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새로운 인연
다음 날 아침, 모르크 후작은 이른 아침부터 본궁의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황제가 인장을 찍어놓은 서류를 황후에게 서둘러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황후궁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플로리아에게 정부 서류를 내밀었다.
원하던 서류를 받았는데도 별로 기뻐하지 않고 심지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황후의 모습을 보며 모르크 후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이미 카르티스 황제의 수석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앞으로 그가 황제의 큰 신임을 얻는 건 시간문제였다.
호시탐탐 이 자리를 노리는 다른 귀족 자제들을 견제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전달하고 나오던 모르크 후작은 별궁 쪽 방향에서 걸어오는 안젤리나를 발견했다.
‘저 여자는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잠시 지켜보자, 방금 자신이 나온 황후궁 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황제의 정부가 황후를 만나러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한다?’
아직 카르티스가 플로리아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는데 괜히 안젤리나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일이 틀어지면 큰일인데…….’
결국 마음이 급해진 모르크 후작은 그 길로 황제가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
한편 그 시각.
카르티스는 북쪽 끝에 있는 지하 감옥을 찾았다.
며칠 전 안젤리나의 침실에서 하녀가 죽은 사건 때문이었다.
안젤리나의 말에 의하면 그날 죽은 데이지라는 하녀는 황제의 핏줄에 손을 대려고 한 중죄를 지은 상태였다.
사건 당사자인 데이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에 따로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큰 죄를 지은 경우, 그 일가족 모두를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는 벌이 내려지는 게 기본이었다.
그렇기에 사건이 있던 날 밤, 데이지의 남편인 알릭시스가 감옥으로 잡혀 오게 되었다.
“……황제 폐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는 야윈 손을 덜덜 떨며 쇠창살에 매달려 애원했다.
“제 아내는 절대 그런 짓을 꾸밀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아이를 탐하다니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카르티스는 감옥 창살 앞에 서서 울부짖는 알릭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꽤 순박해 보이는 얼굴에 마른 체구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알릭시스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진지해 보였다.
거짓을 말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 카르티스는 안젤리나의 말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사건 당시 겁에 질린 나머지 상황을 조금 과장되게 부풀렸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다 한들 하녀 데이지가 죽어버린 이상, 완전한 진실을 알긴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
카르티스가 그를 어떤 식으로 처벌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발소리의 주인은 모르크 후작이었다.
“서류는 잘 전했는가?”
“네. 그런데 황후 폐하를 뵙고 나오는 길에 안젤리나 님을 봤습니다.”
“……본궁에서?”
카르티스는 그의 말을 들으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아무래도 지금 두 분이 함께 계실 것 같은데…… 빨리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흠…….”
“얼른 가셔서 오늘만큼은 황후 폐하의 기분을 풀어드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르티스는 잠시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이미 플로리아에게 정부 허가서를 보낸 상태이긴 하지만, 그걸로 그녀의 이유 모를 반항이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이러다 괜히 일이 틀어지면 폐하께서 더 피곤해지실까 걱정입니다.”
“…….”
결국 가만히 모르크 후작의 말을 듣던 그는, 알릭시스를 흘끗 본 후 서둘러 감옥을 빠져나갔다.
***
황실 다이닝룸 안.
안젤리나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자신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제 정말 배부르네요.”
“…….”
“황후 폐하?”
그 순간 플로리아는, 아까 있던 일을 생각하며 한쪽으로 치워둔 시테스 잎이 들어간 요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 방금 뭐라 하였지?”
정신이 다른데 쏠린 것 같은 반응에 안젤리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 아무것도 아니다.”
플로리아는 아까 전 안젤리나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태아에게 치명적인 시테스 잎을 실수로 먹을 뻔했는데도 태연한 듯하면서도 어색한 말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나였어도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아니 그보다도, 그렇게 눈에 띄게 장식된 시테스 잎을 실수로라도 먹을 일이 있었을까?’
플로리아는 이게 뭔지는 몰라도 계속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안젤리나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하자, 플로리아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두 사람,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소?”
언제 온 건지 카르티스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황제 폐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안젤리나가 해맑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플로리아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티스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보다시피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습니다. 폐하께선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곳 타레트 제국의 황궁엔 큰 다이닝룸이 동쪽과 서쪽 두 군데나 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는 약속을 한 게 아니라면 각자의 침실에서 가까운 곳을 이용하곤 했다.
그렇기에 플로리아는 굳이 카르티스가 서쪽 다이닝룸까지 온 이유가 궁금했다.
“폐하, 설마 제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절 보러 오신 겁니까?”
안젤리나가 플로리아의 질문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네가 아니라 황후를 보러 온 것이다.”
그러나 카르티스의 냉담한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
“황후, 식사는 마친 것 같은데 나와 같이 차 한잔하겠소?”
그는 모르크 후작의 조언대로 플로리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3년 만에 처음으로 먼저 티타임을 제안했다.
지금껏 부부로 지내는 동안 그는 한 번도 플로리아에게 뭔가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설령 티타임처럼 가벼운 것이라도.
잠시의 침묵 끝에, 당연히 그러겠다는 대답을 예상한 카르티스를 플로리아가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오늘은 사가에 다녀올 예정이라 곤란할 것 같네요. 바깥에서 하녀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
그녀는 그 말만 남긴 채, 두 사람 사이를 지나치며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카르티스는 허를 찔린 듯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 폐하…….”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그는 옆에서 안젤리나가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그저 플로리아의 멀어져가는 뒷모습만 바라봤다.
***
한편, 아루비스 공작저 안.
에리튼 제국의 제리헤이드는 낯선 이웃 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공작님, 이것도 챙길까요?”
“바벨, 적당히 해. 이 저택을 통째로 들고 갈 예정은 아니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짐들과는 다르게 점점 텅 비어가는 저택 내부를 바라보던 제리헤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떠나면 최소 몇 주는 머무를 텐데, 필요한 건 다 챙겨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막상 뭐 하나라도 없으면 불편하다니까요.”
바벨 경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와 마주 서 있는 제리헤이드가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리튼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그는 지금 자신의 비서이자 호위기사인 바벨 테아른 경을 필두로, 타레트 제국에 가져갈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후. 난 신경 안 쓸 테니까 이제 마무리는 네가 알아서 준비해.”
“에이, 또 그러시네요. 타레트 제국에 가는 게 그렇게 싫으십니까?”
“…….”
제리헤이드는 아무 대답도 없이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바벨 경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저택 문을 향해 걸어갔다.
“공작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바벨 경의 다급한 부름에도, 그는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가 버렸다.
“언제까지 저렇게 세상 아무것도 관심 없는 사람처럼 살려고 그러시는지…….”
바벨 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짐을 챙기는 하인들 틈으로 사라졌다.
***
제리헤이드는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공기는 아직 쌀쌀했고 그의 밝은 백금발 머리칼은 노을빛을 반사하며 찰랑거렸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그는 에리튼 제국의 대표 자격으로 타레트 제국에 가야만 했다.
얼마 후 있을 교역 협상을 위해서였다.
지리적으로 나란히 이웃해있는 타레트 제국과 에리튼 제국은, 두 제국 간에 이뤄지는 모든 교역 협의를 매년 새로 진행했다.
그러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탓에 한 곳에서만 계속하기엔 불만이 터져 나올 게 분명했다. 결국 공평하게 두 제국은 번갈아 가며 협상을 주최했다.
올해는 타레트 제국에서 협상이 열리는 해였고, 에리튼 제국 쪽에선 그 대표로 제리헤이드를 보내게 된 것이었다.
“하아.”
말없이 밤공기만 마시던 제리헤이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세습으로 작위를 얻은 공작이 아니라 에리튼 제국의 황제인 루이스 라블레아의 유일한 친동생이었다.
황제의 하나뿐인 혈육.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황위 계승 서열 2위의 존재로 자라야 했고, 그로 인해 조금만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그가 황제의 자리를 넘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진짜로 그런 적이라도 있으면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형과 라이벌로 여겨져야 하는 현실은 어린 제리헤이드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는 학문을 내려놓았다. 순수하게 좋아했던 정치를 향한 모든 관심도 접었다.
성인이 된 직후엔 공작 작위 하나만 받고는 서둘러 황궁을 빠져나왔다.
루이스 황제도 그런 상황을 이해한 덕분에, 제리헤이드는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그 어떤 정치나 교역에 관한 문제도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이번엔 대체 왜 그러시는지…….”
하지만 그런 루이스 황제가 이번엔 좀 달랐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에리튼 제국엔 타레트 제국과의 교역 협상을 담당하던 백작이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무슨 이유에선지 그 자리를 내려놓으면서 황제는 새로운 대표로 제리헤이드를 임명했다.
지금껏 제리헤이드가 싫다고 하는 건 강요한 적이 없던 그였지만, 이번엔 무조건 황제의 명이라며 대표가 되길 강요했다.
자신의 전후 사정을 다 아는 루이스 황제가 명령 같은 부탁을 내리자 제리헤이드는 그 자리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말은 안 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 루이스 황제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제리헤이드는 어쩔 수 없이 타레트 제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준비하면서도 계속 마음이 심란했다.
“공작님!”
그때, 고요함을 깨고 멀리서 바벨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끝냈나?”
“네. 드디어 떠날 준비가 다 됐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아 참! 저녁 식사 준비도 다 됐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옆에서 제리헤이드를 보필하며 지금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벨 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내며 제리헤이드의 심란할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제 들어가려고 했어.”
“자꾸 이렇게 혼자 쓸쓸하게 서 계시면 다들 공작님이 외로워서 그러시는 줄 알 거예요.”
“……외롭긴.”
“생각해 보십시오. 공작님도 벌써 스물넷이고 이제 슬슬 결혼하실 나이잖아요.”
“난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바벨.”
제리헤이드는 진심이었다.
그가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또 결국 루이스 황제의 권력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욕심 없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에이, 혹시 모르죠. 이번 여정에서 좋은 인연이라도 만나게 될지…….”
“바벨, 네 머릿속엔 항상 여인에 대한 생각 뿐인가 봐?”
“……사실 이건 비밀인데, 그보다 공작님 생각이 더 많이 들어있긴 합니다.”
바벨 경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제리헤이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덧 그의 기분이 좀 풀어진 것 같자 바벨 경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만 됐으니까 식사나 하러 가자.”
“네, 알겠습니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낸 제리헤이드가 먼저 공작저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그저 별일 없이 무난히 이번 협상을 마칠 수 있기만 바랐다.
정작 타레트 제국에서 어떤 인연을 만날지는 생각도 못한 채, 이번 일로 루이스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매정한 동생이라는 얘기를 또다시 듣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