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항공사고 보험 (7)
"전 그간 소프트퍼시픽에서 B636 기종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절 배신자 취급하더군요."
유정국 차장의 말에 일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흘렀다.
"저기…… 기장님, 지금 그 문제를 논의하기엔 적절치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장관은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유 차장의 발언을 말리고 나섰다.
"지나간 일은 추후 다시 논의하는 걸로 하고요…… 오늘은 이만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합시다."
지형준 의원이 장관의 말에 호응하며 손뼉을 치고는 자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 차장은 굽히지 않았다.
"항공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리스크관리입니다. 전 이번 사고의 1차적인 원인은 기체 결함이지만, 사내에서 제기된 보고를 철저히 무시한 손미영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뭘 어쩌자는 겁니까?"
짜증이 난 듯 지형준 의원이 따져 물었다.
"전 이 사고가 나도록 사태를 방치한 손미영 대표의 해임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프트퍼시픽의 기장 대부분의 생각도 그렇고요."
"다…… 당신들 도대체 누구 편이야! 회사 망하자는 거야 뭐야?"
갑작스럽게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숨겨놨던 신경질을 표출하는 손미영이었다. 옆자리에 있던 김영진 전무는 그 광경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손 대표님, 진정하시고요……."
장관도 민망한지 한마디 거들었다.
"물론 저희는 손미영 대표에 대한 해임 권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도 보듯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일입니다. 저희는 소프트퍼시픽 측에서 그간의 졸속정비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제대로 된 정비 매뉴얼을 제시할 때까지 할 때까지 계속 저희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그럼 지금 노조라도 차리시겠다는 겁니까…… 뭡니까?"
지형준 의원이 비꼬듯이 말했다.
"노조요? 우린 지금 조종사들의 처우개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의 승객들을 위한 안전…… 그걸 보장해 달라는 겁니다."
"흐…… 흠흠…… 알겠습니다. 그 사안도 주무 부처로서 면밀하게 들여다보겠습니다."
손미영은 짜증이 난다는 듯 가져왔던 자료를 책상에 ‘탁’ 소리 나게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관회의에서 그런 태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안하무인이었다.
홀로 자리에 남게 된 김영진 전무는 안절부절못했지만, 자신마저 그 자리를 떠날 순 없었다.
"그럼 합동 조사단에 다음 주까지 구성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걸로 하시죠. 이런 일에는 괜히 주춤했다가는 국민 원성만 살 수 있다는 거 다들 잘 아시죠?"
장관의 말에 보어 측 김성환 지사장과 소프트퍼시픽 김영진 전무, 그리고 민한당 지형준 의원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 *
두 달 후.
도쿄 시부야 소프트재팬 본사.
합동 조사단이 출범하고 지지부진한 조사에 별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을 때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지구 반대편에서 터졌다.
에티오피아에서 소프트퍼시픽의 사고 기종인 B636 항공기가 자동비행제어 시스템 이상으로 비상 착륙한 것이었다.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몇몇 부상자들만 나온 기적 같은 착륙이었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소프트퍼시픽의 유정국 기장과 박정수 기장이 주장했던 B636기종의 시스템 이상 보고가 있었다. 그 보고는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퍼져 나갔고, 그걸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에티오피아의 기장들은 기체 이상에 대해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강준이 회귀 전 보았던 에티오피아 국적 항공기의 대형 참사는 재현되지 않았다. 사실 강준은 이 사건을 파악하면서 회귀 전 항공기 기수가 들리는 문제에 대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박정수 기장이 사고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물밑에서 강준이 귀띔을 해 줬기 때문이었다.
결국 B636 기종의 제조사인 보어는 기체 결함에 대해서 계속 회피할 수는 없었다. 에티오피아 국적기의 사고 한 달 후 보어는 소프트웨어로 인한 기체 결함을 인정하며 생산을 중단하기로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이 모든 일의 진행 과정에서 소프트퍼시픽에 관한 여론은 점점 안 좋아졌다. 대표인 손미영의 독단적인 경영이 동시에 수면 위로 불거졌기 때문이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인천―홍콩 노선의 취항은 국토교통부의 합동 조사가 끝날 때까지 허가가 보류됐고, 일본의 대형항공사 JIL에서 추가 임대하려던 항공기는 정밀진단을 이유로 기한 없이 연기됐다.
자연스레 소프트퍼시픽의 경영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회장님 안에 계시죠?"
"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소프트재팬의 데스크 직원은 강준을 회장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손미영의 부친이 손주영 회장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던 듯 강준을 맞이했다.
"박강준 소장,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요즘 바쁘죠?"
"별말씀을요…… 제공해 주신 소프트퍼시픽의 일등석을 타고 편하게 왔습니다."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어쨌든 제가 박 소장을 보자고 한 건…… 박 소장이 저희 소프트퍼시픽의 주식을 매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서 말입니다."
강준은 로이즈에 사건의뢰 비용으로 받은 물량 외에 소프트퍼시픽의 주식을 추가로 사들이고 있었다.
"네, 사실입니다."
"혹시 왜 매집하신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겠죠. 주가 상승을 노렸거나 아니면 소프트퍼시픽의 경영권을 노렸거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강준의 말에 손주영 회장은 뜻 모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강준이 매집한 주식은 겨우 100억 원 규모였다. 그 정도 주식으로 경영권을 넘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영이를 내리고 본인이 그 자리에 앉을 생각이신 겁니까?"
"일단 대주주 요건은 충족했으니까요."
시가총액의 1% 이상에 해당하는 지분을 가진 대주주.
강준은 소프트퍼시픽의 대주주로서 회계장부 열람권, 임시주주총회 소집 요구권, 이사해임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경영권을 위협할 수는 없어도 경영진을 괴롭힐 수는 있었다.
"하하! 그럼 우리 미영이를 끌어내리려고 주식을 매집했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적어도 이제부터는 손미영 대표가 자기 기분에 따라 회사 경영을 하는 일은 막아야죠."
자신의 딸을 힐난하는 강준의 말에 미간을 좁히는 손주영 회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딸인 손미영을 옹호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히 견제만 하려고 했다? 그 이유로 100억 원이 넘는 돈으로 주식을 매집했다? 난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일석이조라고 해 두죠. 손미영 대표의 독단적인 경영을 막게 되면 기업실적은 회복되고 자연스럽게 주가는 올라갈 테니까요."
"하하! 이상하게 끼워 맞추시는군요. 뭐 좋습니다. 박강준 소장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잠시 침묵한 손주영 회장의 얼굴에서는 많은 생각이 스치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는 소장님의 보험조사팀은 어떻게 꾸려나갈 생각이십니까? 이번에 나도 다시 봤습니다. 보어사를 상대로 대단한 활약을 하셨더군요."
"확장을 좀 해볼까 합니다. 기존 같은 조직으로는 다변화하는 보험범죄에 대응할 수 없을 테니까요."
"성원그룹의 최은정 이사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손 회장이었다.
"……애인 사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원그룹으로부터 제가 어떤 투자도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전 솔직히 박강준 소장의 소프트퍼시픽 지분 인수에 성원그룹이 관여했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강준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손주영 회장의 생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1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인지가 궁금하셨던 거군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못 믿으시겠지만 제가 번 겁니다. 벌링턴 남작이 일본 주택보험으로 파산했을 때 전 니케이 지수 선물에 손을 댔었거든요."
"……그럼, 그때 이미 일본의 대지진을 예측했었단 말입니까?"
"당시에 크고 작은 지진이 몇 개월 전부터 계속됐고, 도쿄 인근에서 규모 9를 넘어서는 지진이 있을 거라는 전문가들의 보고서가 있었죠."
"그랬었군요……."
손주영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는 침통한 표정에 빠졌다. 자신의 딸이 한때나마 빠졌던 벌링턴 남작. 그의 파산을 막으려고 낭비했던 지난날이 떠올랐을 터였다.
"벌링턴 남작 그 인간은 로이즈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던가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더라고요. 손 회장님께서 계속 일본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지 않았나요?"
"그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당장 소프트재팬 계열사들의 재보험이 연장되지 않는다면 우리도 곤란해질 테니까요."
강준은 손 회장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성원그룹의 SS재보험은 좀 어떻습니까?"
"아직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인 거 같습니다. 물론 제가 아니라 김성호 대표께 직접 물어보셔야 하겠지만요……."
"일전의 소프트성원리의 지분 처리 문제로 좀 껄끄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전 여전히 김성호 대표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샐러리맨 출신이라 두 분이 성향이 좀 다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좋아하죠. 똑같은 사람끼리 모이면 서로 다투지 않겠습니까? 하하!"
나름 일리 있는 얘기였다. 상호보완적인 관계의 사람들이 모여야 같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 박 소장님의 의견을 잘 이해했습니다. 우리 손 대표 건에 대해서는 저도 잘 고민해 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딸자식의 일이니 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하하!"
빙긋이 웃는 손주영 회장이었다. 그는 강준과의 자리에서 소프트퍼시픽에 대한 향후 방향을 결정한 듯했다.
* * *
강준이 도쿄에 다녀온 지 일주일 후, 소프트퍼시픽의 인사가 전격 단행됐다.
독단 경영의 상징이 되었던 손미영 대표가 해임됐고, 그 자리에 손주영 회장의 가신인 김영진 전무가 임명됐다.
항공업계에서는 예견된 인사였다는 반응이었고, 추락사고 이후 곤두박질쳤던 소프트퍼시픽의 주가는 곧바로 회복됐다.
강준은 유정국 차장과 박정수 기장이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손미영 대표가 해임된 걸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보유한 소프트퍼시픽 주식을 장내에서 전량 매도했다.
+80% 수익.
을지로 보험조사팀을 디지털 회사로 업그레이드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김준혁! 일단 100억 원 박을 테니까 이걸로 데이터 기반의 어쩌고저쩌고…… 그거 만들어 봐라."
"정말 100억 원이 법인계좌로 들어오는 겁니까?"
"속고만 살았냐? 그리고 송 실장은 새로운 인력들 뽑을 준비 하고."
상기된 표정의 김준혁과는 달리 맞은편에 앉아있던 송지희가 구체적인 사항을 질문했다.
"정말 데이터 분석 회사를 만드시려는 거예요?"
"그래, 벌써 금감원하고도 얘기가 끝났어. 보험사끼리의 고객 데이터 공유에 대한 허가도 맡아 놨거든."
"허가는 맡았다지만 타 보험사가 저희한테 고객데이터를 제공할까요? 자기네 영업 DB일 텐데요……."
"대신 우리가 제공하는 분석데이터를 받아 볼 수 있게 해야지."
"그럼 우리가 얻는 건 뭐예요?"
강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아 팀원들에게 공유하지 못했던 걸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확정은 아닌데 우리 보험조사팀이 SS재보험의 자회사로 편입될 것 같다."
"와! 우리 대기업 직원이 되는 겁니까?"
"이제야 우리 어머니 소원이 이뤄지네요!"
"저도 대한민국 귀화한 보람이 있습니다!"
강준은 흥분해 들뜬 팀원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당부의 말을 이었다.
"뭐 대충 그런 셈인데…… SS재보험의 대주주가 국민연금관리공단이야.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국민의 공익을 위해 일하게 됐다고 생각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