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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 황제에 그 비서 (4/106)

4화. 그 황제에 그 비서

넓은 황실 다이닝룸 안. 플로리아와 안젤리나가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황후 폐하, 어제 챙겨주신 음식들은 감사했습니다.”

안젤리나가 예전처럼 착하고 순한 모습으로 먼저 미소를 건넸다.

“그래. 맛있게 먹었느냐?”

“네, 덕분에요. 그런데 어떻게 제 침실에 황제 폐하와 함께 오신 거예요? 엄청 궁금했는데 어젠 경황이 없다 보니 여쭤보지도 못했네요.”

그녀의 물음에 플로리아는 뭐라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대충 둘러댔다.

“글쎄, 딱히 이유가 있다면…… 그저 우연히 마주쳐서겠지.”

“아, 그렇군요.”

뭔가 떨떠름한 안젤리나의 반응을 보자, 어제 상황을 카르티스가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녀에게 말했더라면 이런 질문을 애초에 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둘 사이에 비밀은 하나도 없을 것처럼 애틋하게 굴 때는 언제고…….

괜히 처형장에서 카르티스 옆에 서서 미소 짓던 안젤리나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맛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어제 그 하녀 일은 잘 해결됐느냐?”

결국 플로리아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먼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예. 다행히 폐하께서 친히…….”

안젤리나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멈췄다.

“……괜찮으니 어서 말하거라.”

“실은…… 폐하께서 직접 다 해결해 주시겠다고, 태교에 좋지 않으니 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 하셔서요.”

왜인지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플로리아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플로리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시 미간을 구겼다가 폈다.

“물론 그랬겠지. 네게만은 참으로 따뜻한 분이시니.”

플로리아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안젤리나와 이렇게 마주보고 있자니, 자신을 처형장까지 가게 만들었던 악독한 본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괴로웠다.

“……예?”

그러자 싸늘한 분위기를 풍긴 걸 느낀 건지 안젤리나도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아니, 됐다. 어서 식사나 하자꾸나.”

그때 때마침 두 사람 앞으로 푸짐한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다.

플로리아는 전혀 입맛이 없는 상태였지만 일단은 먼저 나온 음식을 앞접시에 덜었다.

식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지금 이런 감정 없는 대화도 끝내고 식사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안젤리나도 이전의 대화는 잊은 듯, 먼저 움직이는 플로리아를 잠시 지켜보다가 곧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음식들은 입맛에 맞느냐?”

“네. 너무 맛있습니다. 역시 본궁 다이닝룸의 음식들이 더 맛있네요.”

플로리아의 물음에 안젤리나가 웃으며 대답하던 그 순간이었다.

때마침 안젤리나 앞으로 커다란 시테스 잎사귀가 들어간 음식이 나왔다.

‘……시테스라니? 저건 임신부가 먹으면 태아에게 치명적인 식물 아닌가?’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당황하며 안젤리나를 쳐다봤다.

그 잎은 임신을 해본 적도 없는 플로리아도 알 정도로 유명한 낙태약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물론 임신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전혀 해가 될 것도 없고, 오히려 일상에서 자주 먹는 채소 중 하나였다.

이곳 황실 다이닝룸에서도 거의 매주 나오는 음식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얼마 전 새로 바뀐 주방장이 안젤리나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늘 그 요리를 내온 것 같았다.

플로리아는 괜히 안젤리나와 그 아기에게 좋지 않은 음식을 황후가 일부러 내왔다는 소문이라도 생길까봐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임신부라면 시테스 잎 정도는 알아서 피할 텐데 안젤리나는 거리낌 없이 방금 나온 음식을 자신의 앞접시에 덜고 있었다.

플로리아가 고의로 그런 음식을 내왔다고 생각할 정신도 없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접시에 덜어간 요리를 떠먹으려 할 뿐이었다.

“안젤리나! 설마 지금 시테스 잎을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네?”

갑자기 튀어나온 플로리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안젤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맞은 편에 앉은 황후와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래도 새 주방장이 네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위험하니 그 음식은 먹지 말도록 하거라.”

“아! 그, 그렇네요. 제가 잠시…… 잊고 있었어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건지 안젤리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마터면 태아에게 위험할 뻔했습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녀는 곧바로 플로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놀라서 그런지 전혀 감사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안젤리나는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왜인지 그녀의 그 감사하다는 말이, 플로리아의 귀엔 이상할 정도로 어색하게 들렸다.

‘……뭐지?’

정신을 차린 듯,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웃어 보이는 안젤리나를 보며 플로리아는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다.

***

어젯밤, 황제의 집무실.

“폐하.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아직도 처리할 업무가 남으셨습니까?”

카르티스 황제가 침실로 돌아가길 기다리던 모르크 후작이 책상에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흠……. 업무는 아니지만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영문을 모르는 모르크 후작이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자 카르티스는 정말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듯, 양쪽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에리튼 제국에서 또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것입니까?”

에리튼 제국은 이곳 타레트 제국과 예로부터 앙숙인 이웃 나라였다.

두 제국은 국경을 바로 맞대고 있는 탓에, 매년 여러 차례 교역과 관련한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거론되는 곳 중 하나였다.

“아니, 그보다 더 머리 아픈 일이지.”

그 말을 하며 카르티스는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이건 정부 허가서 아닙니까? 이 서류는 갑자기 왜…….”

“보다시피 황후가 내게 정부를 들이는 걸 허락해 달라는군.”

“……예?”

모르크 후작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제 앞의 서류만 계속 뚫어져라 바라봤다.

“지금 분위기로는 허락해 주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야…….”

카르티스는 그 말을 하면서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초조하게 양손을 모아서 깍지를 꼈다 풀었다 반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카르티스의 말에 토를 단 적이 없던 플로리아가 왜 이러는지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저기, 폐하.”

그때, 모르크 후작이 그를 나직이 불렀다. 밝은 표정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저는 이 서류의 답을 알 것 같습니다.”

“……답이라니?”

“제 생각엔 이건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 분명합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카르티스가 눈썹을 치켜들고 묻자, 모르크 후작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보니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제 아내도 가끔 비슷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거든요.”

카르티스는 그의 말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집중했다.

불쾌한 듯 치솟았던 눈썹도 그새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사실 제 아내는 저한테 서운한 일이 있거나 하면, 남편 대신 말 잘 듣는 다른 정부를 들일 거라며 종종 협박하곤 합니다.”

실제로 드물지 않게 높은 귀족 가문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정부를 한두 명쯤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정부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경제적인 부담이 따르다 보니 카르티스 황제처럼 많은 숫자를 들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말은 그래도 지난 몇 년간 실제로 정부를 들인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늘 말뿐이라는 겁니다.”

이어지는 모르크 후작의 말에, 카르티스는 몇 시간 전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거냐고 플로리아에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역시 그런 건가?”

“설마 폐하께서도 그걸 예상하신 겁니까?”

“예상이라기보단 그냥 짐작만 했을 뿐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분명 확실할 겁니다.”

“…….”

너무나도 강하게 확신하는 모르크 후작의 표정과 말투에, 카르티스도 어느새 그 뜻에 동화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

“그 이유라면…….”

내내 자신 있던 모르크 후작이 멈칫하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폐하, 혹시 최근에 황후 폐하를 서운하게 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카르티스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 낮에 분명 플로리아가 불러서 별궁에 갔었고, 하녀가 죽은 사건을 안젤리나 대신 처리한 게 전부였다.

다만 조금 걸리는 게 있다면…….

“아, 내가 안젤리나 앞에서 황후에게 매정하다고 한소리 하긴 했지.”

그러자 모든 상황이 이제야 정리된다는 듯, 모르크 후작은 아까보다 더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저도 최근에야 안 사실이지만 여자들은 생각보다 예민해서 그런 말 하나에도 서운하다며 토라지곤 한답니다.”

“…….”

“제 경험을 통해 장담합니다. 아마 폐하께서 황후 폐하의 섭섭한 마음을 조금 달래주시면 이번 일은 곧 없던 일이 될 겁니다.”

모르크 후작의 말에 카르티스는 몇 시간 동안 혼자 고민하던 게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그에게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이렇게 두통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그럼 이 서류는 당장 보내지 않아도 되겠지?”

“아닙니다, 폐하. 고작 서류 한 장 때문에 황후 폐하의 신경을 건드리는 상황이 되면 괜히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대체 내가 어찌해야 하는가?”

“걱정 마시고 내일 바로 서류를 보내십시오. 아마 그런다 한들 어차피 빈말이기 때문에 황후 폐하께서 정부를 들이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함부로 보내도 되겠느냐?”

“그럼요. 저만 믿으십시오. 정말 아무 일 없을 테니까요.”

“흐음.”

모르크 후작의 미소에 안심한 카르티스는 결국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황제의 금빛 인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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