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기대해
타레트 제국. 아리안느 공작가로 가는 마차 안.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오랜만에 휴가를 준 플로리아는 하녀 에쉬와 호위기사 크레티안 경만 데리고 사가로 가는 중이었다.
마차도 굳이 여러 대를 이용하기보다는 한 대로 함께 가기로 했다.
그때,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있던 플로리아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크레티안 경을 불렀다.
“크레티안 경. 혹시 ‘시테스’라는 약초를 아나요?”
그러자 그는 잠깐의 고민 후,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시테스’라면 잎이 크고, 향긋한 향이 나는 채소 아닌가요?”
두 사람의 대화에 플로리아의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에쉬도 덩달아 귀를 쫑긋하기 시작했다.
“더 깊게는 모르겠지만 임신 중인 여성이 먹으면 좋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미혼의 젊은 남자인 크레티안 경조차 시테스 잎의 부작용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만약 임신한 사람이 그 채소가 들은 음식을 실수로 먹을 일이 있을까요?”
“제 일이 아니라서 정확히 대답할 순 없지만…… 향이 진하긴 해도 몰래 갈아서 넣거나 하면 모르고 먹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잎이 눈에 보이는 상태라면 그런 실수는 안 할 것 같습니다. 태아에게 위험하다고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혹시, 폐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크레티안 경이 조심스럽게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그게…….”
사실 별일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대로 묻어두기엔 찝찝함이 가시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냥 넘어가기보단 확실히 해두는 편이 덜 신경 쓰일 것 같기도 했다.
“……크레티안 경.”
그녀의 부름에 에쉬까지 덩달아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예?”
“부탁이 좀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황후 폐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안젤리나의 뒷조사를 좀 해줄 수 있나요?”
“폐하의 정부, 안젤리나 님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뒷조사라면 어디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든 좋습니다. 어린 시절 얘기라든지, 궁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라든지……. 하다못해 가족이 몇 명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도요.”
얼핏 듣기론 안젤리나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장녀라고 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하던 곳에서 황제를 우연히 만났다고 했던 것 같은데…….
플로리아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혹시 모를 타레트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도 철저하게 그녀에 대해 알아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예.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크레티안 경의 자신 있는 대답에 플로리아도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플로리아가 크레티안 경과의 대화를 끝낸 지 몇 분 후, 옆자리에 있던 하녀 에쉬가 나직이 외쳤다.
“황후 폐하! 드디어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플로리아도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그립던 아리안느 공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녀가 이곳에 온 첫 번째 이유를 떠올리자 약간의 걱정이 몰려왔다.
여동생 벨라에게 자신의 정부감을 고르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부를 들이는 일은 부모님께도 미리 알려야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님께는 플로리아 자신의 입으로 직접 알리는 게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녀의 예상으론 어머니인 라니에와 여동생 벨라는 그나마 이 상황을 이해할지 몰라도, 아버지인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은 절대 반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래도 이게 그나마 충격을 최소화하는 거라 여기며 플로리아는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 공작가로 향했다.
***
오늘은 그녀가 거의 1년 만에 사가에 방문한 자리였다.
사실 아리안느 공작가는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자주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르티스와 정략 결혼한 사이이긴 해도 웬만한 부부들만큼은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는 부모님 때문에 그동안 일부러 발걸음을 하지 않았었다.
혼자서 자주 들락거리다가 괜히 남편과 데면데면한 사이라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가족들의 걱정을 살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그럼 이번엔 언제까지 있다가 가는 거야?”
벨라는 플로리아가 온 게 마냥 좋은지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로리아가 결혼하기 전, 두 사람 사이가 다른 자매들보다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글쎄. 정확한 날짜를 정한 건 아니라서…….”
“이렇게 와서 좋긴 한데…… 진짜 생각만 해도 아찔해. 내가 오늘 언니가 오는 것도 모르고 멀리 외출했으면 어쩔 뻔했어?”
벨라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끔찍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 말이야.”
“네가 쓰던 방을 마침 지난주에 청소해 두었단다. 그곳에서 묵으면 될 거야.”
플로리아가 벨라의 말에 호응해주자, 이번엔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라니에가 말했다.
라니에는 플로리아가 오지 않는 빈방을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은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플로리아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려는데,
“폐하껜 아무 연락도 못 받았는데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때마침 무뚝뚝한 파슈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 그는 항상 엄하고 무뚝뚝한 성격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언짢은 표정이었다.
파슈테는 오랜만에 만난 딸의 얼굴이 궁금하지도 않은지 쇼파에 앉아 연신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가십거리로 신문에 나오기 전에 제가 먼저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플로리아는 마치 중대 발표라도 하는 듯, 파슈테의 손에 들린 신문을 쳐다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조만간 정부를 들이려 합니다.”
그녀의 말에 일순간 저택 안이 고요해졌다.
“누가? 언니가?”
침묵을 깨는 벨라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그녀를 바라봤다.
“응. 나도 황제 폐하처럼 정부를 들이려고.”
“플로리아…….”
라니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파슈테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황제와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던 플로리아가 정부를 들인다는 것보다, 자신의 남편이 과연 무슨 대답을 할지가 더 걱정인 것 같았다.
“플로리아. 넌 제국민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느냐?”
라니에의 걱정이 무색하게 파슈테가 미간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
벨라도 괜히 끼어들기 난감한 상황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요? 황제 폐하께서도 정부를 여러 명 두셨는걸요.”
“뭐? 그분은 우리 제국의 황제시다. 넌 황후고. 어서 빨리 폐하의 아이를 가질 생각은 안 하고 정부를 들이겠다고?”
“아버지.”
탁―.
파슈테가 대답 없이 들고 있던 신문을 소리나게 접은 후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네 뜻대로 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그냥 말하지 말지 그랬느냐?”
“…….”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아리안느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거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
“네가 이해하렴. 네 아버지가 원래 고지식한 면이 있으신 거 알잖니?”
“네, 괜찮아요.”
플로리아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였는데, 오히려 마음의 짐만 더 얹어드린 것 같아서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웠다.
“그런데…… 꼭 그 정부를 들여야만 하는 거니?”
라니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타레트 제국의 역대 황후 중에 정부를 들인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평민들 사이에선, 황제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황후들만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정부를 들이는 거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렇기에 플로리아의 가족들도 그녀가 행여나 제국민들에게 손가락질받진 않을까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네. 꼭 들여야만 해요. 어머니는 부디 저를 이해해 주세요.”
“혹시 갑자기 이러는 이유라도 있는 거니?”
라니에의 물음에 플로리아는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그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 일단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거라.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라니에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결국 플로리아가 라니에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라가 서둘러 그녀를 뒤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
플로리아는 황궁에서 가져온 짐들이 깔끔히 정리되어있는 방안을 살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이곳은 여전히 결혼 전 그녀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방문 밖에서 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언니!”
“무슨 일이야?”
“……잠깐 들어가도 돼?”
“들어와.”
그녀의 대답에 벨라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방 청소한 보람이 있으시겠네. 이 방만큼은 하녀들한테 안 시키고 직접 청소하시거든.”
“아…….”
플로리아는 전혀 몰랐던 사실에 놀랐다.
그동안 말은 안 해도 그녀를 그리워하며 방 정리만 하고 있었을 어머니를 떠올리자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언니, 아까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아버지가 언니를 너무 걱정하셔서 그런 거 알지?”
“알아, 벨라.”
“그런데 있잖아…….”
벨라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플로리아 옆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나한테도 말 안 해줄 거야?”
“뭘?”
“왜 갑자기 정부를 들이겠다고 한 건지.”
“정말 별일 아니야…….”
플로리아는 벨라에게도 사실을 다 밝히기 힘들었다.
알아봤자 괜히 마음 아프고 신경 쓰일 게 분명하니까.
“그럼 그 옷은?”
그때 뭔가 더 생각난 듯, 벨라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플로리아의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답답하다고 이렇게 목 끝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는 절대 안 입었었잖아. 그새 내가 아는 언니 취향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피멍은 첫날보다 많이 옅어지긴 했다. 하지만 아직 그래도 밧줄 자국이 남은 상태라 앞으로 며칠간은 이렇게 목을 가리는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벨라는, 그동안 자주 만나지 못한 사이 플로리아에게 혹시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었다.
그 말 속엔 자신의 하나뿐인 언니가 못 본 사이에 변해버린 건가 싶은 서운함도 살짝 담겨 있었다.
“…….”
“혹시 폐하와의 사이에 무슨 말 못 할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지?”
벨라의 집요한 질문들을 듣고 있던 플로리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괜찮으니까 나한테만 얘기해봐.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응?”
“벨라, 너 정말 비밀 지킬 자신 있어?”
“그럼.”
“정말이지?”
“응. 우리 아리안느 공작 가문을 걸고 맹세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플로리아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론은 너랑 같이 봄의 연회에 참석하려고 해. 거기서 정부감을 골라보려고.”
지난 며칠 동안 혼자서 겪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은 플로리아는 벨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조금 전 그녀의 목에 생긴 피멍 자국들까지 보여준 탓인지, 벨라는 생각보다도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벨라, 내 말이 믿어지니?”
“…….”
정부를 들이려는 이유가 궁금하다고는 했지만, 벨라도 설마 이런 이유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었다.
플로리아는 다른 일은 몰라도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과연 그녀가 믿어줄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저기, 벨라?”
그래서 그녀의 반응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불렀는데,
“언니, 이게 다 정말이야? 진짜라는 거지?”
벨라의 목소리가 약간 격앙된 듯했다.
“그래. 모두 사실이야.”
“하…….”
그녀는 플로리아의 담담한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폐하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나쁜 놈이었네.”
“벨라. 아무리 화가 나도 말조심해야지. 누가 들으면 어떡해?”
“지금 언니 목에 그…… 흉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벨라는 여전히 화가 많이 난 듯 식식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 뭘 어쩌려고?”
벨라가 꽤 흥분한 듯 굴자 플로리아가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벨라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봄의 연회……. 다음 주에 우리 그 파티에 꼭 같이 가자.”
“…….”
“기대해. 내가 거기서 누구보다 멋진 정부감을 찾아내고 말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플로리아는 복수에 불타는 벨라의 눈빛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 게 부디 실수는 아니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