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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림자 같은 황후 (7/106)

7화. 그림자 같은 황후

몇 시간 전. 본궁 동쪽 정원.

카르티스와 안젤리나가 정원 가운데 놓인 티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플로리아에게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카르티스를 안젤리나가 굳이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었다.

“황제 폐하. 이곳은 차를 마시기 딱 좋네요.”

“……그런가? 황궁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이긴 하지.”

카르티스가 건너편에 있는 분수를 보며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분수 주변은 꽃으로 장식되어 봄의 싱그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건 그렇고, 아까 황후와 식사하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

“얘기요? 별 얘기 없었는데…….”

“혹시 황후가 기분 나빠하거나 심기 불편해한 일은 없었고?”

“…….”

사실 안젤리나는 자신이 시테스 잎을 먹을 뻔했던 일 이후로, 플로리아의 태도가 급격히 이상해진 걸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굳이 카르티스에게 그 일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래?”

그러자 카르티스는 안젤리나와 별문제도 없는데 플로리아가 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건지 더 의문이었다.

‘정말 밖에서 하녀들이 기다린다는 이유로 황제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도 혼자서는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사가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찾아가서 그 이유를 따져 물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런데 폐하.”

카르티스가 플로리아를 떠올리며 혼자 상념에 빠져있던 순간, 이번엔 안젤리나가 그를 불렀다.

“들리는 말로는 다음 주에 봄의 연회라는 게 열린다면서요?”

“아, 그러고 보니 벌써 날짜가 되었군.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파티지.”

사실 안젤리나는 그동안 한 번도 사교계의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제 새로 온 하녀에게서 우연히 봄의 연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참석하면 어떨지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것이냐?”

“혹시, 저도 참석해도 되나요?”

“네가? 파티는 사람도 많고 생각보다 정신이 없단다.”

“네, 알아요. 그렇지만 저도 가보고 싶은 걸요.”

안젤리나는 혹시라도 그가 안 된다고 할까봐 간절한 눈빛을 보였다.

“네 배속의 아이를 생각하거라. 괜히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단다.”

“스트레스 받지 않게 조심할게요. 그 파티에 황후 폐하도 참석하신 다면서요. 저도 황제 폐하의 자랑스러운 정부로서 꼭 참석하고 싶어요.”

“……황후가 참석한다고? 그게 사실이냐?”

안젤리나는 그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하녀에게 얼핏 들은 말을 별 의미 없이 뱉은 거였지만, 그가 인상을 구겼다.

“네. 제 하녀 말로는 황실 재단사가 황후 폐하께서 입으실 드레스를 준비하는 걸 봤다고 합니다.”

‘그동안 한 번도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던 플로리아가? 그렇게 큰 파티에 참석한다고?’

이내 카르티스가 속으로 중얼거리던걸 멈추며 안젤리나를 바라봤다.

“네가 잘못 들은 걸거다. 황후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

“아닙니다, 폐하. 정말 확실해요!”

확신에 찬 안젤리나의 태도에 카르티스는 속에서 뭔가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

단순히 토라진 줄 알았던 플로리아의 반항이 정말 더 오래갈 생각인 건지.

정부를 들이겠다고 찾아와서 괜히 사람 속을 긁어대더니, 이번엔 젊은 귀족들이 많이 참석하는 파티에 간다는 얘기가 들려오자 기분이 불쾌했다.

‘설마 그곳에서 정말 귀족 자제 출신인 정부를 뽑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동안 카르티스에게 플로리아는 누구보다 편한 황후였다.

유별나지도 않고, 황제에게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만약 황후 자리에 안젤리나가 있었다면 이렇게 편한 일상도 불가능했겠지.’

안젤리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은 맞지만 점잖은 황후 역할로는 부족하다는 걸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제국을 평화롭게 통치하기 위해선 플로리아의 집안이 제국민들에게 얻는 호감 이미지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카르티스는 앞으로 평생 플로리아를 곁에 두면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며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잔잔하기만 하던 플로리아와의 사이에,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게 만들어야겠어.’

그가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당장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혹시라도 그날 황후가 파티에서 눈에 띄지 않게 만들 수만 있다면 제풀에 지쳐서 시답잖은 반항을 포기하지 않을까?

그는 그 생각을 하며 안젤리나를 바라봤다.

“안젤리나.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봄의 연회에 참석해도 좋다.”

“……정말요?”

“대신! 그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들 앞에서 황후보다 더 주목받고 오도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꼭 그렇게 할게요!”

카르티스의 속마음을 모르는 안젤리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며칠 후, 플로리아는 벨라와 함께 황궁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 이제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녀 에쉬가 마지막 짐을 실으며 말했다.

“그래, 슬슬 출발해야겠구나.”

플로리아의 말에 벨라가 서둘러 먼저 마차에 올랐다.

“조심히 가거라.”

“네, 어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플로리아가 배웅하러 나온 라니에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벨라, 넌 황궁에서 사고치지 말고.”

라니에는 마차 안의 벨라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벌써 스물둘인걸요.”

“파티만 즐기고,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오도록 하렴.”

“네, 알겠어요.”

벨라는 창문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대답을 해 보였다.

“그럼 이제 더 늦기 전에 가보거라.”

라니에의 그 말에 플로리아는 마차에 오르려다 잠시 뒤를 돌아봤다.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사실 지난 며칠 아리안느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아버지인 파슈테와 얼굴조차 마주하기 힘들었다.

정부를 들인다는 말 때문인지 그가 플로리아와 마주칠 일을 일부러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공작 가문의 체면을 상하게 해서 화가 많이 나신 건가?’

플로리아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얼마나 타레트 제국을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께도 몸 건강히 잘 지내시라고 전해주세요.”

“그래, 그러마.”

플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마차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를 만나 뵙는 건 뒤로 미루고, 나중에 벨라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 함께 찾아와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 얼른 타.”

때마침 벨라의 재촉이 들리자 플로리아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라니에는 멀어져가는 마차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거의 보이지 않을 즈음까지 혼자 배웅을 하던 그녀는, 이내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저택으로 다시 들어갔다.

***

아리안느 공작가 1층 서재.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쳐 쓴 파슈테가 서류를 보고 있는데,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라니에가 들어왔다.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크흠.”

그녀의 물음에 파슈테가 괜히 안경을 고쳐 쓰며 헛기침을 했다.

사실 플로리아가 이곳에서 며칠 묵는 동안 파슈테는 그녀와 일부러라도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 다닌 게 맞았다.

그는 거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떠나는데 나와보지도 않으시다니…….”

“…….”

“플로리아도 아마 사정이 있을 거예요. 생각이 깊은 아이인 걸 알잖아요.”

“…….”

“이번엔 당신이 이해 좀 해주세요.”

파슈테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그를 설득하려 하는 라니에의 태도를 보면, 지금 파슈테의 모습은 엄청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아직 플로리아의 얼굴을 태연하게 마주 볼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 일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잠시 침묵 끝에, 파슈테는 일부러 마음에 없는 냉정한 말을 내뱉었다.

“그 애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왜 이렇게 플로리아에게 무정하게 구시는지 모르겠군요.”

“…….”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같네요.”

라니에는 서운함을 가득담은 말들을 내뱉은 후, 그대로 다시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쾅―.

그녀가 나가면서 세게 닫은 문소리가 서재에 크게 울렸다.

“하아.”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파슈테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사실 그는 플로리아가 처음부터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플로리아가 정부를 들인다면, 그걸 빌미 삼아 카르티스 황제가 괴롭히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파슈테의 머릿속엔 그 걱정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플로리아가 정부를 들인다는 말에 일단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를 들인다는 말을 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사실 파슈테는 그녀가 황후로 들어간 직후부터 황궁에 소식통을 심어놓았었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딸아이가 잘 적응하고 지내는지만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소식통 하녀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 황제가 황후에게 소홀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후로 반년이 흐르자 이젠 황제가 아예 별궁에만 들락거린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물론 파슈테도 처음엔 황제가 정부를 들이는 게 플로리아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진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플로리아가 혼자 외롭게 황후 역할을 해내는 이야기들을 전해 듣던 파슈테는 걱정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황제가 새로 정부를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황제의 무관심 속에서 연락도 없이 혼자 단출하게 사가에 온 딸을 보자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었다.

그래서 처음 플로리아를 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버린 것이었다.

“휴, 그 아이가 잘 버텨내야 할 텐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황후 자리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기라도 하면 앞으로 플로리아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파질지, 그 상황이 눈에 훤한 듯했다.

***

몇 시간 후. 황궁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본궁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당분간 별실에서 머물기로 한 벨라도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가져온 짐들을 정리했다.

“이제 황제 폐하께 인사드리러 가자꾸나.”

그녀의 옆에서 짐 정리를 도와주던 하녀들이 방을 빠져 나가자 플로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나 아직 황제 폐하께 웃으며 인사드릴 자신이 없어.”

“벨라, 여기선 절대 아무것도 티 내면 안 돼. 내가 지난번에 얘기한 건 비밀로 해주기로 했잖아?”

그 말에 벨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비쳤다.

“그건 알아. 비밀은 지킬 생각이지만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태연하게 마주하긴 힘든 걸 어떡해?”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 해. 황궁에 머물면서 제대로 인사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분명 다른 사람들은 너와 나를 욕할 거야.”

플로리아의 말에 벨라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 어쩔 수 없지. 내키진 않지만 아무래도 잠깐 인사하고 와야겠다. 언니도 같이 가줄 거지?”

“그럼. 얼른 옷만 갈아입고 다녀오자.”

그녀의 말에 벨라는 최대한 얌전해 보이는 드레스를 골라 입고 별실을 나섰다.

***

두 사람이 함께 본궁 동쪽으로 가는 길.

플로리아는 사실 벨라보다도 더 카르티스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도 그와 마주하는 게 즐겁지 않았지만, 이젠 안젤리나까지 거슬리기 시작하니 황제를 향한 불편함도 덩달아 커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황후로서 그런 감정을 티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어느새 그의 침실까지 걸어갔다.

응접실 앞에 다다르자 벨라가 문 쪽을 가리켰다.

“언니, 근데 안에 이미 손님이 있나 봐. 하녀들이 기다리는 중인 거 같은데?”

벨라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침실로 가는 길에 있는 응접실 앞에 사람들이 몇 명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러게. 혹시 업무 중이시면 잠시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구나.”

플로리아는 그 말을 하며 먼저 그 앞으로 다가갔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그러자 응접실 문 앞에 서 있던 호위기사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황제 폐하를 뵙고 싶은데 안에 손님이 계신가?”

“아, 네…….”

“아주 잠깐이면 되니 폐하께 내가 왔다고 전하거라.”

플로리아의 말에 호위기사가 뭔가 말하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폐하께서 명이 있을 때까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요.”

황후도 못 들어오게 하고 침실 안에 머무르고 있다?

“……지금 누가 와 있는 거지?”

혹시…….

플로리아는 그 순간, 아무래도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안젤리나가 와 있느냐?”

“실은 그게…… 맞습니다. 황후 폐하.”

머뭇거리던 기사의 대답을 듣던 플로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고민하던 그녀는, 두 사람이 있을 방문을 싸늘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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