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정부를 들여야겠습니다
카르티스가 있는 본궁의 동쪽으로 가는 길. 플로리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 사람은 내 스스로 들이겠어.’
하지만 그녀의 계획엔 한 가지 불편한 문제가 있었다.
정부를 들이기 위해선 우선 카르티스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
타레트 제국에선 황후도 황제 못지않게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를 들이는 일은 아직 온전히 황제의 영역이었다.
마음 같아선 카르티스와 마주치지 않고 해결하고 싶었으나, 어쩌면 나중에라도 한 번쯤은 부딪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터였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제대로 부딪혀 봐야지.’
그러다 문득 플로리아는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하필 옷이…….’
모든 계획이 다 완벽했지만 딱 하나, 오늘의 드레스가 문제였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드레스 몇 벌만 최대한 빨리 제작해달라고 궁정 재단사에게 미리 연락해 놓았지만 그 옷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오늘 낮에 입었던 카르티스가 선물한 드레스를 다시 꺼내 입을 수밖에 없었다.
‘후, 어쩔 수 없지.’
그에게 두껍고 선명한 피멍들을 내보일 순 없으니.
카르티스를 만나면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플로리아는 한참을 걸어간 끝에 황제의 집무실에 다다랐다.
문 앞에서 호위기사의 인사를 받은 뒤 안으로 들어가자, 카르티스가 혼자 책상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오늘 낮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서인지 처리할 일이 쌓여있는 것 같았다.
“오늘 너무 자주 보는군.”
카르티스는 집무실에 들어서는 플로리아를 보자마자 기분 나쁜 티를 냈다.
“…….”
대답할 가치도 없다 여기던 중, 플로리아는 그가 또다시 자신의 드레스를 훑는 시선을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드레스가 폐하께서 선물해주신 옷이었던가요?”
“그런 것 같소.”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제겐 별 의미 없는 옷이라…….”
“황후…….”
플로리아의 말에 카르티스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의 앞으로 몇 걸음 걸어왔다.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내게 뭐 할 말이라도 있나?”
플로리아는 당황한 내색 없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할 말, 있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지 않겠습니까?”
“혹시 안젤리나에 관한 일이라면 넣어두시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카르티스는 그 말을 하며 휙 돌아서 다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황후 앞에서 마주 보며 정부 이야기를 하기엔 양심이 찔리기라도 했던 건지…….
하지만 플로리아는 그의 의중 따윈 개의치 않았다.
“정부 이야기가 맞긴 하지만, 아쉽게도 안젤리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카르티스는 짐작도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도 정부를 들여야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아까보다 더 화가 난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노려봤다.
“……지금 뭐라 하였소?”
“저도 정부를 들이겠다 하였습니다.”
“…….”
“그러려면 황제 폐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플로리아!”
카르티스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설마 당신이 타레트 제국의 황후라는 사실을 잊은 거요?”
어이없는 말에 플로리아가 조소를 보였다.
“폐하께서는 벌써 여섯이나 되는 정부를 두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이 제국의 황후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에 저도 똑같이 정부를 두겠다 요청하는 겁니다.”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카르티스를 응시했다.
“하…….”
예전과는 다른 눈빛에 그는 플로리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몇 걸음 옮겨 책상에 걸터앉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로부터 한참 후에 나온 그의 대답은 뜬금없었다.
“아, 이제 알겠군.”
뭘 알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 낮의 일도 그렇고…… 그대는 지금 내 질투심을 유발해서 안젤리나에게 향한 관심을 빼앗아오고 싶은 것인가?”
‘……뭐라고?’
플로리아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이건 평소의 황후답지않군. 너무 아이 같은 처신 아니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 내가 안젤리나를 꽤 총애하고 있긴 하지만 황후는 그리 신경 쓸 필요없소.”
“…….”
“좋아. 앞으로 신경 안 쓰게 하도록 내가 최대한 노력하지.”
그 말을 하며 카르티스는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플로리아는 어이없는 그의 결론에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모두의 칭송을 받기만 하는 황제시라 해도 너무 이기적인 해석이네요.”
“……아니란 말이오?”
“예, 절대 아닙니다. 저도 제 편이 필요한 것뿐이에요.”
플로리아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에게 모든 이유를 털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꼭 그게 정부가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니겠소?”
그 말은 플로리아의 귀엔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얘기로 들렸고, 카르티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고작 3일의 회귀를 통해서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아니요. 저는 무조건 정부를 들이고 싶습니다. 항상 제 곁에 둘 정부요.”
“…….”
“보다시피 저는 폐하께 정식으로 요청드렸고, 궁인들에게 물어보니 제국민의 큰 반발은 없을 것 같다 하더군요.”
플로리아는 일부러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 그 말은 카르티스에게 은근한 강요를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법에 어긋나지 않게 정부를 들이기 전 황제의 허락을 요청했고,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걸 일부러 카르티스에게 흘렸다.
당신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 이 사실을 모두 퍼트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아마 카르티스 정도면 이 정도 의미는 곧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본인은 정부를 마음껏 들이면서 황후에겐 허락하지 않는 이기적인 황제라는 소문이 난다면 그에게도 좋을 건 없었다.
“그럼 이제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으니 폐하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카르티스가 대답 없이 씩씩거리는 걸 잠시 지켜보던 플로리아는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에르앙 백작 부인이 오자마자 플로리아는 카르티스와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폐하의 허락이 내려지면 내게도 정부가 생기겠지요.”
“……이렇게 빨리요?”
에르앙 백작 부인은 여전히 지금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 황제와 황후 사이에 또 다른 정부가 끼어든다면 정말 둘 사이를 돌이키기 힘들지도 몰랐다.
심지어 둘에겐 아직 2세가 없으니 사이가 나빠질수록 큰 문제가 생길 터였다.
하지만 지금껏 플로리아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녀가 이렇게 의지 넘치는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기 때문에,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 응원하고 싶단 생각이 들긴 했다.
“저야 말씀드렸듯이 언제든 황후 폐하의 뜻을 존중하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실까요?”
“허락하실 겁니다.”
“예? 정말이요?”
왜 이렇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하는지 에르앙 백작 부인이 영문을 몰라하는 사이, 카르티스의 비서인 모르크 데브릭 후작이 플로리아를 찾아왔다.
“황후 폐하.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그런데 모르크 후작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죠?”
“황제 폐하께서 이 서류를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가 가져온 서류를 플로리아 앞에 내밀었다.
봉투에 담긴 의문의 서류를 꺼내자 위쪽에 선명히 <정부 허가서>라는 글자가 보였다.
카르티스가 이렇게나 빨리 정부를 들이는 일을 허락할 줄은 몰랐는데…….
플로리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폐하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류이니 오늘부로 법적 효력이 있습니다.”
“네, 고마워요. 폐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모르크 후작이 더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 인사를 하고 나가자, 그제야 플로리아는 편히 웃어 보였다.
“황후 폐하, 그건 무슨 서류입니까?”
에르앙 백작 부인이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내가 정부를 들이는 걸 허락하신다는군요.”
“이럴수가……. 정말 허락하셨네요?”
그 말을 하는 에르앙 백작 부인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커다래졌다.
밤새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억지로 도장을 찍은 서류를 보냈을 카르티스를 생각하니, 플로리아는 약간이나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럼 그 정부는 언제 어떻게 뽑으실 생각이세요?”
“최대한 서두르고 싶지만, 급하다고 해서 아무나 정부로 들일 순 없겠지요.”
잠시 고민하던 플로리아가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빛내며 에르앙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마침 다음 주에 봄의 연회가 있지요?”
봄의 연회는 매년 3월 말 황궁에서 열리는 성대한 파티였다.
젊은 귀족 남녀는 대부분 참석하는 자리였기에 정부가 될 만한 인물을 살펴보기엔 그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다.
“네. 설마 거기 가시게요?”
플로리아는 사실 그동안 파티에 참석하는 걸 즐기지 않았기에 에르앙 백작 부인은 그녀가 당연히 이번 해에도 가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이번엔 참석할 생각입니다. 괜찮은 정부감이 있나 살펴볼 겸.”
“그럼 얼른 드레스부터 준비해야겠네요. 그날만큼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우셔야 하니까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부인. 아 그리고…….”
플로리아는 문득 자신의 여동생인 벨라 아리안느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플로리아보다 두 살 아래이지만 평소 연회나 파티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사교계 인사도 꿰뚫고 있는 데다 함께 파티에 참석한다면 정부로 들이기 좋은 남자를 구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드레스는 다른 색으로 두 벌 준비해주세요. 벨라를 파티에 데려갈 생각이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벨라 공녀님께 자세한 사정을 담아 미리 서신을 넣을까요?”
“아니요. 오늘 내가 직접 얘기하러 찾아갈 생각입니다.”
플로리아는 오랜만에 찾아가 벨라를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처형장에서 눈물짓던 부모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더 바빠지기 전에 직접 두 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와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럼 하녀들에게 미리 짐을 챙겨놓으라 이르겠습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그 말과 동시에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때마침 에쉬가 안으로 들어왔다.
“에쉬, 마침 널 부르려던 참인데…….”
“저기, 황후 폐하.”
에르앙 백작 부인의 말에도 에쉬가 급한 일이 있는 듯 플로리아를 불렀다.
“무슨 일 있느냐?”
“지금…… 문 앞에 안젤리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플로리아는 반갑지 않은 손님의 방문에 좋았던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그녀와 단둘이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오늘이 아니어도 그녀와 한 번쯤은 만나야 하긴 했었다.
“내가 나갈테니 기다리라 하거라.”
플로리아는 최대한 태연히 그 말을 건넨 후, 오늘 새벽 궁정 재단사에게서 도착한 드레스 중 제일 화려한 옷을 꺼내입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