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오늘만큼은
‘고작 정부랑 함께 있으면서 황후를 들이지 말라고 했다는 건가?’
“언니…….”
순간 플로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 걸 본 건지, 벨라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괜히 이번 일로 마음 쓰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였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마음이 아프거나 슬프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랑이 없던 관계였을뿐더러 그간 카르티스에게 느끼던 부부간의 정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그가 누구와 있든 상관할 일도 아니고, 상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조심스럽던 사람이 이젠 이렇게 대놓고 남들에게 티를 내면서까지 정부랑 놀아나는 게 그리 중요한지는 한 번쯤 따져 묻고 싶긴 했다.
정부에게 눈이 먼 것 같은 철없는 카르티스의 행동에 플로리아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말을 꺼냈다.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릴 순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겠다. 황제 폐하께도 그리 전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자 호위기사는 괜히 황제를 대신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플로리아는 미련 없이 뒤돌아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옆에 서 있던 벨라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
본궁 동쪽 정원.
다시 본궁의 서쪽으로 걸어가던 플로리아는 회랑을 따라 걷다가 문득 정원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와 색색의 꽃들을 바라보자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이곳에서 쉬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라, 나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녀의 말에 벨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나도 황궁 구경을 좀 제대로 하고 싶었거든.”
벨라는 그 말을 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에르앙 백작 부인 곁으로 다가갔다.
“저기, 에르앙 백작 부인. 제가 황궁 구경하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길을 잘 몰라서 혼자 가려니 조금 두렵네요.”
“그럼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래요. 다녀와요, 부인.”
그 말을 한 후, 다행히 눈치가 빠른 에르앙 백작 부인이 자신의 뒤에 있던 하녀들에게 일렀다.
“난 벨라 공녀님과 황궁을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그 사이 다들 황후 폐하의 침실 청소를 해두도록 하거라.”
하녀들이 그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급하게 걸음을 옮기자, 에르앙 백작 부인은 혼자 정원에 서 있는 플로리아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서둘러 벨라를 이끌고 남쪽 방향으로 향했다.
잠시 후.
두 사람 덕분에 온전히 혼자가 된 플로리아는 분수 근처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동안 황궁의 동쪽은 출입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이곳이 봄에 이런 모습이라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마 카르티스는 여기에 안젤리나와 함께 드나들겠지? 악독한 이들에게 어울리는 공간은 아닌데 말이야.’
그들을 떠올리자,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전에 없던 외로움이 밀려왔다.
분명 슬프거나 아프지 않은데…….
허수아비가 된 듯했고 몸도 마음도 지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기분이 싫어서 혼자 있을 때만큼은 카르티스와 안젤리나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후우.”
마음이 답답해진 플로리아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저 프리지아 꽃의 꽃말이 뭔지 아십니까?”
그때, 그녀의 옆쪽 수풀에서 한 젊은 남자가 걸어 나오며 물었다.
“…….”
플로리아는 그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데? 나한테 말한 건가? 아님 혼잣말?’
“모르십니까?”
이번엔 확실히 그녀에게 말을 거는 듯, 남자는 플로리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다시 물었다.
“나한테 묻는 거라면…… 그대가 누구인지도, 프리지아의 꽃말도 잘 모르겠군요.”
가까이 다가와 서니 남자는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백금발 머리칼에, 큰 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가 플로리아의 대답을 듣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그 순간 플로리아의 눈엔 그의 맑고 커다란 눈동자가 가려지면서 눈꼬리가 둥글게 휘는 게 보기 좋았다.
“프리지아의 꽃말은 ‘그대, 한 번만 웃어볼래요?’랍니다.”
“네? 그게 사실인가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꽃말이었다.
‘정말 그런 뜻이 있던가?’
어느새 카르티스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낸 플로리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는 앵두처럼 맑은 입술을 한껏 끌어당겨 더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그런 꽃말은 없지만…… 그대가 웃는 모습은 보고 싶군요.”
그 말에 플로리아는 당황스러움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게 중요한가요? 그냥 한 번 웃어보라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예쁜 분수랑 꽃밭을 보면서도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대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의 말에 플로리아는 뭔가 뜨끔했다.
혼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불행해 보였을 거란 생각을 하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리고 이곳은 황제 폐하의 전용 정원이니 그만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그대는요? 여기 있어도 괜찮나요?”
“그야 나는…….”
플로리아는 자신이 황후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지금 누구인지도 모를 이 남자한테 그 사실을 밝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 초면 아닌가요?”
“아마도?”
남자는 처음 보는 뻔뻔한 말투로 능글맞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로 초면인 것 치곤 너무 살갑게 대해서 당황스럽군요.”
“사실 저도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그대를 알고 싶습니다, 레이디.”
‘알고 싶다니? 무슨 의미지?’
그의 말에 이상하게 플로리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남자, 뭐하는 사람이야?’
플로리아는 날 선 눈빛으로 그에게 잔뜩 경계심을 드러냈다.
“심심해서 그러는 건가요? 아무래도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군요.”
생전 처음 겪는 일에 귀가 빨개지는 느낌이 들자, 그녀는 일부러 쌀쌀맞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저기 잠시만요.”
그러자 남자가 서둘러 다가오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대의 말처럼 우린 지금 초면이지만, 그래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잠시라도 좋아요.”
“…….”
플로리아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해 당황하는 사이, 그가 뒤이어 말했다.
“누군지도 모를 레이디께 그런 마음이 든다면 제가 미친 걸까요?”
“저, 저기…….”
플로리아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남자는 부드럽게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만큼은 잠시 미쳐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의 말에 이유는 몰라도 플로리아의 심장이 찌릿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초의 정적이 흘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플로리아는 지금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에게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듣다니.
‘요새 다른 사람들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건가?’
물론 그렇다 한들, 그녀는 생전 처음 겪는 일들이라 그런지 몹시 난처했다.
사실 플로리아는 어릴 때부터 황후로 내정되어 있다 보니, 제대로 연애를 하거나 다른 남자와 사적인 대화를 해볼 기회도 없었다.
더군다나 결혼 후 황궁 안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귀족 남성들도 그저 그녀를 황후로만 깍듯하게 대할 뿐이었다.
남편이자 황제인 카르티스와는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사이가 애초에 좋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시녀와 하녀도 없는 상태로 낯선 남자와 대화를 하는 자체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 남자는 자신이 황후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으니 더 긴장이 됐다.
그녀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레이디?”
옆에 있던 그가 플로리아를 불렀다.
“그대는 초면에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는 사람인가 보네요.”
당황한 나머지 그냥 툭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남자가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사실 제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냥 가 버리실 것 같아서…….”
“…….”
“아까 제가 한 말이 혹시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남자 때문에 플로리아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놀라긴 했어도 사과받을 정도로 불쾌한 건 아니었는데, 설마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다행인 건지 그는 자신이 사과한 일을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아까 한 말처럼 정말 플로리아에게 궁금한 게 많은 듯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덩달아 플로리아도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짙고 어두운 카르티스의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저렇게 맑은 눈동자 색을 가진 사람도 있네.’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 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체도 모르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넋을 놓으려 하다니…….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더 늦기 전에 얼른 벨라에게 가봐야지. 에르앙 백작 부인이 같이 있다고 해도 이 넓은 황궁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잖아?’
그 순간,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려던 플로리아의 머리 위로 갑자기 빗방울이 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진 하늘이 맑았는데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비가 오는군요.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전에 아무래도 가봐야겠습니다.”
“아, 그렇네요…….”
플로리아의 말에 남자는 헤어지기 아쉽기라도 한 듯 말끝을 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다행히 비가 가볍게 내리고 있었지만 서 있는 곳이 하필 흙바닥이었다.
더 빗방울이 굵어지면 드레스 자락이 흙탕물로 뒤범벅이 될 게 분명했기에 괜스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럼 이만.”
플로리아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먼저 돌아서려 하자,
“레이디, 참고로 저는 제리헤이드 아루비스라고 합니다.”
그가 갑자기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네?”
“다음엔 부디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
“그땐 그냥 편하게 ‘제드’라고 불러주세요. 혹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요.”
“다시 만난다니……. 그럴 일이 있을까 모르겠군요.”
“그래서 ‘혹시’라고 했으니, 정말 모르는 일이죠.”
“…….”
“그럼 전 이만.”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먼저 급하게 반대편으로 뛰어가 버렸다.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그녀는 그가 알려준 이름을 중얼거리며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과연 다음에 만났을 때 내가 황후라는 사실을 알게 돼도, 그가 지금처럼 편하게 말을 걸어 줄까?’
물론 그게 누구든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괜히 입안이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