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엔터사 배상책임보험 (2) (237/250)

237화. 엔터사 배상책임보험 (2)

[이…이게 뭡니까?]

우민석의 기억은 서광걸로부터 태블릿의 동영상을 보게 되는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유부남인 우민석은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와 불륜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불륜의 은밀한 현장이 태블릿 화면 속에서 영상으로 틀어졌다. 동영상이 퍼져나가면 캐스팅된 드라마에서는 물론이고 계약기간에 있는 광고의 위약금까지 물어줘야 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건 불륜이라는 치명적인 도덕성 문제로 연예계에서 자신이 퇴출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잘 보셨습니까? 저도 이걸 보고 무척 당황했죠. 그래서 만사 제쳐두고 우민석 배우님께 달려온 겁니다.]

[이걸…… 누가 찍은 겁니까……?]

[제보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당신한테 제보하냐고요!]

우민석의 흥분한 목소리에 서광걸은 사무실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우님,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시면 사태 해결이 더 어렵습니다.]

[……쥐새끼같이 남의 사생활을 캐? 당신 협박죄로 고소당하고 싶어!]

[하아…… 정말…….]

마치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는 우민석이 잘못된 사람인 양 서광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말이 안 통하겠네요…… 전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말끝을 흐리며 간을 보는 서광걸이었다. 그런 얄미운 태도가 우민석의 속을 뒤집어놨다. 당장이라도 서광걸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지만, 본인의 연예계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우민석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서광걸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간을 보기 시작했다.

[저희는 이런 영상 따위로 배우님을 압박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배우님의 능력을 활짝 못 펼치시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개소리 말고 하고 싶은 말이나 해.]

[근데 이렇게 반말로 막말을 하시는 건 평소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 좀 당황스럽네요…….]

우민석은 의뭉스럽게 말하는 서광걸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결정적인 약점을 쥐고 있는 서광걸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괜한 반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우민석은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준은 그제야 그가 왜 화영컴퍼니에서 제작하는 첩보영화에 출연하려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단단히 걸리셨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함께 사진 포즈를 취하던 우민석은 흠칫 놀란 듯 강준에게 되물었다.

"서광걸 대표한테 말입니다. 협박당하고 있으시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엉뚱한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순간 옆에 있던 매니저가 강준을 막아섰다. 반면 우민석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매니저야…… 자리 좀 비켜주겠냐?"

"형님!"

매니저는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분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중요한 얘기니까 차에 가서 기다려 주라……."

"……흠…… 알겠습니다."

우민석은 매니저가 카페 밖으로 나가고 나자 체념한 듯 물었다.

"서광걸이 박 소장님께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그게 가려지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차라리 인정하고 살길을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떻게요? 마누라 놔두고 바람피웠다고 동네방네 광고라도 하고 다닐까요?"

"나중에 터질 일이라면…… 먼저 터트리는 게 나을 수도 있죠."

"……서광걸, 이 개새끼…… 도대체 어디까지 말한 거야!"

강준의 말에 분노의 화살을 서광걸에게로 돌리는 우민석이었다.

"이렇게 하시죠. 영화는 원래대로 출연하시는 거로 하시고…… 그 영화가 크랭크인 되기 전에 협박을 받았다는 걸 터트리는 거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을 때, 배우님의 불륜 사실도 함께 털어놓으시죠."

"그래도 제가 비난받는 건 똑같은 거 아닙니까?"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 물론 비난은 어쩔 수 없습니다. 불륜을 저지르셨으니까요. 하지만 비난의 화살은 분산되겠죠."

강준의 직언에 우민석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답답해했다.

"젠장…… 나도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압니다…… 그러니……."

"부인께 솔직히 잘못을 털어놓으십시오. 그리고 협박을 받았다는 발표를 부인과 함께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여론을 조금은 무마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왜요? 겁이 나시는 겁니까?"

"……이혼당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이혼을 당하시는 게 낫죠. 서광걸에게 내내 끌려다니시다가 어설프게 영상이 공개돼 온 국민의 비난을 받으시는 것보다는요."

"생각을 좀 해보죠……."

"알겠습니다. 그럼 결심이 서시면 이 번호로 연락을 주십시오."

강준은 명함을 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주차장에는 매니저 차량이 보였다. 짙은 선팅으로 내부가 가려진 밴이었다.

똑! 똑!

강준은 운전석을 두드렸다.

"……뭡니까?"

스르륵 창문이 내려가고 사뭇 험악해 보이는 인상의 매니저가 강준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 서광걸한테 얼마나 먹었냐?"

"……! 당신 뭐야? 먹긴 뭘 먹어! 아까부터 자꾸 우리 형님께 엉겨 붙는데…… 원하는 게 뭐야?"

"송성재! 넌 지금부터 딱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 얼마 먹었어?"

"……뭐? 당신이 경찰이야…… 뭐야?"

그 순간 강준은 한 손으로 매니저의 울대를 꾹 붙잡았다. 매니저가 강준의 팔목을 두 손으로 잡으려 했지만, 울대를 세게 쥔 강준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는 ‘큭큭’대는 신음만 냈다.

"봉투 받았잖아. 여의도 방송국 근처 한강공원에서!"

"……! 증…… 증거 있어?"

"있지 인마! 내가 그 증거다! 이 새끼야!"

강준은 나머지 손으로 핸드폰 거치대의 매니저 핸드폰을 확 잡아 뺐다. 그리고는 메신저 화면을 확인했다.

역시나 서광걸과 오간 문자 내용이 있었다.

"커…… 커헉! 이게 뭐…… 하는…… 컥!"

"이거 봐라, 이거 봐. 아주 내부의 적이 여기 딱 있었네. 우민석이 바람피우는 것도 네가 얘기해 준 거지? 서광걸한테?"

"아……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강준은 여전히 매니저의 울대를 쥔 채 메신저 과거 대화창을 넘겼다. 그리고 두 달 전 우민석의 사생활을 보고하는 내용이 나왔다.

"이거 봐봐! 이래도 아니라고 할래?"

강준은 울대를 풀고는 매니저를 다그쳤다. 매니저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차량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강준은 발로 운전석 문을 다시 닫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이 핸드폰은 내가 압수하고 싶지만, 내가 경찰이 아니잖냐!"

"당신 이거 절도야! 보험조사관인지 뭔지 세상에다 까발릴 거라고! 시민을 겁박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다고!"

"그래서 이걸 찍어갈 거다. 그럼 절도 아니지?"

찰칵! 찰칵! 찰칵!

한참을 자신의 폰으로 메신저 화면을 촬영한 강준은 다 찍은 스마트폰을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에게 휙 던졌다.

"증거는 이걸로 확보했고, 이제 어쩔래? 회사에는 배임, 우민석한테는 배신자, 서광걸한테는 어설프게 들켜버린 바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한테 협조하자."

"……꺼져……."

"됐다! 그럼! 일단 우민석한테 이 메신저 내용 보낸다?"

"자…… 잠깐만……!"

매니저는 사색이 된 얼굴로 강준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부터 만회할 기회를 줄게. 잘할 수 있지?"

"알았으니까 일단 그 사진들부터 좀 지워요."

"그래, 뭐 그렇게 하자!"

강준은 그가 보는 앞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지웠다. 그리고 그제야 얼굴이 편안해진 매니저가 강준에게 공손한 말투로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성수동 한강 엔터테인먼트.

그곳은 우민석의 소속사로 얼마 전부터 매각 얘기가 업계에서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매각 대상자로는 서광걸의 화영컴퍼니가 거론됐다. 기업가치 500억!

몇 해 전 두 명의 배우로 시작한 기획사지만 이제는 배우 분야에서 가수로 넓혀 음반을 제작하고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킨 대형기획사로 성장해있었다.

"박 이사 좀 들어오라고 해봐."

"네, 알겠습니다."

한강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조민국은 손위처남인 박병태 이사를 들어오게끔 했다. 그가 한강 엔터테인먼트에 새로운 돈줄을 물고 왔다. 그 돈줄은 바로 서광걸의 화영컴퍼니였다.

"조 대표! 얘기 들었지? 이번에 우리 에디가 중국 관영TV에 출연한 거?"

박병태 이사는 흥분한 목소리로 들뜬 채 대표이사실에 들어왔다.

"네, 들었습니다. 반응이 상상 이상이네요."

"이번에 잘해서 광고 하나 따내 보자고."

"근데 에디 말이에요. 다른 데랑 계약한다는 말이 떠돌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박병태는 인상을 팍 구겼다.

"이래서 요즘 새끼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지금이라도 정산을 좀 해 주는 게 어때요?"

"에이…… 그럴 필요는 없지……!"

박병태는 손사래를 치면서 조민국을 말렸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다 조처를 해 놨으니까, 매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떤 조치요?"

"에이…… 그런 게 있어! 내가 말했지? 이 바닥에서 너무 신사처럼 굴면 매제만 호구 취급받는다고?"

"네, 압니다. 근데 그래도 귀띔만이라도 좀 해 주시죠. 저도 불안 불안해서요."

"흐…… 흐흠……."

잠깐 망설이던 박병태가 이내 무슨 큰 영업비밀이라도 알려 준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에디 그 자식이 사석에서 더럽게 노는 거 잘 알잖아? 내가 그걸 미리 다 찍어 놨지. 우릴 배신하면 아예 연예계 퇴출이라고! 이래서 옛말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랬는데…… 쯧!"

"근데 광고 계약이 한두 개 걸려있는 게 아니잖아요? 에디한테 문제 생기면 우리도 망하는 건 매일반이지 않을까요?"

박병태는 마치 조 대표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흐흐! 매제. 내가 누구야?"

"그야 연예계 쪽에서 바닥부터 다지신 분 아닙니까?"

조민국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박병태가 사기 전과로 공식 석상에 나서지는 못하는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다 보험에 들어놨다고."

"보험요……? 아…… 저번에 말씀하신 그 보험 말이군요!"

"그래 애들이 광고 찍을 타이밍이 오면 그 전에 꼭 들어놔야 하는 보험이지. 배상책임보험 말이야. 흐흐! 사고 터져서 위약금 물어줄 일 있으면 보험금 타서 물어주면 되는 거거든. 그리고 로펌 의뢰해서 광고주와는 소송전으로 질질 끌면 되는 거고."

조민국은 박병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건설업을 하던 부친의 유산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던 조민국은 지금까지 사업으로 별반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 조민국을 지켜보던 아내 박유진이 자신의 오빠를 회사로 불러들인 거였다. 연예계에서 떠돌며 양아치 짓거리를 하던 오빠였지만, 그래도 믿을 건 혈육밖에 없다고 생각한 박유진이었다.

그리고 그런 박유진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박병태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한강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다. 잠깐의 성공. 박병태는 자신의 양아치 기질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결국 지난 몇 년간 중국 시장 진출을 노린다는 핑계로 그는 상하이에서 놀고먹었다. 보다 못한 조민국이 상하이 지사를 폐쇄하려고 했지만,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박병태는 화영컴퍼니를 끌고 들어온 거였다.

조민국 대표로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처가 식구들이 장악한 한강 엔터테인먼트를 거액에 팔아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바깥에서 비서가 들어왔다.

"조 대표님, 밖에 보험조사관이 찾아왔는데요."

"어? 보험조사관……? 왜?"

조민국의 걱정 어린 눈빛에 박병태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볼일 없다고 그래! 경찰도 아닌데 조사에 응할 의무는 없어!"

"……박 이사님…… 근데 그 보험조사관이 금융감독원에서 조사업무를 위임받았다고 하던데요?"

"뭐? 금융감독원?"

박병태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금융감독원이 들이닥친다면 안 그래도 소심한 조민국이 흔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