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항공사고 보험 (1)
영국 런던.
강준은 김준혁 실장과 함께 로이즈 빌딩을 향해 걸었다. 로이즈 빌딩은 영국의 금융회사들이 집결한 시티오브런던의 한가운데 있었다.
"소장님, 이렇게 콧바람 쐬니까 기분이 날아갑니다!"
"그래? 자주 데리고 나와야겠네. 나도 김 실장이 그간 사무실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최근에는 동영상 편집이다 뭐다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갔잖아?"
"알아주시니 다행이네요. 근데 우린 언제 이렇게 커집니까?"
김준혁은 쟁쟁한 글로벌 회사가 몰려 있을 것 같은 런던의 고층빌딩들을 가리켰다.
"보험조사업무가 조직이 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어쨌든 보험업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보조적 지위에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이제 보험조사 업무를 예전처럼 발로만 뛰어서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현장이 조사업무의 시작 아니야?"
"보험계약자들의 보험상품 가입 이력과 청구 내역만 알 수 있으면 보험사기를 미리 방지할 수 있는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그리 먼 얘기는 아니거든요."
"…미리 방지한다고?"
강준은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의아하다는 듯 김준혁을 돌아봤다.
"네, 사람들이 보험사기를 실행하는 건 그만큼 상품구성에 구멍이 있다는 거거든요. 애초에 그런 구멍을 만들지 않으면 보험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없게 되는 거죠."
"꿈같은 얘기네…."
"꼭 꿈만은 아닙니다. 각 보험사가 고객정보를 투명하게 내놓고, 그걸 안전하게 통합해서 관리한다면 그런 시스템이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겠죠."
강준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쳤다. 회귀 전 보험사기가 앞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모여 공모하는 방식으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김준혁이 얘기하는 보험사기 방지 시스템이 전혀 현실성이 없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걸 4명의 팀원이 있는 보험조사팀에서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하긴 이제 세상이 디지털로 변하긴 했지…."
강준은 김준혁이 자신의 업무에만 파묻혀 살았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인제 보니 을지로 보험조사팀의 미래는 김준혁에게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 저기 최은정 이사님이신데요?"
최은정이 강준 일행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런던 출장은 전적으로 최은정이 주선한 비즈니스 때문이었다.
세계 최대의 재보험사 로이즈에서 직접 강준에게 보험조사를 의뢰한 것이었다. 그건 한국에 새로 설립된 손미영의 저가 항공사 소프트퍼시픽에 대한 안전성 조사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맘고생이 심했죠?"
몇 주간 런던에 체류하고 있었던 최은정은 강준에게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가 한국에서 어떤 모함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먼저 매를 맞고 면역이 생겼으니 좋게 생각해야죠."
"이번 기회에 병원협회나 보험협회가 정말 구제 불능이라는 게 밝혀진 건 덤이고요."
최은정이 입술을 살짝 내밀고는 웃었다.
"해리츠 보험은 이제 협회에서 힘이 좀 떨어지겠군요."
"그렇지도 않나 봐요. 해리츠 보험 본사가 역사가 깊잖아요. 아무리 한국지사가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켜도 그 정도 일에는 흔들리진 않겠죠."
"그래도 이번에 소프트퍼시픽 손미영 대표 때문에 해리츠 보험 본사도 속 좀 썩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저한테까지 조사가 들어왔으니 그쪽에서도 긴장하겠네요."
강준의 말에 최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로이즈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이즈에서 이번에 해리츠의 항공사고 보험 인수 건을 고민한다는 건 이미 해리츠의 신뢰도에 큰 타격이 있다는 거죠. 게다가…."
"또 뭐가 있습니까?"
"네, 해리츠 항공사고 보험을 인수한 로이즈 네임이 찰스 벌링턴 남작이에요. 딱 감이 오시죠?"
"두 사람 헤어진 거 아니었습니까? 도쿄에 손미영을 두고 도망친 사람이 찰스 벌링턴이잖습니까?"
강준의 되물음에 쓴 웃음을 짓는 최은정이었다.
"남녀 간의 일은 둘만 빼고는 모르는 법이죠. 혹시 알아요? 로이즈 네임인 찰스 벌링턴이 다시 필요해져서 손미영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했을 수도 있는 거고요."
"최 이사님 말씀이 얼추 맞겠네요."
셋은 배관이 모두 드러난 독특한 외관을 지닌 로이즈 빌딩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갈까요?"
"와! 여기가 바로 1600년대부터 활동했던 로이즈 보험의 본산이군요!"
"소장님, 저도 감동입니다!"
강준과 옆에 있던 김준혁이 함께 감탄했다. 1층으로 들어가자 중앙홀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보험을 중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관이네요."
"김 실장님, 저기 가운데 종 보여요?"
"네? 종이요?"
최은정이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서양식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게 뭡니까? 이사님?"
"1799년 네덜란드 해역에서 ‘루틴 호’가 침몰했어요. 그 배에 엄청난 양의 금괴가 실려있었거든요. 로이즈 조직에서 당시에 그걸 보상하느라 엄청난 손실을 봤죠. 그 사고를 기억하기 위해서 저 벨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벨의 이름이 루틴 벨(Luthine Bell)이에요."
강준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벨을 넋 놓고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최은정을 향해 걸어왔다. 최은정이 귓속말로 그를 먼저 소개했다.
"로이즈의 동아시아 심사팀을 총괄하는 에드워드 심사역이에요. 소프트퍼시픽의 항공보험 언더라이팅 보고서에 큰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에드워드 심사역이 최은정을 향해 영국식 영어로 절제된 인사를 했다.
"당신이 보험조사관 박강준이로군요."
"편하게 박 다니엘, 아니 다니엘 박으로 불러주시죠."
강준의 너스레에 최은정이 입을 가리고는 피식 웃었다.
"전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 각국의 해상보험과 운송보험, 그리고 항공기보험을 담당해왔습니다.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중개한 보험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죠."
시작부터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에드워드였다.
"근데 이렇게 저같이 구멍가게 같은 보험조사팀을 부른 이유가 따로 있으시겠죠?"
"얼마 전 당신이 한국에서 소프트퍼시픽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한국의 보험협회를 움직이는 배후라고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소프트퍼시픽의 항공사고 보험을 독점하고 있는 해리츠 보험이 보험협회를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해리츠 보험은 오랜 전통이 있는 보험사입니다. 우리 로이즈로서도 해리츠를 신뢰하지 않을 순 없는 거고요."
에드워드는 서구의 오랜 보험사인 해리츠에 대한 신뢰가 깊어 보였다.
"그럼 해리츠가 가져온 항공보험을 인수하면 되지 않습니까? 에드워드 씨도 해리츠의 언더라이팅 보고서를 믿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정곡을 찌르는 강준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우리가 해리츠를 신뢰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뭐든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죠. 전 이번 소프트퍼시픽의 항공보험에 대한 조사를 당신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조건만 좋다면요."
그 모습을 본 김준혁이 몸이 달았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걱정하지 마시게. 예의상 한번 빼 본 거니까.’
"비용적인 부분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드리겠습니다. 다만,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시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최대한 맞춰주는 게 저희 보험조사팀의 원칙이니까요."
강준의 말에 김준혁이 최은정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사님, 전 금시초문인 원칙인데요?"
"인제 보니 강준 씨가 영업력도 꽤 있네요. 저렇게 대놓고 사기를 치고…."
최은정은 티 나지 않게 피식 웃었다.
"로이즈 경영진에서는 해리츠 보험이 우리가 의구심을 갖고 조사를 한다는 걸 몰랐으면 합니다. 오랜 양사 간의 우정과 협력을 손상하기를 바라지 않거든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저희도 로이즈의 이름을 팔 수 없으니 조사가 쉽지는 않겠네요."
"쉬운 일이면 저희가 미스터 박에게 조사 의뢰를 하지 않았겠죠."
냉철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해오는 에드워드였다. 강준은 그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자! 여기까지 오셨는데 로이즈 본사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리죠. 이 건물이 1978년에 지어졌다는 건 아십니까?"
"유서가 깊은 건물이네요."
"당시에는 시티오브런던의 랜드마크였죠. 이곳에서 로이즈에 등록된 네임과 신디케이트들이 보험상품을 거래합니다."
"저도 여기 오기 전에 이곳에 대해 찾아보니 최근에 이 건물이 팔렸더군요. 중국계 보험사에 매각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중국계 자본인 밍싱보험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런던 금융가의 로이즈 빌딩을 사들인 것이었다.
"네, 아쉽지만 사실입니다. 중국인들의 부동산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더군요. 저희 말고도 런던의 많은 고층빌딩도 매각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강준의 말에 김이 새버렸는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서는 말이 없어졌다. 그 어색함을 깨는 건 최은정이었다.
"찰스 벌링턴 남작도 이곳에 자주 출몰하겠군요."
"전 벌링턴 남작과는 별 친분이 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가 일본에서 꽤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요."
"소프트재팬의 기업보험들을 인수했기 때문에 그랬겠죠. 그리고 그건 소프트재팬 손주영 회장의 딸을 구슬려서 영업한 거였고요."
최은정은 찰스 벌링턴에 대해 박하게 평가했다.
"실은 얼마 전 벌링턴 남작을 만났습니다."
"뭐라던가요? 해리츠에서 넘어온 보험상품을 잘 심사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던가요?"
"아뇨. 반대였습니다. 항공기 제조사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최은정은 자신이 예상과는 다른 에드워드의 말에 내심 놀란 기색이었다.
"소프트퍼시픽이 도입한 기종인 B636 기종인데, 최근의 사고 이력에 대해 제조사인 보어 측에서 제대로 된 자료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 보험상품의 보험요율이 올라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하하! 벌링턴 남작은 로이즈 네임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사람입니다. 얕은수를 써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 겁니다. 오히려 심사 때 꼬투리가 될 만한 것들은 미리 털어놓고 해결하겠다는 거겠죠."
강준은 둘의 대화를 곰곰이 듣고 있었다.
"그럼 에드워드 씨는 벌링턴 남작이 해리츠 보험과 입장 차가 있다는 겁니까?"
"그렇죠. 벌링턴 남작으로서도 각별한 사이인 손미영의 부탁이었을 테니 해리츠 보험의 재보험 인수를 거절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최은정이 파악한 바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찰스 벌링턴은 손미영과 손잡고 부실 보험을 어물쩍 통과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찰스 벌링턴으로서는 일본 사업의 영업권을 쥐고 있는 손미영에게 부실 보험상품을 억지로 떠안은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불만이 많을 찰스 벌링턴이었다.
"하하! 자기 말을 하는 걸 알았는지 저기 모습을 보였네요."
고층 복도를 걷던 에드워드는 1층 중개소에 등장한 찰스 벌링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준이 일본에서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인 벌링턴 남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