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엔터사 배상책임보험 (1)
JIN필름의 대표 남궁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새해 벽두의 한 아침이었다.
―박강준 소장님, 제가 조만간 을지로 사무실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잘 지내셨죠? 저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오셔서 그간의 근황이나 교환하시죠."
강준은 남궁진 대표가 그냥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화상으로 그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긴 사연이 전화상으로 해결되진 않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다음 날 사무실을 찾아온 남궁진의 낯빛은 어두웠다. 최근 제작한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으로 약진하는 JIN필름이었다. 그렇기에 강준은 그가 꺼낼 말들을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얼마 전에 저희와 공동으로 영화 제작을 하던 제작사가 사정이 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다른 곳으로 넘어갔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예전에 왕총 대표에게 통역해주던 서광걸이 운영하는 회사더라고요."
"서광걸이 제작사를 인수했다고요?"
"네, 결국 한몫 잡은 모양이더라고요. 회사 이름은 화영컴퍼니입니다. 아마 배후에는 왕총이 있다고 봐야겠죠."
강준은 한때 개인정보가 유출됐던 SH보험의 양양 대표에게 붙어 있었던 서광걸이 떠올랐다. 그는 SH보험이 성원그룹에 매각되고 난 이후, 다시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그럼 공동 제작하던 영화는 엎어진 겁니까?"
"아뇨. 그 반대입니다. 저희는 계약을 파기하고 싶은데 오히려 화영컴퍼니에서 원 계약대로 진행하겠다며 난리입니다. 계약을 파기하면 이제까지 들어갔던 비용까지 다 토해 내라며 윽박지르는 상황이고요……."
"근데 남궁 대표님이 절 찾아온 걸 보니 그 요구를 들어주기 힘든 이유가 따로 있으신 거겠죠?"
남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자기네들 맘대로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그걸 밀어붙이자는데……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100억이 넘습니다. 저로서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이유죠. 영화투자자들도 저희 JIN필름을 보고 투자해 준 거니까요……."
"이해가 갑니다… 근데 시나리오를 어떻게 수정했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시나리오 작가들이야 같은 사람들 아닌가요?"
"그게 그 사람들도 새로운 경영진한테 압박을 받는 건지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끼워 넣으니까요…… 역사물인데 명나라에서 파견된 관리를 무슨 구원자처럼 그리지를 않나…… 현대물에는 남자 주인공을 무조건 중국인으로 설정하고……."
"PPL 광고도 중국 기업들에게 받겠다고 하는군요?"
강준의 말에 남궁진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 했다.
"혹시 얘기가 박 소장님한테까지 흘러간 겁니까?"
"아뇨. 저 혼자서 짐작해 본 겁니다."
"……그렇군요. 대충 그 짐작이 맞습니다. 어쨌든 PPL 광고 같은 거는 제작비를 덜어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근데 그걸 빌미로 시나리오를 뜯어고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강준은 회귀 전 언론에서 접했었던 중국 제작사들의 문화 동북공정이 떠올랐다. 남궁진 대표와 같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드라마를 제작했다가 시청자들의 비난에 역풍을 맞고 방영이 중지된 적이 있었다.
‘아직은 국내 여론이 그런 거에 민감하지 않을 때니까 남궁진 대표가 이러는 게 업계에서는 오히려 유난 떠는 걸로 받아들여질지도…….’
"계약을 파기하면 얼마나 물어내셔야 합니까?"
"5억 원 정도입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저도 감당할 수 있죠. 근데 그놈들이 제 투자자까지도 꼬셨더라고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궁진 대표였다. 본인이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거였다. 강준은 그제야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광걸이 중국 투자자로부터 펀딩을 받아오겠다는 얘기를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겠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국내 투자자로서는 펀드 자금이 추가로 들어오니 리스크도 줄고 중국 시장에서 막대한 매출까지 기대할 수 있다니까 얼씨구나 하고 반기는 거죠."
"근데 왜 남궁 대표님께서는 적당히 맞춰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위약금까지 물 생각을 하면서요?"
"제가 영화판에 들어와서 짜깁기한 걸로 성공한 영화는 이제까지 단 한 편도 못 봤습니다!"
남궁진 대표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우려의 말이었지만 실제로 거대 자본 앞에서 그런 신념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대표님께서는 위약금을 물고 화영컴퍼니와의 공동제작 건을 중단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혹시 투자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그러십니까?"
"투자자들이 아니라……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던 배우들이 얼마 전에 제게 따로 부탁을 해 왔습니다. 자기네들은 꼭 그 영화에 출연해야 한다면서요."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는 JIN필름의 입장에서는 차기작에서 섭외해야 할지도 모를 탑배우들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 배우들이 그런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저도 그게 뭔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입니다. 저와 꽤 돈독하다고 생각했던 배우들이 그러니 그냥 외면하기도 뭣하고요……."
"제가 한번 만나 보죠."
강준은 그들의 기억을 직접 읽고 싶어졌다. 남궁진 대표는 강준이 단박에 승낙하자 오히려 본인이 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짐작으로는 아마 배상책임보험을 빌미로 배우들을 엮어 놨을 겁니다."
"배상책임보험이요?"
"네, 엔터사들에서 보통 배상책임 보험상품에 가입하거든요. 소속 연예인들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큰 문제를 일으켰을 때, 보험사로부터 배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험금으로 받을 수 있는 상품이죠."
"그건 엔터사들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게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근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엔터사 입장에서는 배우들의 일탈이 있어도 크게 손해 볼 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강준은 남궁진 대표가 뭘 의심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전 그 지점을 서광걸이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제 짐작인데……."
"서광걸의 화영컴퍼니가 배우들 소속 엔터사와 뒤로 손을 잡았다는 말씀인가요? 배우들의 약점을 잡아 묶어 두려고요?"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엔터사들이 서광걸의 제작사에 끌려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강준은 서랍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남궁진에게 내밀었다.
"사건의뢰 계약서입니다. 의뢰 항목은 JIN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배상책임보험 보험료율 적합성평가 정도가 되겠네요."
"네…… 어떻게 보면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네요."
"남궁 대표님, 거기 밑에 계약금과 잔금 항목 보이시죠? 금액은 알아서 적어 주십시오."
"제가…… 얼마나 써야 할까요?"
"아까 이번 영화를 엎는 데 드는 위약금이 5억이라고 하셨죠?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그 위약금이 안 들게 해드릴 테니 딱 그 절반이 2억 5천을 주시죠?"
순간 남궁진의 얼굴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그만한 사건의뢰비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대신 특약으로 별도 조항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면제해드리겠다고 약속한 위약금을 물게 되시면 을지로 보험조사팀은 일체 조사비용을 아예 받지 않는 걸로요."
"그래도…… 최소한의 실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만큼 사건 해결에 방점을 두고 일하겠다는 거니까요."
강준은 남궁진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내며 특약란에 본인이 직접 별도 사항을 적어 넣었다.
* * *
신사동 화영컴퍼니 인근.
강준이 미리 연락한 배우는 몇 해 전부터 개성 있는 조연으로 주목받아온 우민석이었다. 다년간의 무명 생활 끝에 지금 그의 몸값은 회당 개런티 천만 원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는 매니저와 함께 약속된 카페로 들어왔다. 서광걸의 제작사인 화영컴퍼니로부터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박강준 보험조사관님?"
"네, 반갑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갔고 그는 간간이 유머를 섞은 말솜씨로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다. 강준이 서광걸의 제작사 화영컴퍼니와의 관계에 관해 물어보려던 참에 그는 먼저 눈치를 채고는 말을 꺼냈다.
"변화가 좀 필요했습니다. 알다시피 배우가 하나의 이미지에 고정되어 버리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관객들도 쉽게 질리고요."
"그래서 화영컴퍼니에서 제작하는 첩보영화에 출연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타이밍에 제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죠. 어차피 단독 주연을 못 맡을 바에는 외국 배우와 같이 공동 주연을 하는 것도 괜찮거든요. 게다가 이것도 꽤 짭짤하고요. 하하!"
우민석은 손가락을 비비며 화영컴퍼니에서 높은 개런티를 제안받았다는 걸 알렸다.
"첩보영화라니 우민석 배우님과 잘 어울릴 것 같네요. 그래서 내용은 어떻게 흘러갑니까?"
"그게 상하이에서 시작되는 건데요."
"형님, 그거 계약사항에 유출하면 안 되는 거로 돼 있습니다……!"
"야! 어차피 이 바닥에 쫙 다 퍼졌는데, 문제가 될 게 뭐가 있어?"
강준의 호응에 신이 난 우민석이 매니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거리를 읊어댔다.
"미국 첩보 요원들이 우주 미사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 과학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겁니다. 결국 오해한 중국 정부에서도 쫓기고 CIA에도 쫓기는 형국이죠. 그때 딱! 하고 제가 나타나서 쫓기는 과학자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거죠."
"괜찮은 스토리네요."
"에이~ 솔직히 말해서 뭐 뻔한 스토리 아닙니까? 근데 사실 이런 게 또 먹힙니다. 글로벌하게 관객들을 끌어모으려면 항상 해 오던 익숙한 게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손뼉까지 치며 신이 나서 말하는 우민석이었다.
"근데 말입니다. 우주 미사일 기술을 중국이 가지고 있고, 그걸 미국 첩보 요원들이 빼앗는다고요? 혹시 그거 거꾸로 된 거 아닙니까?"
강준의 질문에 우민석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는 김이 빠진다는 듯 답했다.
"뭐 영화적인 겁니다. 영화적인 거! 우리가 논문이라도 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죠. 제가 실례되는 말씀을 드렸네요."
"에이~ 아닙니다. 보험조사관이시라 역시 날카로우시네요! 저도 오늘 박 소장님께 또 하나 배웁니다. 혹시 압니까? 제가 나중에 보험조사관 역할을 하게 될지요. 이런 게 다 연기 공부입니다. 연기 공부요. 하하!"
능글맞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다시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우민석이었다. 강준은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대배우를 만났는데 같이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이고 당연하죠! 이런 것도 인연인데, 저도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매니저야 네가 사진 좀 찍어 줘라."
"네, 알겠습니다. 형님~."
강준은 자연스럽게 우민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터치가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우민석은 특유의 친근한 미소로 외쳤다.
"자! 우리 잠깐이라도 친한 척하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찰칵!"
매니저가 스마트폰의 촬영 버튼을 눌렀을 때, 강준은 이미 우민석의 기억을 읽어 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