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박수칠 때 떠나라
제주국제공항 출국장.
한 무리의 남자들이 하얀 티셔츠를 입은 채 입국장에 들어섰다. 단체 관광객으로 위장했지만, 흑룡회의 중간보스인 린팡의 부하들이었다.
필리핀에서 납치된 선박을 구할 때 잠시 공조했던 마약상 린팡. 그는 밍싱그룹의 뒤처리를 해 주면서 그 바닥의 실력자로 뛰어올랐고, 이제는 홍콩을 비롯한 광둥성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마약 중개에 이어 새로 발굴한 사업은 홍콩의 범민주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린치, 그리고 친중 시위대 조직이었다.
강준은 오래전 만났던 린팡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귓속에 있는 무전기를 통해 신호를 보냈다.
"제이콥 준비해라……."
―네, 지금 두 눈 부릅뜨고 오가는 차량 전부 확인하고 있습니다.
강준은 이번 일에 검찰을 끌어들였다. 지난 경기반도체의 기술 유출사건을 총지휘했던 이은진 검사는 부장검사로 승진했다.
그런 그녀가 강준의 요청에 따라 마약반 검찰관들을 이끌고 제주도에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기 저 콧수염 기른 인간이 바로 홍콩의 마약왕이라…… 이 말이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필리핀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마약 거래량이 엄청났었습니다. 직접 제조하기도 했었고요. 이력을 찾아보면 분명 긴급체포로 몇 시간 잡아둘 정도의 혐의는 있을 겁니다."
강준의 목표는 린팡을 마약 혐의로 잡아넣는 게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흑룡회 수하들이 어디에 짱박혀 있는지를 알아내는 거였다.
만약 그 위치만 알 수 있다면 흑룡회를 통해 핑과일보에 린치를 가하려는 홍콩 탄압의 조직적인 증거들을 잡아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들어가 볼까요?"
이은진 검사의 신호에 검찰 조사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린팡과 그 수하들을 둘러쌌다.
"린팡 씨, 귀하를 현 시각으로 마약관리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어요."
린팡은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려는 검찰 조사관들을 빤히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하고도…… 당신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감당은 당신이 알 바 아니니까 얌전히 갑시다."
"지금 당신들은 선량한 중국 인민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겁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외교적 사안이라고요!"
고개를 빳빳이 든 린팡은 체포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은진은 그런 린팡 일당의 버팀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들 뭐 하세요? 강제 연행하세요!"
‘저런 게 부장검사의 짬밥인가……!’ 이은진도 어느새 강단 있는 노련한 검사가 되어 있었다.
강제 연행된 린팡 일당이 도착한 곳은 공항의 출입국사무소 조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린팡은 낯익은 인물을 마주했다. 바로 보험조사관 강준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다니엘 리 당신이었군.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난 이제 오래전에 손 털고 지금은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합법적인 사업이라는 게 친중파들을 위해 일하는 건가요?"
"난 그저 평범한 기업인이라고요! 여기 제주도에 진출한 중화권 회사들을 둘러보러 온 것뿐이고요…… 근데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영 별로군요."
강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머니에 있던 수갑 열쇠를 꺼내 린팡의 수갑을 풀었다. 그 과정에서 강준은 자연스럽게 상대의 기억을 읽었다.
[핑과일보 직원들이 우리 목표다! 반중을 외치는 배신자들에게 최대한 공포감을 심어 주는 게 이번 일의 핵심이야.]
[보스! 지미 리를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최대한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린팡의 앞에 도열한 남자들은 조용히 처리하라는 것의 의미를 익히 잘 안다는 듯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덩치가 크기보다는 모두 날렵한 인상과 체형이었다.
마치 암살단처럼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강철 무기처럼 보였다.
린팡은 그들에게 ‘장강투어’라고 적힌 팜플렛을 나눠줬다. 단체 관광객으로 위장할 여행사의 프로그램 팜플렛이었다.
[우리는 한국에 진출한 중국 기업을 탐방할 목적으로 제주에 입국한 기업인들이고, 핑과일보는 그 방문기업 중 하나로 중간에 들르게 될 거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없습니다!]
일사불란하게 대답하는 남자들은 린팡의 말처럼 정말 그럴듯한 회사조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범죄조직인 흑룡회일 뿐이었다.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준은 린팡에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관광 잘하고 가라."
강준의 말에 검찰 수사관들도 약속이나 한 듯 린팡의 일행들을 풀어 줬고, 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화가 났다는 듯 반협박 조의 말을 내뱉으며 조사실을 빠져나갔다.
강준은 다시 귓속의 무전기를 통해 제이콥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린팡 일행들 나간다."
―차량에 추적 장치 부착 완료요!
* * *
며칠 후. 제주 비즈니스 센터 D구역.
장강투어의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 흰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남자들이 비즈니스 센터로 들어섰다. 그들은 몇몇은 배낭을 메고 있었고, 몇몇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구역에는 세계 유수의 언론사 사무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개월 전 입주한 핑과일보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요, 현재 중국 본토 관련 기사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사는 핑과일보가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잠깐! 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근데 그걸 왜곡해서 외부 세계에 전달한다면…… 정말 잘못된 거겠죠?"
비즈니스 센터를 안내하는 여직원은 린팡의 말에 곤란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런가요?"
"그래서 말인데… 우린 그런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으러 온 겁니다! 자! 움직이자!"
린팡은 핑과일보의 사무실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날렵한 사내들이 재빠르게 핑과일보의 사무실로 들어갔고 이내 최루가스가 터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안내를 맡았던 여직원이 증정품 백으로 여겨졌던 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썼다. 그녀는 이번 작전에 투입된 송지희였다.
방독면을 착용한 송지희는 유유히 D구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귓속의 무전기를 통해 상황을 보고했다.
"저 빠져나왔습니다!"
―오케이!
무전이 끝나자마자 D구역의 방화문이 자동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린팡과 그의 흑룡회 부하들은 무기를 손에 쥔 채 고스란히 방화문 사이에 갇혀 버렸다. 게다가 CCTV에는 이미 그들의 행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송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방독면을 벗고 건물 출구로 나왔다. 그곳에는 차량 기사로 잠복해 있던 제이콥과 검찰 조사관들, 그리고 핑과일보의 지미 리 대표가 함께 있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특종이 되지 않겠습니까? 공안이 범죄조직 흑룡회를 이용해 홍콩의 자유 언론을 조직적으로 탄압한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으니까요……."
"베이징 권력자들도 마지막 발악을 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자기네들의 치부를 드러내니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명분도 사라져가고 있던 찰나죠."
"그래서 더 악랄해지는군요?"
"아마 앞으로도 더 그럴 겁니다."
"지미 대표님, 일단 외신에 흑룡회의 존재부터 알리시죠. 분명 홍콩 민주화운동이 주목받을 기회가 될 겁니다."
"네, 핑과일보가 지금까지 취재해 온 흑룡회와 공안의 공생관계를 슬슬 보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지미 리는 자신의 사무실이 습격당한 일에 씁쓸함을 표출했지만, 왠지 그의 표정 한편에서는 민주화된 홍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번지고 있었다.
* * *
영국 시티오브런던.
강준은 SS재보험의 런던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아 런던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최은정도 성원그룹의 투자심사역으로 런던에 함께 오게 됐다는 거였다. 결국 부서는 달랐지만 같은 건물, 옆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
"왜요? 그게 불만이에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런던에 아는 사람도 없었는데 저야 좋죠!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준은 짐짓 과장된 말투로 대꾸했다.
"지금 보니까 런던에서의 로맨스…… 뭐 그런 거 기대하고 온 거 같은데요?"
"에이! 아닙니다~ 전 항상 지금이 진행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최은정은 다 알면서도 넘어가겠다는 듯 강준의 팔짱을 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었다.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게 아니었고요?"
"일하려고 온 거지? 놀려고 온 거예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강준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눈치 없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로이즈의 동아시아 총괄 에드워드 심사역이요."
"네? 벌써 업무 시작인가요? 김성호 대표님은 한 달은 휴가 줄 테니까 푹 쉬라고 했는데?"
"업무라뇨? 그냥 파트너들과 안면 트는 거죠. 편하게 식사 한번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그걸 왜 휴가 때 하냐고요!’ 강준이 속으로 그렇게 외치는 걸 알았는지 최은정이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강준 씨에게 준 공로상! 강준 씨가 런던으로 출국하고 나서 연락이 온 거래요. 오늘 아침에 사무실에서 페덱스로 받은 거고요."
최은정이 건넨 건 금으로 된 메달이었다.
"이거 순금인가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상금으로 5천만 원도 함께 지급됐어요."
"우와! 정말요? 그래도 보험조사관으로 활동한 게 보람차네요! 하하!"
"정말 상금 때문에 보람찬 거예요?"
강준은 최은정의 질문에 말없이 씩 웃었다.
식물인간의 몸으로 회귀한 이후로 줄곧 보험조사관으로 달려왔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전대성과 최진태 회장을 응징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다양하고 악독한 보험사기 사건들을 해결해 온 강준이었다.
물론 타인의 기억을 읽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을지로 보험조사팀은 이제 SS재보험의 데이터분석팀으로 재편되어 보험조사업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팀장으로 승진한 김준혁이 있었다.
"저기 에드워드가 오네요."
"오! 저 깐깐한 인간을 이제 매일 만나야 하는 겁니까?"
"알고 보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몰라요. 강준 씨도 곧 알게 될 거예요."
새로운 파트너가 될 에드워드는 최은정의 말과는 달리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강준에게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런던 지사장이 되셨다고요?"
"네…… 이번 휴가가 끝나고 나면……."
"최근 왕립미술관에 유물 도난사건이 있었습니다. 혹시 자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사장님의 그간의 활약상은 저도 전해 들은 바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며 에드워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붙임성은 없지만 대충 잘 지내 보자는 얘기였다.
"지금요?"
"아뇨. 일단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눠 보죠. 잘만 하면 이번 일을 계기로 왕립미술관의 재보험 계약 건은 SS재보험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도난사건 때문에 재보험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네임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성격 급한 에드워드가 후다닥 자기 말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보며 최은정이 입을 가리고는 웃었다.
강준은 어쩌면 최은정의 말대로 일견 까다로워 보이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반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배가 불러야 머리도 잘 굴러가는 법이니까요!"
강준은 최은정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재보험 언더라이터로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기억을 읽는 보험조사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