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엔터사 배상책임보험 (7) (242/250)

242화. 엔터사 배상책임보험 (7)

우민석 배우의 기자회견은 밤늦은 시간에 열렸다. 이미 낮 동안 내내 한강 엔터테인먼트의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었으니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라이브 방송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기자들이 여럿 보였다.

그리고 우민석 배우의 곁에는 다른 동료 배우들도 함께 나와 있었다.

"남궁 대표님, 이게 무슨 일이죠?"

"우리가 모르고 있었는데 화영컴퍼니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배우들이 꽤 있었나 봅니다."

"아…… 수면 밑에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 튀어나온 거라고 봐야겠네요."

"그렇죠. 서광걸이 그간 무척 치밀하게 작업을 해 왔더라고요."

그때 앞쪽의 우민석이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간 서광걸로부터 협박받아온 불륜 동영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아내와 팬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동료 배우들과 함께 자리하게 된 이유는 그간 화영컴퍼니가 제작해 온 ‘언더커버 인 상하이’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중 합작 첩보영화라는 애초의 취지와는 다르게 시나리오는 매번 바뀌었고, 결국에는 영화에 참여하는 한국 배우들이 오성홍기를 흔들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민석의 말을 이어받은 다른 배우가 준비된 원고를 이어갔다.

"시나리오 변경이 일방적으로 이뤄졌지만,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을 이유로 저를 비롯한 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영화 제작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저희는 문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원고를 읽던 배우가 말을 멈추자 약속이라도 한 듯 옆에 앉아있던 시나리오 작가가 발언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나리오를 변경하라는 압박을 받을수록 중국 측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한국을 종속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첩보요원이 왜 미국에 대항해 중국을 구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왜 오성홍기를 들고 중국 공산당을 찬양해야 하나요?"

작가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한참을 더 이어졌고, 기자들의 관심이 자연히 우민석의 불륜 동영상으로부터 화영컴퍼니의 실체로 옮겨갔다.

"남궁 대표님께 묻겠습니다. 영화를 공동제작하는 JIN필름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유가 뭡니까? 두 제작사 간 불화를 의미하는 겁니까?"

한 기자가 남궁진 대표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솔직히 저 역시도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공동제작사로서 먼저 이번 영화에 참여하셨던 배우님들과 작가님들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 JIN필름은 내부적으로 공동제작을 위해 체결했던 계약에 위반사항이 있는지부터 먼저 검토하겠습니다."

"그럼 영화가 엎어지는 겁니까?"

"그건 이번 영화의 투자자분들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남궁진 대표는 자신이 할 만큼 다 했다는 듯 기자들 틈에 있는 강준을 보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 * *

우민석과 배우들이 제기한 문화 동북공정 때문에 한동안 화영컴퍼니에 대한 세간의 이목이 쏠렸지만, 영화는 결국 엎어지지 않았다.

다른 투자자들이 모두 빠져나갔지만, 왕총이 단독으로 거액의 자본을 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두 공동제작사는 법정 분쟁에 휘말렸지만, 불법 동영상으로 출연진을 협박하고 시나리오를 일방적으로 수정했던 부분 때문에 화영컴퍼니가 소송으로 JIN필름을 이기긴 힘들었다.

하지만 깔끔히 영화 공동제작에 대한 계약이 종료되지 않았기에 강준은 원래 받으려고 했던 비용의 절반만을 받았다.

골치 아픈 화영컴퍼니와의 공동제작은 중단된 거나 마찬가지라면 기어코 원래의 조사비용을 다 지불하려는 남궁진 대표였지만, 강준은 소송비용을 명목으로 절반을 되돌려 줬다.

굳이 찜찜하게 의뢰 비용을 다 청구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미 을지로 보험조사팀이 SS재보험의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강준의 지분 가치도 수십 배가 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한 달 후. 신사동 화영컴퍼니.

왕총은 대한뉴스 장선우 보도국장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장선우가 한국 언론사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한중 문화교류에 대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일정 직후였다.

하지만 그 사업 추진의 실체는 접대였다. 장선우는 일주일 내내 최고급 호텔에서 VIP 대접을 받으며 밤에는 술로 낮에는 공산당 간부들을 만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고 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장선우의 방문은 왕총에게는 특별한 것이었다. 한국의 주요 언론이 자신에게 포섭됐다는 걸 중난하이의 권력자들에게 보여 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왕총은 공식적으로 베이징의 인정을 받는 민간 엔터테인먼트사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광전총국을 비롯한 국영TV가 든든한 왕총의 뒷배가 되어 줄 터였다.

그런 와중에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서광걸에게 맡긴 화영컴퍼니였다. 한국 연예계 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하라고 맡겨뒀더니 괜한 사고만 치는 격이었다.

서광걸은 장선우 보도국장과 함께 들이닥친 왕총을 맞으며 긴장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질책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서 대표,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서광걸은 순간 원래의 자기 위치를 체감했다. 왕총이 가운데 앉고 자신과 장 국장이 마주 보고 앉은 상태에서 질책을 당하고 있었다.

서광걸은 단지 왕총의 대리인이었을 뿐이었다.

"이번 영화 제작은 중국 영화계의 글로벌 진출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근데 초반부터 잡음을 내요? 서광걸 당신…… 정말 한국 전문가가 맞습니까?"

이럴 때는 바짝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서광걸도 알고 있었다. 능력이 부족하면 충성심으로라도 때워야 하는 법이었다.

"제가 왕총 대표님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려고 하다 보니…… 아무래도 과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간의 일들에 대한 변명과 충성맹세를 동시에 하는 발언이었다. 왕총 입장에서도 전에는 장기판의 말을 바꾸는 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서광걸은 이미 한국의 미디어에 너무 많이 노출됐고, 왕총에게는 새로운 파트너가 생겼다. 더군다나 그 파트너는 한국의 주류 언론이었다.

"앞으로 화영컴퍼니의 대표는 대한뉴스 장 국장이 맡을 겁니다."

서광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대한뉴스는 화영컴퍼니의 제휴사였다. 서광걸은 그저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는 제작사가 미디어와 친하게 지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장선우 국장이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왕 대표님!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도 있어서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하던 일만이라도 마무리 짓고 물러나겠습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서광걸이었다. 하지만 그런 잔머리는 이미 결정을 내린 왕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누가 화영컴퍼니를 떠나라고 했습니까? 예전처럼 계속 일하시면서 지금 하는 프로젝트 마무리하세요."

냉정한 왕총의 지시에 서광걸은 더 맞설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완전히 내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새로운 권력인 장 국장의 눈치를 살피며 훗날을 도모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장 국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서광걸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시정잡배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화영컴퍼니가 계속 헛발질을 하는 것도 서광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해봅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인사말로 서광걸에게 손을 내미는 장선우였다. 이제 화영컴퍼니에서 서광걸의 존재는 점점 사라져 갈 터였다.

* * *

을지로 보험조사팀.

강준의 법인은 정식으로 SS재보험에 인수됐지만, 아직 회사 모양새를 갖추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김 실장, 아래층 전체를 임대했는데 직원은 아직 많이 못 구한 것 같다?"

"네. 개발자 뽑기가 쉽지 않네요. 아무래도 기존 IT 회사들보다는 낯설겠죠. 보험회사인데 정보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하니까요……."

"솔직히 성원그룹이 좀 낡은 이미지라고 생각하겠지."

"네 부인할 수는 없죠…… 그래서 면접을 오게 되면 우리 비전도 보여 주고……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도 보여 주고 그래야죠."

"그게 먹히겠어?"

옆에 있던 송지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가 이 업계에서 유튜브 제일 먼저 했잖아요. 김 실장이 틈틈이 계속 영상도 업로드하고 있고요. 지난번 화영컴퍼니 문화 동북공정 사건도 그래서 더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된 거고요."

"그래? 다들 고생들 했네."

"말로만요?"

"왜 오랜만에 회식 한 번 할까?"

"좋죠. 근데 이제 우리끼리 오붓하게 하는 회식은 힘들 거 같은데요."

송지희는 신입사원이 들어온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개발자로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아직 적응이 덜 됐는지 회식이라는 말에도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대표인 강준과 일반 직원들의 거리를 멀어질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신입사원 환영회는 해야지. 오늘 다 모이자고!"

"네, 그럼 장소 예약할게요."

그때 사무실로 낯익은 누군가가 방문했다.

배필립에게 필리핀 현지에서 납치 살해당했던 김상훈의 부친이었던 김철희였다.

"대표님, 이분께서 대표님을 찾으셔서 모셔왔습니다."

당시 사건을 함께 겪지 않았던 제이콥은 김철희의 얼굴을 몰랐다. 하지만 강준을 알고 있다는 김철희의 말에 사무실 안쪽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일단 저쪽으로 앉으시죠."

강준은 접객실로 김철희를 안내했다. 차마 잘 지냈는지에 대한 것은 물을 수 없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마음을 강준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설계한 호텔이 있는데…… 직접 건축 감리까지 했습니다만 문제가 좀 발생했습니다."

강준은 그제야 그가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 보험조사 쪽이 전문인지라 호텔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네 그렇군요……."

"그래도 잘 오셨습니다."

강준은 순간 머뭇거리는 김철희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줬다. 그리고는 그가 보험조사팀을 찾아온 이유를 읽어 내려갔다.

김철희의 기억은 내장공사를 하지 않은 뼈대만 세운 건축물 내부에서 시작됐다.

[이거 설계도면과 엄연히 틀리지 않습니까? 기둥을 설계변경도 없이 옮겨놓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러면 건축물 전체 하중에 문제가 생긴다고요! 이러고도 감리승인을 해 달라는 겁니까?]

[김 대표님, 우린 설계대로 한 겁니다. 기둥은 시공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던 거고요…….]

안전모를 쓴 남자가 김철희를 향해 변명했다. 그는 시공사 측의 사람인 듯했다. 남자의 작업복 점퍼에는 ‘밍싱건설(明星建設)’이라는 글귀가 한자로 또렷하게 자수쳐져 있었다.

‘김철희 사장이 날 찾아온 이유가 있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