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음해 (5)
포이펫(Poipet) 호텔 카지노.
박준식은 벌써 10시간째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바카라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 쌓아놓았던 칩 뭉치는 눈 녹듯 사라졌고, 이제는 5불짜리 칩 몇 개만 남은 상황이었다.
작은 체구의 딜러는 능숙한 솜씨로 카드를 섞고는 박준식에게 카드를 건넸다. 이번에는 꽤 괜찮은 패였다. 에이스 한 장과 8 클로버, 합치면 아홉 끗이다.
벌써 박준식은 자신이 가져온 1억 원의 절반 가까운 돈을 일주일도 안 된 사이에 날려 먹었다. 원래는 그 돈으로 적당한 시기에 한국에 돌아가 리무진 사업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틀려 버렸다. 이대로 간다면 한동안 동남아에서 버틸 돈조차 떨어져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많이 따셨어요?"
그때, 박준식의 뒤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이곳 포이펫에서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국인이었다.
"네…… 뭐…… 그냥 그렇죠."
반갑기보다는 경계심이 먼저 드는 박준식이었다. 그는 한국의 기자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야…… 한국에서 큰돈을 가져오셨다고 들었는데, 역시 게임도 VIP룸에서 노시네요?"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인은 대한뉴스 보도국장 장선우였다.
"네? 절 아세요? 그쪽은 놀러 오신 거예요?"
"아뇨, 전 일하러 온 건데요?"
장선우를 힐끗 한번 쳐다본 박준식은 얼마 남지 않은 칩을 챙겨서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이렇게 피해 다닌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요."
그 순간 박준식은 장선우가 누군지 깨달았다. 아내인 김유정이 기자를 만났다며 녹음한 음성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대한뉴스 기자님……?"
"이런 데서 신분을 밝히기는 좀 그렇고요. 나가서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지금 술 마실 기분은 아닌데요. 저한테 무슨 용건 있으세요?"
태연히 딜러가 건네는 칩을 받아 챙긴 장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준식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쳤다. 무례한 그의 행동에 박준식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판을 짤 때는 서투르게 짜지 않거든요. 빈틈 여기저기 구멍이 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땜빵을 메꾸듯이 메꾸러 다닙니다. 저도 지금 그 땜빵을 메꾸러 온 거고요."
박준식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VIP룸 바깥에도 같은 한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뭐 문제 될 게 있어요? 한국 여론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거 아닌가? 오히려 내가 여기 있는 게 대한뉴스 쪽에는 좋을 텐데?"
"물론 당신이 여기저기 입을 놀리면서 괜한 빌미를 남기는 것보다야 그편이 훨씬 좋죠. 근데…… 박준식 씨가 참 쓸데없는 짓을 했더라고요."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장선우는 얼굴이 굳은 박준식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녹음 파일 갖고 있다던데?"
"……무…… 무슨 녹음이요? 난 모르는 얘기인데?"
시치미를 뗐지만 이미 박준식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돈까지 처먹어 놓고서는…… 쯧! 얼른 내놔요. 그리고 그 파일 공개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나 본데. 당신 아들…… 죽어."
귀에다 속삭이는 장선우의 말에 박준식의 얼굴이 굳었다.
"씨발! 어디서 협박질이야! 당신들 다 까발려져서 탈탈 털리고 싶어!"
그는 큰소리를 한 번 치고는 도망치듯 카지노를 빠져나왔다. 장선우가 쫓아오지는 않았지만, 호텔 복도를 걷는 박준식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객실 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뛰듯이 본인의 객실을 허겁지겁 찾았다.
박준식은 노트북에 저장된 녹음 파일을 이메일로 옮겨둘 생각이었다. 장선우의 말을 거꾸로 해석해 보면 녹음 파일만이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열쇠를 구멍에 맞추고 두세 바퀴를 돌렸지만, 객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젠장…… 왜 이게 안 열리는 거야!"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멀리 엘리베이터에 누군가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박준식은 무작정 반대편으로 열쇠를 돌렸다.
철커덕!
드디어 문이 열렸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콕에서 강준을 조사했던 국정원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박준식의 짐을 모조리 뒤진 후였고, 녹음 파일이 들어있는 노트북도 그들의 손에 있었다.
"박준식 씨,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당신은 국가 기밀을 탈취한 혐의로 조사 대상에 올랐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따라 긴급 체포합니다."
"네? 무슨 기밀요? 말도 안 됩니다. 제가 무슨 기밀이 있다고요!"
"최근에 이곳 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국인에 대한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황당해서 입이 쩍 벌어지는 박준식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사람들이 객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준과 제이콥, 그리고 방콕의 한인 여행가이드 피터 장이었다.
"잠깐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혐의로 사람을 긴급 체포한다는 겁니까?"
강준의 등장을 목격한 국정원 요원이 무섭게 인상을 구겼다.
"박강준 씨,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건 엄연한 공무집행 방해죠."
"전 김유정 씨 부탁으로 남편인 박준식 씨를 만나러 온 겁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외제 차 판매원이던 박준식 씨가 간첩으로 둔갑한 이유가 뭡니까? 이런 식으로 국정원에서 민간인을 막 체포해도 되는 겁니까?"
이마가 널찍한 남자는 이번 일의 책임자인 탁 과장이었다. 그는 자신을 몰아세우는 강준을 향해 레이저 같은 눈빛을 날리고는 부하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이 노트북은 증거물로 압수합니다……!"
뚜벅뚜벅.
탁 과장은 박준식을 향해 걸어와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만약 여기서 증거가 발견되면 내일 아침에 당신을 한국으로 압송하겠습니다.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탁 과장과 국정원 요원들이 나가고 나자 힘이 풀렸는지 박준식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게, 이게 뭡니까? 마누라 두고 혼자 도망 와서 이 꼴을 당하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강준의 비아냥거림에 박준식은 한번 노려볼 만도 했지만, 국정원 요원들이 들이닥친 일에 너무 놀라서인지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카지노에서 돈도 꽤 잃으셨겠군요."
"……도박에서 돈이야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박준식이었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계속 도망 다닐 겁니까?"
"저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요…… 언론에다는 마누라가 말한 건데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냐고요!"
"김유정 씨가 다 실토했습니다. 1억 원을 대가로 해리츠 보험에 넘어가서 거짓으로 말한 거라고요. 그걸 국내 언론들이 받아쓴 거고요."
아내가 다 말했다는 얘기를 들은 박준식은 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을 걸고 협박해 오는 대한뉴스 쪽 사람들과 자신이 배신하고 도망쳐 온 아내 김유정, 그리고 자신을 긴급체포하겠다고 들이닥친 국정원 요원들…… 박준식은 자신이 벌인 일에 비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아까 카지노에서 대한뉴스 사람을 봤어요……."
"저를 모함하려는 기획을 대한뉴스에서 했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윤태영 실장에 대한 녹취록을 회수하러 왔을 겁니다."
"……그건 또 누구한테 들은 겁니까?"
"당신 아내인 김유정 씨한테서요."
강준의 말을 들은 박준식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건 그 녹취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준식은 문제가 생기면 일단 회피하고 보는 성격이었다. 이번에도 위기를 넘기려면 그 녹취록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휴우…… 좋습니다. 녹취록 저한테 있습니다. 근데 그거 넘기면 얼마 주실 겁니까?"
위기의 상황에서도 딜을 하려는 박준식이었다. 그는 외제 차를 영업하면서 갈고닦은 실력을 강준에게 발휘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준이 타인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알지 못하는 그였다. 녹취록을 빌미로 한 딜에서 맹점은 녹취록의 행방이 밝혀지면 그대로 끝이라는 거였다.
"제이콥! 피터 사장님! 이 사람 신발 좀 벗겨 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요!"
제이콥은 강준이 그의 발바닥이라도 때리려는 줄 알고 피터 장과 함께 양쪽에서 그의 종아리를 꽉 쥐고 신발을 벗겨 냈다.
하지만 강준은 벗겨진 신발 안쪽 창을 끄집어냈다.
"아휴, 무척 가까운 곳에 숨겨 두셨네요."
"뭐…… 뭡니까? 이게! 남의 재산을 이런 식으로 강탈하는 건 절도입니다! 절도!"
신발 안에서 나온 건 작은 USB파일이었다. 해리츠 보험 윤태영 실장과의 녹취록은 그의 노트북에도 있었지만, 동시에 보험처럼 본인의 몸에도 지니고 다녔던 거였다.
"해리츠 보험에서 돈을 받고 저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퍼트린 점은 괜찮고요?"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한 건 김유정 씨지만 돈을 챙긴 건 당신이죠. 고로 둘은 공모한 겁니다."
고개를 푹 숙인 박준식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호…… 혹시…… 제 마누라가 말해 준 겁니까? 신발 속에 USB가 있다는 거……."
"김유정 씨한테 말한 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럼 아니겠죠."
USB를 손에 쥔 강준은 그를 호텔 방에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박준식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대로 가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왜요? 더 볼일이 남았나요……?"
"국정원 놈들도 그렇고…… 대한뉴스 놈들도 그렇고……."
"불안하시면 저랑 같이 가시죠.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신변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궁색해진 입장의 박준식은 답변을 미룬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가서 김유정 씨한테 무릎 꿇으시죠. 혹시 압니까? 아들을 봐서라도 용서해 줄지……."
박준식은 말없이 방에 남아 있던 자신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짐가방에 집어넣었다.
"피터 사장님, 여기서 제일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태국 국경을 넘었으니 차라리 여기 캄보디아의 씨엠립으로 가는 게 제일 빠르겠네요. 거긴 한국행 비행기도 많으니까요."
"박준식 씨, 얼른 짐 챙기세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제이콥이 강준에게 한국에서 온 전화를 건넸다.
"소장님, 함지훈 기자 전화입니다."
강준은 제이콥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함 기자님. 지금 박준식한테서 그 녹취록 확보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국정원이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반박 기사를 써 주실 겁니까?"
―써야죠. 팩트를 쫓는 게 기자의 책무니까요.
"만약 저에 관한 반박 기사를 쓰시게 되면 정계 입문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번 일에는 대한당과 민한당 양쪽이 모두 걸려 있는 문제니까요."
잠시 통화음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깟 정치 안 하면 되죠. 그런 식으로 정치권에 들어가봤자 이용만 당할 테고요.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십니까?"
―네, 어쨌든 전 기자니까요.
‘기레기’라는 비아냥을 듣는 언론지형에서 함지훈 기자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간은 때때로 어리석어 보이는 결정을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