, 도대체 무슨 일이냐?”
“……폐하. 다름이 아니라 제가 너무 속상한 일이 있어서요.”
“속상한 일?”
카르티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네. 폐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봄의 연회가 열리는 날 제가 황후 폐하보다 더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요.”
“그래, 그랬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안젤리나는 잔뜩 심통이 난 사람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드레스 제작을 위해서 황실 재단사를 찾아갔는데요.”
“…….”
“그자가 황후 폐하의 드레스 디자인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저에게 면박을 주는 게 아니겠어요?”
“재단사가?”
“네. 정말 사람 무안하게……. 황후 폐하의 드레스를 미리 확인하려고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나 뭐라나. 저는 그저 제 드레스보다 더 예쁘면 안 되니까, 제 의상 디자인에 참고할 겸 살짝 보기만 하려고 한 거거든요.”
“…….”
“누가 보면 제가 황후 폐하 드레스를 망치려고 한 줄 알겠어요. 저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닌데…….”
무슨 생각인지 카르티스는 별 대답 없이, 그저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심지어…… 지금 당장 신체 치수를 재서 제 몸에 아주 딱 맞는 드레스로 만들어 달라고 해도, 치수 재는 일을 마치 기분이라도 나쁜 듯 한사코 거절하더라니까요.”
안젤리나는 이제 아예 미간까지 구기며 매우 화가 난 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딱 보니까…… 제가 황제 폐하의 정부라고 은근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사람을 황실에 그냥 둬도 되는 건가요? 폐하, 저 정말 속상해요.”
안젤리나가 칭얼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불만섞인 그녀의 말이 다 끝나자, 그제야 카르티스는 잠시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안젤리나. 황제와 황후의 옷을 만드는 경우, 의상을 절대 외부로 유출할 수 없게끔 국법으로 정해져 있단다.”
“네? 그런 법이 있나요? 아니, 저는 그냥 살짝 보기만 하려고 한 건데…….”
“보여주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으니 그건 네가 이해하거라.”
“…….”
“그리고 재단사는 황궁 내의 모든 사람의 옷을 만들기만 할 뿐, 신체 치수를 재는 일은 하녀들의 몫이다.”
카르티스는 그 말을 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네가 아직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 황실 재단사는 대부분 황족의 옷을 만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몸에 손을 대선 안 돼. 그래서 시녀들이 각자 치수를 재서 가져오면 그걸 토대로 옷을 만들기만 하지.”
“아…….”
안젤리나는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혼자 흥분해서 떠들던 게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리고 카르티스에게 직접 그 말을 듣자 황실 재단사가 더 얄밉게 느껴졌다.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지? 그런 사정이 있으면 미리 재단사가 언질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거 아냐?’
그녀는 앞뒤 사정 따져보지 않고 곧바로 카르티스에게 달려와서 모든 일을 일러바친 지금 상황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안젤리나.”
그러나 카르티스가 그런 그녀를 다정하게 불렀다.
“네, 폐하.”
“내가 지난번 네게 황후보다 주목받고 오라고 한 건, 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으라고 말한 게 아니다.”
“…….”
“드레스는 그저 너에게 어울리는 옷으로만 고르면 될 뿐. 그날 남들 눈에 띌 수 있는 행동이나 말로 분위기를 이끌면 그만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안젤리나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난 괜찮지만 네가 그렇게 일희일비하고 흥분하는 일이 자꾸 생기면 배속의 아이에게 좋지 않을 테니 앞으론 좀 더 조심하도록 하거라.”
“네, 폐하.”
안젤리나가 힘없이 대답하자 카르티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얘기는 끝난 것 같으니 난 지금 바로 집무실에 가봐야 할 것 같구나. 할 일이 밀려서 말이다. 너도 이만 돌아가 보거라.”
“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충격을 받기라도 한 건지 그녀는 더 이상 별말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그리고 안젤리나가 나가는 걸 확인한 후 카르티스가 크게 한숨을 뱉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녀를 궁 안에 들인 이후로 부쩍 신경 쓸 일이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젤리나는 그래도 좀 타이르면 잘 따르는 편이어서 그리 피곤하게 굴진 않았다.
그보다 지금 그를 제일 피곤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황후인 플로리아였다.
평생 얌전할 줄로만 알았던 황후가 제 골칫거리가 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저, 황제 폐하.”
카르티스가 플로리아를 잠시 떠올리던 그때,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기사가 안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안젤리나 님께서 안에 계시는 동안 황후 폐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황후가?”
카르티스는 하필 안젤리나가 와 있는 동안에 그녀가 다녀갔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예. 다음에 다시 오시겠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설마, 안젤리나가 안에 있다는 걸 얘기했느냐?”
“그게…… 제가 직접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 알겠다. 이만 나가 보거라.”
“예, 폐하.”
그의 말에 호위기사가 인사를 한 후 다시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갔다.
예전 같으면 플로리아가 뭘 하든 자신이 뭘 하든 서로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요즘따라 부쩍 카르티스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였다. 그에겐 지금의 그 상황이 너무 귀찮게만 느껴졌다.
“참 피곤하게 하는군.”
그래서 그저 뒤늦게 시작된 황후의 반항이 얼른 봄의 연회를 기점으로 가라앉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플로리아가 서쪽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오자 빗줄기는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은 그녀는 에르앙 백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살짝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잘 갔으려나?”
그녀가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벨라가 물었다.
“잘 가다니? 누가?”
“응? 뭐가?”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놀라 괜히 벨라에게 되물었다.
“언니가 방금 잘 갔는지 걱정했잖아. 누굴 그렇게 걱정하는데?”
“아, 그게…… 저기 벨라.”
“응?”
“혹시 아루비스라는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플로리아는 은근슬쩍 벨라에게 제리헤이드에 대해 물었다.
사실 아까 만났던 그 남자는 자신이 어느 귀족계층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꽤 고위 가문의 자제 같았다.
이건 그냥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얼핏 본 게 전부지만 그가 입은 옷의 옷감은 모두 고급 수입품 같아 보였고 심지어 신고 있던 신발은 처음 보는 질감의 가죽을 사용한 것이었다.
전부 타레트 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들.
그건 분명, 일반 귀족들도 쉽게 마련하기 힘든 값비싸고 희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재력이 넘치고 유명한 귀족 가문이라고 하기엔 아루비스라는 성은 너무 생소했다.
황후가 알지 못하는 고위 귀족 가문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잘 모르는 신생 가문인가?’
아까부터 혼자서 계속 고민하던 플로리아는 결국 자신보다 더 귀족들의 정보에 관심 갖고 잘 아는 벨라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글쎄, 아루비스는 나도 처음 듣는데? 신생 귀족 가문이야?”
하지만 벨라도 역시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너도 모르는구나.”
제리헤이드가 에리튼 제국의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남들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내왔기에, 사이가 좋지 않은 타레트 제국에서 그를 모르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공식 석상에 나서게 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플로리아는 벨라의 반응에 더 혼란스러움이 몰려왔다.
“응. 근데 그건 왜 묻는 건데?”
“저기, 있잖아. 오늘…….”
플로리아는 아까 잠깐 대화를 나눴던 제리헤이드를 떠올리다가 말을 멈췄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지금 이렇게 잊지 못한 듯 다시 떠올리는 자체가 조금 민망했다.
그리고 괜히 또 말을 꺼냈다가 벨라가 꼬치꼬치 캐물을 게 눈에 선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뭔데 그래? 갑자기 그러니까 엄청 궁금한데?”
“그,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플로리아는 말을 얼버무린 후, 괜히 몸을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다시 차분히 생각해 봐도 그냥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데다가 어차피 다신 만날 수 없는 사람일 테니까. 설령 듣는 사람이 벨라라고 할지라도.
‘잠깐. 그 남자가 혹시 가짜 이름을 말한 걸까?’
어쩌면 제리헤이드라는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황후인 줄 알면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의로 접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황궁 안에선 정말 별별 일이 다 일어나곤 하니까.
‘그래, 그 사람이 사기꾼일지도 모르잖아. 너무 과하게 부유해 보이는 모습들도 그렇고.’
플로리아는 그 생각을 하며 제리헤이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해사하게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설마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얼굴을 가진 사기꾼이라면 그의 꾀에 안 넘어가는 사람이 없을 듯했다.
‘차라리 그냥 누구인지 대놓고 물어볼 걸.’
아까 그에게 이것저것 제대로 묻지 못했다는 사실에 괜히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모든 걸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만 더 만나보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가 ‘혹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이라는 가정을 한 걸로 보아, 황궁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어떤 사람일까. 정말 나쁜 사람일까.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을 위로해 줄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을까.
이상하게 이제 다신 그를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마음 한구석에 진한 아쉬움이 맴돌았다.
분명 그저 잠시 내리는 소나기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텐데, 왠지 비가 오는 날마다 생각날 것 같은 묘한 기분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