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엔터사 배상책임보험 (5)
한강 엔터테인먼트.
"1억 원을 어디로 보내야 하는 거죠?"
―송성재 매니저를 통해서 현금으로 보내 주시죠. 아! 에디 건은 미안합니다.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요.
"솔직히 서로 믿고 좀 합시다…… 배우 쪽까지 번지면 진짜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보험조사관이 우릴 협박해서 돈 뜯어냈다는 거 세상에 다 알릴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한강 엔터테인먼트도 다 끝나겠군요.
"그러니까 서로 제대로 좀 하자고요!"
전화를 끊은 박병태의 눈은 시뻘게져 있었다. 강준이 직접 연락이 와 추가로 다른 소속 배우의 동영상을 공개한다며 압박을 가해 온 것이었다.
블러핑!
강준의 작전은 박병태 이사를 흔들어 그가 숨겨놓은 불법 동영상들을 모두 끌어낸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런 강준의 작전은 일부 먹혔다. 박병태로서는 그가 계획했던 한강 엔터테인먼트의 매각이 실질적으로 무산되고 있던 찰나에 새로운 일이 또 터진 격이었다.
박병태는 내선전화를 들고 비서에게 연락했다.
"성재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무표정한 얼굴의 송성재가 들어왔다. 본인이 찍은 에디의 동영상이 유출됐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그였다.
"이사님…… 그 동영상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됐고! 너 이거 어떻게 수습할래?"
박병태가 그리 나올 때는 항상 누군가에게 희생을 요구할 때였다. 송성재는 간밤에 강준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동영상 하나에 천만 원에 거래합시다. 어차피 회사 영원히 다닐 거 아니잖아요? 이제 굿보이즈도 끝났으니 화영컴퍼니의 인수합병도 물 건너간 겁니다.]
‘회사가 정말 끝장나는 건가? 그럼 내가 굳이 끝까지 박병태한테 충성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근데 이사님 저희 정말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새끼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박병태의 눈빛에 송성재는 오금이 저렸다. 습관이 무서운 법이다. 송성재는 이제까지 박병태 이사의 횡포에 눌려 살았었다. 물론 이제는 그 닭장을 탈출하려는 중이었지만…….
"죄…… 죄송합니다."
"너 가서 박강준 잡아 와라."
"네? 제가요?"
"그럼 누가? 내가 가리? 이 새끼가 정신 안 차려!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 할 거 아니야!"
송성재는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사님…… 어떻게 수습을…… 한다는 겁니까?"
"에디 건은 네가 좀 싸안고 가자……."
"네? 싸안고 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번 일은 네가 에디한테 개인적으로 돈 뜯어내려고 벌인 일로 하자. 그리고 이왕 하는 거 그 보험조사관도 같이 처리하자고."
"……어떻게 처리합니까?"
"너 그 인간한테 돈 건네는 장면 영상으로 찍어 놔라. 그걸 가지고 경찰에 가서 역으로 너도 협박받았다고 하는 거야!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에다 가지고 있던 동영상을 내놓은 거라고."
그럴싸한 논리였지만, 어쨌든 본인도 협박죄에 걸릴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딴 것들이 박병태 이사에게 중요한 건 아닐 터였다.
"……네…… 알겠습니다……."
"성재야. 이번에만 고생하면 난 은퇴할 거다. 은퇴하고 나면 나는 이제 뒷방 늙은이야. 대신 너한테 돈 투자해 줄 테니까 이제 네가 직접 기획사 차리는 거야."
"네…… 무슨 말인지 압니다……."
매번 중요한 고비마다 박병태가 자신에게 해 왔던 말이었다. 송성재는 그 말이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저 요식행위처럼 박병태의 달램에 수긍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했다.
"그래, 고맙다. 나한테는 성재 너밖에 없는 거 알지? 아는 기자들 몇 명 연락해 놨으니까 내가 말한 방향대로 기사가 날 거야. 그럼 너는 추가로 인터뷰 몇 마디만 해 주면 되는 거다."
고개를 끄덕거린 송성재는 박강준을 잡을 구체적인 작전을 한 시간 넘도록 들어야 했다. 매번 해 오던 일이었다.
상대를 덫이 펼쳐진 곳에 들어오게 한 후, 대화를 녹취하고 영상을 녹화하는 일. 송성재가 한강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늘 해 오던 일이었다.
하지만 송성재는 이번만큼은 박병태 이사의 말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는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힘 있는 놈에게 붙어야 한다는 거였다.
송성재가 볼 때 굿보이즈 에디 사건으로 박병태 이사의 영광은 끝난 것 같았다. 이제는 그를 떠나야 할 때였다.
* * *
뚝섬 시민공원 주차장.
차량을 세워 둔 강준과 제이콥은 송성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준은 그가 가져올 1억의 현금을 가져오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강 엔터테인먼트가 그간 저지른 더러운 짓거리들을 확보하려는 중이었다.
불법 촬영물.
그건 소속 연예인들을 노예처럼 묶어 두는 가장 효율적이고도 값싼 방법이었다.
"정말 올까요?"
"내가 잘 설득했으니…… 오지 않을까?"
강준이 설득한 방법은 소속 연예인들의 불법 동영상 하나당 천만 원씩 주고 사는 방법이었다. 어차피 동영상을 넘기지 않더라도 송성재가 수사망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이미 에디 건이 세상에 공개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송성재에게 도망갈 길을 은근슬쩍 알려 주었다.
[태국에 몇 개월 가서 계시면 냄비 같은 여론도 잠잠해질 거고…… 박병태 이사도 예전처럼 힘을 못 쓸 겁니다. 지금 한강 엔터테인먼트…… 망하기 직전이거든요.]
공포와 달콤함을 적당히 뒤섞은 제안. 송성재는 그 제안을 뿌리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강준은 도망치려는 송성재를 박병태가 그대로 놔둘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 저거 송성재 차량 아닙니까?"
제이콥이 가리키는 곳에 송성재의 회사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창마다 선팅을 짙게 한 검정 밴. 한강 엔터테인먼트의 법인 차량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송성재는 빈손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장님, 지금 나갈까요?"
"잠깐만…… 기다려. 저기 저 차량…… 이상하지 않냐?"
송성재를 뒤따라온 차량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차됐다. 하지만 탑승자는 내리지 않았고, 송성재가 타고 온 밴처럼 짙은 선팅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따라붙었는데?"
"여기서는 안 보이는데요?"
"제이콥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약에 저 차가 움직이면 쫓아가 봐라. 난 내려서 송성재를 만나 볼 테니까."
"제가 저 차 쫓아가면 소장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강준은 그 말을 하고는 혼자 차량에서 내렸다. 아직 송성재는 강준을 발견하지 못한 듯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송 매니저님! 여깁니다."
마침내 강준을 발견한 송성재는 긴장한 기색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USB 메모리를 내밀었다.
"여기에 굿보이즈 다른 멤버들하고 배우 윤석희의 유흥파티 동영상이 있어요."
"유흥파티 동영상이라고요?"
"네, 이 정도는 이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죠."
무심하게 말하는 송성재의 말투에 강준은 속으로 경악했다.
"이것도 다 송성재 매니저가 촬영한 겁니까?"
"제가 찍은 것들도 있고…… 흥신소에 맡겨서 찍은 것들도 있고요…."
"……그렇군요."
"약속했던 돈 주시죠. 총 5건이니까 5천만 원이네요."
"근데 송성재 씨, 먼저 저한테 주실 게 있지 않아요?"
"뭐요?"
"박병태 이사가 회삿돈 1억을 전달했을 텐데요? 지금 확인시켜줘요?"
강준은 손에 쥔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송성재는 박병태에게 받은 1억 원을 자기가 꿀꺽 먹을 생각이었다.
"그 1억…… 제 퇴직금이라고 생각하시죠. 아쉬우면 진짜 전화를 걸던지 해서 받아 내시던지요. 난 이제 이판사판이니까."
"그럼 좋습니다. 나도 내 방식대로 하죠. 이 동영상 비용은 그걸로 ‘퉁’치는 거로 합시다."
"시발! 처음부터 당신 돈 줄 생각 없었지……!"
"당신은 형 동생 하던 사이도 배신하는 마당에 내가 약속이라도 지켜주길 원한 겁니까? 양심 없는 인간아!"
강준은 욕설을 터트리려던 송성재를 무섭게 노려봤다. 이제 곧 도망자가 되는 그로서는 뻣뻣하게 나오는 강준과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좌우간…… 난…… 할 만큼 했어요!"
뭘 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송성재는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고, 강준이 주목하던 검정 밴도 송성재의 차량을 따라 빠져나갔다.
강준은 제이콥을 향해 손짓했다.
부우우웅! 끼이이익!
"소장님, 타시죠!"
"번호판 찍었지?"
"네!"
"그럼 쫓아가 보자고…!"
제이콥은 액셀을 밟으며 동시에 핸들을 돌렸다. 그렇게 10분을 쫓아가던 제이콥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소장님, 저놈들 신사동으로 빠지는데요?"
"그래? 어딜까…… 한강? 아니면 화영컴퍼니?"
부르르르! 부르르르!
사무실에 있던 김준혁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어! 김 실장! 알아봤어?"
―네, 경찰에 부탁해서 조회해 봤는데 대포 차량이랍니다.
"대포 차량이라…… 김 실장, 이진철 경감에게 연락해서 내가 좀 있다 알려 주는 곳으로 경찰 인력 좀 보내 달라고 해. 긴급체포 명분은 대포 차량 이용!"
―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신사동으로 접어든 두 대의 밴은 익숙한 이면 도로로 빠졌다. 그곳은 한강 엔터테인먼트 빌딩이 있는 골목이었다.
* * *
한강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피떡이 된 매니저 송성재가 박병태 이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건장한 덩치의 남자 둘이 그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박 이사님, 인제 그만하시죠……?"
조민국 대표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 불편했다. 며칠 전까지 웃는 얼굴로 마주했던 누군가를 직접 패면서까지 일을 해결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매제,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 새끼 때문에 우리가 망하게 생겼는데!"
박병태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하키채를 남자 둘로부터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송성재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허벅지에 하키채를 휘둘렀다.
퍼억!
"으어어억…!"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송성재가 다리를 붙잡고는 고꾸라졌다.
"성재야, 이제라도 우리 솔직해지자. 너! 나하고 같이해 온 세월이 얼마냐? 어?"
"……죄송…합니다…."
"꼭 이렇게 원초적으로 해야겠어? 조 대표님도 불편해하시잖냐?"
"……에디 동영상은 제가 넘긴 게 진짜 아닙니다…… 그냥 강탈해 갔는데…… 그걸 어떻게 합니까……? 아흐흐……."
송성재의 앓는 소리에 조민국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박병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은 왜 갔어? 박강준인가 뭔가 하는 인간이 너한테 동영상 하나당 천만 원씩 주고 샀다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네? ……박강준이 그렇게 말해요? 거……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이 거짓말할 이유라도 있어?"
강준은 굳이 송성재를 보호하는 발언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보험사기의 공범인 둘은 오히려 철저히 찢어 놓는 게 조사에 유리했다.
그때 바깥쪽 사무실 입구가 소란했다. 그리고는 송성재를 폭행하고 있던 대표이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이다! 다들 그대로 꼼짝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