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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항공사고 보험 (5) (233/250)

233화. 항공사고 보험 (5)

소프트퍼시픽의 인천―홍콩 노선은 예정대로 신규 취항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박정수 기장은 불편한 마음을 뒤로한 채 조종간을 틀어 런웨이에 진입했다.

―SP830, runway 03, clear for take off.

(SP830 항공기 런웨이 3번에서 이륙을 허가한다.)

박 기장은 자동비행제어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유 차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자신의 운항 중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바랄 뿐이었다.

엔진의 출력을 높였고, 항공기는 점점 가속을 내면서 양력을 일으켰다.

"인천 타워! 소프트퍼시픽 SP830편, 6천 피트에서 7,500피트로 상승 중."

―소프트퍼시픽 SP830편, 출발관제소와 교신하십시오. 굿데이!

이제 고도를 높이고 공항을 빠져나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고도계의 숫자가 떨어졌다.

"기장님! 고도가 떨어집니다."

"나도 알아!"

박 기장은 힘껏 조종간을 당겼다. 하지만 웬일인지 기체가 일부러 하강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프트퍼시픽 SP830편, 계속 고도를 상승시키십시오!

출발관제소에서 교신이 들어왔다.

"기체가 조종간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토파일럿 기능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속도를 200노트 이하로 줄이십시오!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270도 기수방향을 돌리시고. 고도가 더 하강하지 않도록 유지하십시오!

"오토파일럿 기능을 끄고 수동모드로 진입합니다!"

부기장은 긴장된 얼굴로 고도계를 바라봤다. 박 기장은 그런 그에게 긴박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부기장, 비상 교범 찾아봐! 보어사에서 제공한 비상 교범!"

"알겠습니다! 기장님!"

떨리는 손으로 비상 교범을 찾은 부기장은 고도 조종에 대한 부분을 펼쳐 들었다.

"거기 말고! 오토파일럿 기능부분 찾아봐."

"네? 자동비행제어 시스템이요?"

"그래!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기장님! 그게 뭡니까?"

"로이즈에서도 B636 기종의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있다고 했어! 그게 전력 시스템에만 문제를 끼친 줄 알았는데…… 제길!"

그때, 기체는 다시 휘청거리며 고도를 하강시켰다. 그 모습은 마치 바다를 향해 조종석이 있는 앞부분이 고꾸라지는 형태였다.

―소프트퍼시픽 SP830편, 수동으로 고도 상승이 불가합니까?

"네, 계속 기체가 앞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지금 공항으로 회항하겠습니다! 비상착륙 요청합니다!"

박정수 기장은 공군 시절 수송기를 몰았던 때부터 수천 시간의 비행 이력을 가진 베테랑 기장이었다.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수백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안전하게 활주로에 착륙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또다시 기체가 덜컹거리며 고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기장님! 추락합니다!"

"활주로까지 거리가 얼마나 돼?"

"구름 높이는 4천 피트, 구름이 많습니다. 시계 거리는 15이하입니다!"

―소프트퍼시픽 SP830편, 비상착륙 허가합니다. 지금 고도가 불안정합니다. 선회하여 다시 접근하십시오!

출발관제탑에서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가능합니다. 선회하게 되면 고도유지가 어렵습니다. 이대로 착륙합니다!"

―활주로에 비상 대피 차량 대기시켜두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행운을 빌어 주십시오……."

―……소프트퍼시픽 SP830편,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하시기 바랍니다…….

관제탑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 무거운 음성의 교신이 마지막으로 흘러나왔다.

"기장님 정말 이대로 착륙하실 겁니까?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그렇다고 바다에 빠질 수는 없잖아! 랜딩기어 내린다!"

부기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시야에서 활주로가 보였다. 고속으로 하강하는 기체, 박 기장은 기체가 받을 충격을 계산하며 착륙지점을 찾았다. 이제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야 하는 순간이었다.

* * *

―오늘 낮. 12시 인천공항에서 나리타 공항으로 이륙하던 소프트퍼시픽의 SP830편이 고도 불안을 이유로 긴급 회항해 비상 착륙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항공기 뒤편에 있던 승객 12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국토해양부는 항공사고에 대한 긴급 조사팀을 파견하고…….

집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유정국 차장은 얼음장처럼 굳어 한참을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 우려했던 사고가 현실이 된 것이었다.

자신의 군 후배였던 박정수 기장이 생존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올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SP830편의 박정수 기장과 김민태 부기장은 생존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는 멍하니 있다 정신이 번쩍 들어 급하게 옷을 챙겨입었다.

B636 기종의 현장 결함을 공개한 후, 회사에서 대기발령을 받고 있었던 유 차장이었다. 어떻게든 인천―홍콩의 장거리 노선 운항을 막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소프트퍼시픽은 보험사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 항공사를 음해해 보험요율을 올린다는 음모론을 퍼트렸고, 여론은 오히려 유 차장을 배신자로 몰았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네, 박 소장님!"

―결국 사고가 터졌네요. 지금 을지로 사무실 쪽으로 기자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유 차장님을 찾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금은 박정수 기장에게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은 유 차장은 곧바로 인천의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소프트퍼시픽의 지정병원이었기에 분명 그곳에 부상자들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파트 1층 출입구를 나서던 유 차장은 불청객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미 발 빠른 기자들이 유 차장의 자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유정국 차장님! 이번 사고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박강준 보험조사팀의 유튜브 내용처럼 B636 기종이 문제가 있었나요?"

"지난번 폭로로 인해 회사에서는 어떤 처분을 받으셨나요?"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질문을 쏟아냈다. 유 차장은 일단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생존자인 박정수 기장부터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 그는 충분히 짐작됐다.

자신이 조종간을 잡은 비행기를 추락시킨 자책감, 그리고 사망한 승객에 대한 죄책감일 터였다.

"유정국 차장님 소프트퍼시픽의 내부 배신자라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는 유 차장을 붙잡기 위해 기자 한 명이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제가 배신자라고요? 전 B636 기종에 기체 결함이 있는 걸 알렸을 뿐입니다…… 회사가 미리 조치했다면 오늘 발생한 사고 따위는 없었을 겁니다."

단호한 유 차장의 답변에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녹음했다.

그리고 유 차장의 답변은 그대로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음모론이라고 여겨졌던 을지로 보험조사팀의 유튜브 영상들은 각 방송사의 참고화면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아무도 강준의 의혹 제기를 보험사의 사주를 받은 음모라고 말하지 않았다.

* * *

소프트퍼시픽 여의도 본사.

얼굴이 창백해진 손미영은 대표실 안에서 혼자 벌벌 떨고 있었다. 사고수습을 위해 임원 회의를 열어야 했지만, 그녀는 오후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녀를 따르던 간신배 같은 참모들은 현장을 둘러본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워 버렸다.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뚜르르르!

내선전화가 울렸다.

―손 대표님, 김 전무님 오셨습니다.

"뭐…… 김영진 전무……?"

―네, 대표님과 논의할 게 있다고 오셨는데요.

"……들여보내."

손미영에게 얼마 전 물컵으로 이마를 맞았던 김영진 전무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소프트퍼시픽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손미영과 마주친 일은 없었다.

김 전무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외 투자사로부터 소프트퍼시픽의 추가 투자금을 유치하는 일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었다.

벌컥!

상기된 얼굴의 김영진 전무가 다짜고짜 들어와 대표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대표님, 당장 임원들 회의 소집하시죠."

"……지금 다들 현장 파악하러 나갔어요."

"언론 대응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평소 같았으면 김영진 전무의 잔소리에 어떻게든 맞받아쳤겠지만, 사고 소식으로 정신이 나가 버린 손미영은 김영진 전무의 말에 고분고분 답했다.

"홍보팀은 아직 대응 준비를 다 못 했어요. 기장이 생존했으니까 일단 얘기를 들어봐야죠……."

"사망자 보상대책은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해리츠 보험 측에서 처리해 줄 거예요…… 근데…… 우리 쪽의 과실 여부도 살펴봐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지금 뉴스에서 기체 결함이 있다고 난리입니다! 보셨죠?"

"네…… 봤죠."

손미영은 고개를 떨궜다. 자신만만하게 일본의 대형 항공사 JIL에서 렌트했던 B636 기종이 사고를 낼 줄은 미처 몰랐다.

유정국 차장을 비롯한 일부 기장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항공 부서 책임자인 구 이사는 단순한 불평 정도로 치부했었다.

순간 손미영의 머릿속에는 잊고 있었던 구본성 이사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누군가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다.

"구본성 이사가 보고를 엉터리로 했었던 거예요! 그 인간이 별거 아니라고 했단 말이에요…… 전문가가 그렇게 말하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손 대표님! 지금 누굴 탓할 때가 아닙니다."

침착하게 대꾸하는 김 전무였다.

"알죠…… 알아요…… 그래도 화가 난다고요! 이렇게 사고가 날 때까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손미영은 탓할 사람이 생기자 아까보다 훨씬 기운이 나는 듯했다.

"손 대표님, 우린 무조건 제조사인 보어를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그쪽에서는 조종사 과실이다 공항 관제탑의 문제다 말이 많을 겁니다."

"그렇겠죠……."

"우린 매뉴얼대로 조종사 교육을 했고 정비도 철저하게 한 겁니다."

김영진 전무는 위기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걸 손미영에게 말하고 싶었다.

"손 대표님, 우리가 이번 사고의 과실 책임을 떠안는다면 엄청난 손실이 벌어질 겁니다. 사망자 보상뿐만 아니라 항공사 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요……."

"그건 진짜…… 말도 안 되죠……."

손미영에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부친이 처음으로 본인에게 맡긴 사업이었다. 그걸 대차게 말아먹는 건 자존심이 센 손미영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김 전무님 말씀은…… 그럼 보어에 책임을 떠넘기라는 말이에요?"

"오늘 사고는 인천공항 인근에서 일어났습니다. 항공기 사고 조사는 사고가 일어난 해당 국가에서 우선하게끔 되어 있죠."

"네, 맞아요……."

"지금 보어사 쪽에서도 국토해양부에 로비가 들어갔을 겁니다. 어떻게든 우리 소프트퍼시픽 쪽의 과실을 찾아내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손미영은 한쪽 입술을 깨물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박강준 보험조사관과 손을 잡는 건 어떻겠습니까?"

"네? 말도 안 돼요! 그 인간은 우리 소프트퍼시픽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자에요!"

"대표님,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박강준이 말하는 의혹들을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보어사로 화살이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직접 보어사와 싸우는 모양새는 피하게 되겠죠."

손미영은 다리를 꼬고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희생양이 구본성 이사였다면 김영진 전무가 생각하는 희생양은 다국적 기업인 보어에 맞서는 보험조사관 박강준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금 당장 임원들 소집하죠!"

손미영은 아까와는 달리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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