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항공사고 보험 (4)
을지로 보험조사사무소.
"그러니까…… 그게 전력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문제였다는 겁니까?"
"네, 보어사에서 자사에서 생산된 모든 기종에 자동비행제어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근데 B636처럼 오래된 기종에도 일괄적으로 적용한 게 문제가 된 겁니다."
"그럼 앞으로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소프트퍼시픽도 그렇지만…… 결국엔 항공기 제조사인 보어사에서도 그 부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장인 유정국 차장도 몰랐던 부분이었다. 운항 중 출입문이 열리고 기내 조명이 나간 이유가 단순히 전력 시스템의 과부하 혹은 전력 체계의 신호 이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초지종을 알고 나자 생각보다 큰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문제가 된 사례가 있었던 겁니까?"
"작년에 벌어졌던 인도네시아에서의 이륙 사고도 수평을 잡아주는 센서에 이상이 생겨서 문제가 됐었습니다. 긴급 착륙으로 겨우 사고를 면하긴 했지만, 이미 보어사에는 보고가 들어갔죠."
"기장인 저도 모르고 있었던 사례네요."
"공식적으로 보고되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큰 대형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유정국 차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프트퍼시픽에서도 이 사안을 알고 있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문제로 사고가 나게 되면 보어사에서는 천문학적인 보상금을 물어주게 된다는 겁니다."
"……아…… 설마……."
유 차장의 짐작은 강준이 말해 주려는 그대로였다.
"소프트퍼시픽 기장들이 제기한 문제를 회사에서 뭉개는 건 만약에 피치 못할 사고가 난다고 해도 본인들이 피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경영진은 우리 기장과 승무원들뿐만 아니라 탑승객들의 목숨을 담보로 위태로운 행보를 하는 겁니다!"
"막아야죠."
강준의 단호한 말에 유 차장의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요? 손미영 대표는 제 말에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만 하는 사람으로 취급하죠."
"유 차장님, 저랑 같이 보어사에 한번 맞서 보시겠습니까?"
"네? 보어사에 말입니까?"
보어사에 맞서자는 말에 눈이 커지는 유 차장이었다. 그 순간 그는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치는 듯했다.
"꿈쩍이나 할까요? 글로벌 항공사인 데다 각국에 힘을 쓰고 있는 다국적기업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영국의 로이스 본사를 이용해야 할 것 같네요."
"로이스라면……?"
"네, 국제적인 재보험사죠. 다국적기업인 보어사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기도 하죠."
"그럼 제가 할 일은 뭐가 있을까요?"
유 차장은 한 줄기 희망의 끈을 찾았다는 눈빛이었다.
"그간 소프트퍼시픽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안전사고들을 취합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로 유 차장님께서는……."
"네, 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직 소프트퍼시픽 소속인 유 차장이었다. 그가 보어사에 맞서는 것이긴 했지만, 항공기의 결함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그건 회사와 완전 척지는 일이었다.
"항공업계가 아주 좁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좁죠. 제가 소프트퍼시픽에서 찍힌다면 다른 국내 항공사에 재취업도 힘들어질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군시절 제 부하 장교들을 소프트퍼시픽에 입사시킨 게 접니다. 최소한의 책임은 지고 싶네요."
"그게 유 차장님의…… 군인으로서의 명예인가요?"
유정국 차장은 잠깐 뜸을 들인 후 답했다.
"너무 거창하지만…… 대충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끝났으니 이제는 그가 행동해야 할 때였다.
* * *
유정국 차장이 주도한 소프트퍼시픽의 항공기 결함 문제는 처음에는 아무런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유정국 차장의 외로운 싸움으로 흐지부지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장님! 여기 또 올라왔습니다! 다른 저가 항공사에서도 기내 정전을 경험한 내용이네요."
"여기도요. 이륙 직후에 기체가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네요. 기장이 긴급 회항하면서 일단락이 나긴 했지만, 당시에 다들 공포에 질려서 죽는 줄 알았대요."
새로 개설한 을지로 보험조사팀의 유튜브 채널에는 저가 항공사와 관련한 각종 제보가 쏟아졌다. 강준이 유 차장이 후배 기장들과 함께 취합한 보어사 B636 기종의 기체 오작동 사례를 공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프트퍼시픽’이라는 항공사 명칭을 기재하지는 않았다. 아직 이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송 실장, 혹시 법원에서 우편물 온 거 없지?"
"없었어요. 왜요? 뭐 올 거 있어요?"
"어. 대충 이맘때 와야 하는 건데……."
강준이 말을 흐릴 때, 때마침 외근을 나갔던 제이콥이 서류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그건 강준이 기다렸던 내용증명 우편물이었다.
"소장님, ‘더케이 법무법인’에서 내용증명이 왔는데요?"
"그래, 역시 그놈들이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지……."
"그놈들이 누군데요?"
강준은 대답 대신 서류 봉투를 북 찢고는 안에 있는 내용증명을 펼쳤다. 그건 보어사의 한국지사에서 보낸 명예훼손 소송 내용증명이었다.
"와…… 올 게 왔네. 근데 소프트퍼시픽이 아니라 그 위에 항공기 제작사에서 온 거네. 이거 처음부터 너무 빡센 거 아닌가?"
김준혁은 강준에게 건네받은 내용증명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읽어 내려갔다.
"박강준 보험조사팀에서 제기한 B636 기종에 대한 음모론으로 인해 본사인 보어사는 크나큰 기업 이미지 실추와 그에 따른 영업 손실을 입었습니다. 고로 근거 없는 비방과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실에 대해 배상금을 청구한다…… 소장님! 우리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내용증명을 읽던 김준혁은 겁을 먹은 표정으로 강준에게 물었다.
"왜? 내용증명 받으니 쫄은 거냐?"
"그럼 소장님은 안 쫄립니까? 상대는 소프트퍼시픽이 아니라 뉴욕에 본사가 있는 다국적기업이라고요……."
"너 보어사 본사가 뉴욕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저도 걱정이 되니까 찾아봤죠……."
강준은 미리 그런 걱정까지 한 김준혁이 대견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툭툭 쳐주고는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김준혁 실장이 이제 제법 앞을 내다보며 일할 줄 알게 됐네. 다들 박수!"
"소장님, 정말 대책은 있으신 거예요?"
송지희 실장이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강준을 보며 대책을 물었다.
"대책? 있지. 김 실장! 우리 조만간 런던 출장 한 번 더 가야겠다."
"네?"
"우리가 제기한 보어사 B636에 대한 의혹들을 로이스에서 정식 보고서로 채택했어. 그걸 근거로 세계 각국에서 B636 기종에 대한 보고서도 작성될 예정인 거 같고."
"그럼, 우리가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해도 승소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런 내용증명은 그냥 겁주는 거야. 분명 보어사 한국지사 뒤에는 소프트퍼시픽이 있겠지."
그제야 팀원들의 표정이 풀렸다.
"우리가 소프트퍼시픽을 겨냥하고 있다는 걸 그쪽에서도 알고 있는 거군요."
"당연하지. 우리가 공개한 자료들 보면 전부 유 차장이 제공한 것들이잖아. 자기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눈치챘겠지."
"그래서 그런지 대한뉴스에서 애매한 논조의 기사가 올라왔더라고요."
"뭐? 대한뉴스?"
"네. 우리가 항공사를 대상으로 무분별한 음모론을 제기한다는 거죠.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보험료를 높이려는 수작이라고요……."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불거졌던 강준에 대한 의혹이 해소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날 수 있는 법이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뉴스의 언론공작은 치밀하고 정교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강준이 고꾸라질 때까지 말이었다.
* * *
영국 시티오브런던.
벌링턴 남작은 결국 강준이 보내온 B636 기종의 소프트웨어 결함을 근거로 소프트퍼시픽의 재보험 인수를 거부했다.
"남작님, 손주영 대표를 어떻게 설득한 겁니까?"
"저도 의외입니다. 솔직히…… 일본에서는 완전히 철수하는 것까지 고려했었거든요."
그는 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한결 여유가 넘쳤다. 손미영이 일전에 벌링턴 남작에게 사들였던 회사채 상환을 독촉하면서까지 압박했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원군을 만났다.
그녀의 부친 손주영 회장이 바로 벌링턴 남작의 구원군이었다. 냉정히 따져 보면 손주영 회장의 소프트재팬 그룹으로서는 아직 벌링턴 남작의 이용 가치가 남아 있었다.
친딸인 손미영이 손주영 회장에게는 아픈 손가락이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감정일 뿐이고 사업은 어디까지나 사업이었다.
더군다나 손미영이 벌링턴 남작 대신에 가져온 대안은 손 회장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밍싱보험.
얼마 전 런던 로이즈에 입성한 밍싱보험은 공격적으로 재보험 계약을 늘려 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중국 본토 국영기업의 재보험 상품이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실질적으로 밍싱보험이 앞으로 중국 시장을 독점한다는 것에 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했다.
로이즈에서도 밍싱보험이 가져오는 재보험 계약이 무척 불투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간 직접 투자를 받은 것과 중국 시장의 독점적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좌우간 소프트퍼시픽은 이제 별다른 소리를 못 할 겁니다. 이걸 보면요……."
벌링턴 남작은 옆에 함께 자리한 에드워드 심사역을 한번 바라보고는 강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건 보어사에서 기체 결함을 인정한다는 문서였다.
"보어사에서 이렇게 쉽게 인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쉽게 된 거 아닙니다. 미스터 박이 보내준 자료를 토대로 각국 항공사들에 재보험 갱신 시에 요율이 인상될 수 있음을 통보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그 항공사들에서 보어사에 해명을 요청했더라고요."
"자기네들은 아니라고 잡아떼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물론 그랬죠. 근데 소프트퍼시픽의 기장들이 보내준 영상 자료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륙 때 흔들리는 기체를 보더니…… 입장을 번복하더라고요. 그 현상이 인도네시아에서의 사고 영상이랑 똑같았거든요."
옆에 있던 에드워드 심사역도 말을 보탰다.
"로이스 경영진도 그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보어사를 압박했습니다. 어차피 B636 모델은 이미 퇴역한 모델을 재활용한 기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어사로서도 너무 힘을 빼면서까지 각을 세우고 싶지 않았겠죠."
강준은 에드워드 심사역을 돌아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소프트퍼시픽의 새로운 재보험사는 어딥니까? 혹시 밍싱보험입니까?"
"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요. 이제는 여기 로이즈 시장에서도 제일 큰 고객이 밍싱보험이 됐습니다."
에드워드는 맘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이로써 로이즈가 의뢰한 소프트퍼시픽의 조사 건은 마무리가 된 듯싶었다.
"에드워드 심사역 님, 그럼 조사비용 잔금은 제가 받아 갈 수 있을까요?"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한번 직접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옆에 있던 김준혁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드워드가 내미는 걸 지켜봤다. 그건 파운드화로 된 현금이 아니라 한국어로 쓰인 주식양도계약서였다.
"말씀하신 소프트퍼시픽의 주식입니다. 벌링턴 남작으로부터 저희 로이즈가 인수한 주식을 그대로 내어드리는 겁니다."
소프트퍼시픽에 벌링턴 남작의 지분도 들어가 있었던 거였다. 김준혁은 작게 속삭이며 한국어로 물었다.
"소장님, 왠 소프트퍼시픽 주식입니까?"
"내가 아는 손미영은 어려움이 닥치면 피하고 도망치는 스타일이거든. 아마 그때가 되면 시장에 소프트퍼시픽이 매물로 나올 거다. 난 그때를 노려 이걸 팔아서 수익으로 실현할 거고."
김준혁은 그제야 강준에게 한 수 배웠다는 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