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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화. 항공사고 보험 (2) (230/250)

230화. 항공사고 보험 (2)

"다시 뵙게 되네요."

준수한 외모에 자신감 있는 말투, 그리고 적당한 친화력. 찰스 벌링턴 남작은 예의 그 환한 잇몸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강준은 악수에 호응하며 동시에 그의 기억도 읽어 냈다. 그는 결혼한 유부남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런던 시내의 한 멘션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소파에서 자는 그의 앞 테이블에 빈 위스키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각종 청구서와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과 약병도 보였다. 그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족 출신의 부유했던 그의 처지는 생각보다 심각한 듯했다. 어쩌면 그는 방탕한 자신의 삶에 지쳐 버린 건지도 몰랐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스마트폰에 뜬 발신자에는 ‘미영’이라는 한국 이름이 영문으로 떴다.

"젠장! 찰거머리 같은 여자 같으니라고!"

아직 술에서 덜 깬 벌링턴 남작은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미영! 왜? 왜 자꾸만 보채는 거야!"

―내가 보챈다고요? 찰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지금까지 내가 메꿔준 당신 자금이 얼마인지나 알아?

"알지… 알아!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당신한테 끌려다니는 거고 말이야!"

거칠게 말을 내뱉은 벌링턴 남작은 스마트폰을 반대편 귀로 가져갔다.

―보어사에서 추가로 항공기 들여오기로 했어. 그거 추가로 계약하면 자기한테도 돈이 좀 될 거야.

"미영! 그 기종 문제가 많다는 거 몰라? 작년에도 인도네시아 상공에서 문제를 일으켰다고! 혹시나 사고라도 나봐. 난 파산이라고!

―그건 자기 문제고. 알아서 판단해. 일본 사무실을 접든지 아니면 우리 항공보험 재보험으로 인수해 주던지. 해리츠에서 담당자가 런던으로 갈 거야. 다음 주까지 도장 찍어 주는 걸로 알고 있을게.

"미영! 잠시만 내 말 들어봐……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미영? 미영……? 제길!"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린 손미영이었다. 벌링턴 남작은 손에 쥔 스마트폰을 쇼파에다 던져 버렸다.

"주택 재해보험 때 파산하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지게 부활하셨군요."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준은 벌링턴 남작에게 반어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동일본대지진으로 파산한 신디케이트로 그가 도망치듯 일본을 떠났던 걸 지적하려는 의도였다.

"네, 파산했었죠. 근데 이렇게 다시 로이즈 본사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있네요."

사뭇 여유가 넘친다는 투의 벌링턴 남작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지금 해리츠 보험의 항공보험 담당이 이곳으로 오고 있지 않나요?"

강준의 말에 낯빛이 변하는 그였다.

"이미 정보를 접하고 계셨군요. 누가 말해 준 겁니까?"

"우리 보험조사팀의 정보력이라고 해 두죠."

"흠…… 손미영이 얘기한 대로 끈질긴 구석이 있으시군요."

강준은 함께 온 에드워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분명히 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아까 분명 비밀조사를 제게 요청하셨죠? 그 비밀조사의 원칙은 지킬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건 제가 사건을 의뢰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에드워드 씨는 여기 벌링턴 남작이 손미영과 내통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신가요? 이미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만난 것이 손미영에게 정보가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벌링턴 남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벌링턴 남작은 저와 같은 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연히 정보가 샐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강준은 김준혁 실장을 돌아보며 눈짓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김준혁은 둘러메고 있던 백팩에서 뭔가를 꺼냈다.

"녹화가 가능한 안경입니다. 벌링턴 씨가 이 안경을 쓰고 해리츠 보험의 인사를 만난다면 저도 이번 사건에서 벌링턴 남작을 한편으로 신뢰하고 뛰어들 수 있을 거 같군요."

"나보고 이런 짓까지 하라는 겁니까?"

얼굴을 붉히는 벌링턴 남작이었다.

"지금이라도 내키지 않으신다면 조사 의뢰를 철회하셔도 됩니다. 저야 소프트퍼시픽이 어찌 되건 벌링턴 공작께서 어떻게 되건 상관없는 사람이니까요."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강준은 벌링턴 남작이 나중에 딴소리할 수 없도록 묶어 둘 생각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동일본대지진으로 신디케이트가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본인만 살려고 본국으로 먼저 튀어 버린 인간이었다. 물론 손주영 회장이 다시 그를 구제해 주긴 했지만 말이다.

강준은 이번에도 벌링턴 남작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을 돌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리츠 보험 한국지사장이 직접 올 겁니다. 재보험 계약을 위해서요. 그전에 미스터 박, 당신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시간을 벌어야죠. 벌링턴 남작님이 필요한 게 그거 아니었나요?"

강준의 되물음에 입을 다무는 벌링턴과 에드워드였다. 둘은 이미 강준에게 사건을 맡긴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건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자는 취지였다.

"당신네 보험조사팀에 무슨 대안이라도 있는 겁니까?"

에드워드는 애초에 사건을 의뢰한 최은정에게 물었다.

"잘해낼 거예요.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으니까요. 중요한 건 여러분들이 미스터 박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 거예요."

최은정의 단호함에 그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강준은 말없이 그들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건 어두컴컴한 기내 사진이었다.

"이…… 이게 뭐죠?"

에드워드는 설명을 요구했다.

"얼마 전 제주도로 가던 소프트퍼시픽의 항공기의 기내 사진입니다. 어느 승객분이 찍은 사진이더군요. 당시에 자동비행제어 시스템인 오토파일럿 기능이 멈췄고, 기체 내부의 전력이 공급되지 않았어요. 다행히 기장이 직접 수동으로 제주공항까지 무사히 착륙시켰지만, 승객들은 한 시간 내내 공포에 떨어야 했죠."

"이게 진짜 소프트퍼시픽 항공기의 기내 사진이란 말입니까……?"

에드워드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사진을 받아 들었다.

"최 이사님이 방금 그러지 않았나요?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한다고요."

사실 런던으로 출장을 오기 한 달 전부터 최 이사의 언질을 받은 강준의 보험조사팀은 소프트퍼시픽에 대한 조사업무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서서히 유력한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 * *

영종도 소프트퍼시픽 사무소.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유정국 기장은 머리가 지끈 아팠다. 아무리 봐도 운항을 마친 SP1830편의 전원공급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본사는 SP1830편의 정밀 정비를 위해서는 일본까지 항공기를 보내야 한다고 통보했다.

일본의 대형 항공사 JIL로부터 임대한 비행기라 정비창도 그쪽 정비창을 이용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유정국 기장에게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지만 회사의 지시는 자신들의 절차와 원칙을 더 우선시하겠다는 거였다.

"오 대리, 안에 이사님 계신가?"

"이사님 지금 손님 찾아오셔서 미팅 중이십니다."

운항 부서를 책임지는 구본성 이사는 본인이 대형 항공사에서 미주노선을 운항했다는 걸 평소에 자랑처럼 여기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군에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복무했던 유정국 기장에게는 묘한 경쟁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소프트퍼시픽이 설립될 당시에 구 이사는 자신이 일하던 한국항공으로부터 후배들을 대거 데려왔고, 유정국 기장은 공군 출신의 기장들을 데려왔다.

하지만 이미 민간 항공사에서 경험이 많은 구 이사가 운항 부서 책임자가 됐고, 유정국 기장은 자연스레 차장 직함을 달고 구본성 이사의 아래에 배치됐다.

철저한 계급 사회인 군에 복무했던 유정국 차장이었지만, 구본성 이사 밑으로 가게 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심 오랜 복잡한 민간 회사의 사내 정치에서 한걸음 떨어져 조종사로서의 업무에만 신경 쓰는 상황이 꽤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틀렸음이 드러났다. 유 차장이 직접 인천과 제주노선을 운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구 이사님! 난 이대로 계속 운항 못 합니다. 비행 중에 문이 열렸다고요! 그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십니까? 승무원이 밖으로 빨려 나갈 뻔했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이미 보고를 받았고요. 근데 정비사 말은 좀 다르던데요?]

[네? 다르다고요? 뭐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임시로 조치를 하면 인천까지 되돌아오는 건 큰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이거 혹시 비용 아끼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예정대로 운행 시간표 소화 못 하면 지연 비용 물어야 하니까요.]

[……아, 그건 오해고요.]

유정국 차장은 비행 중 출입문이 열리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20년이 넘은 노후 기종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금방 위험에 봉착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근데 문제는 발생한 위험에 대한 사측의 대처였다. 운항 책임자라는 구 이사는 제주도에서 SP1830편을 정비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모양이었다.

정비사가 임시조치라고 말한 걸 확대해석한 게 뻔했다. 유 차장은 제주도 공항의 정비책임자에게 직접 확인까지 마친 상태였다. 정비사도 인천까지의 회항에 우려를 표했었다.

다만, 정비사가 임시로 문을 고정해 둘 수는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날 유 차장은 우여곡절 끝에 인천으로 회항하긴 했지만, 그날 일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조종사 생활에서 최악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무실로 오겠다는 얘기 전달했어요?"

"……네, 전달은 했는데……."

오 대리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운항 부서의 직원들도 구 이사와 유 차장의 갈등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구본성 이사가 부서 내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걸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었지만, 그의 횡포와는 무관하게 그가 회사 경영진에 얼마나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지도 동시에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안에 아무도 없지?"

"아… 아닙니다. 그건. 아까 해리츠 보험 쪽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거긴 왜?"

"별일 아닙니다. 자주 오시는 분이시라 간담을 나누는 걸 겁니다."

유 차장은 난감했다. 맘먹고 사무실로 와서 구 이사와 한판 붙어보려고 했는데 외부 인사가 온 자리에서 그런 민망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구본성 이사가 한심하고 또 한편으로는 밉기도 했지만, 어쨌든 같은 회사 사람이 아닌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정국 차장님, 제가 차라도 한잔 내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내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탕비실 가서 내가 타 먹지 뭐."

"그럼 같이 가시죠. 저도 마침 우롱차를 내리려고 했거든요."

"그래?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이네."

"네 입사한 지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습니다."

유정국 차장에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여직원은 소프트퍼시픽에 잠입한 송지희 실장이었다. 단 며칠이었지만 송지희는 특유의 붙임성으로 조직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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