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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음해 (4) (226/250)

226화. 음해 (4)

태국 방콕.

"찾는 분이 국경 카지노에 있다네요."

피터 장은 더워 죽겠다는 듯 연신 부채를 흔들며 노천카페로 들어왔다. 강준은 해리츠 보험에서 받은 1억 원을 들고 태국으로 온 박준식을 찾고 있었다.

김유정의 남편 박준식. 그는 한국에 아내와 아이를 남겨 두고 혼자 태국으로 입국했다.

그가 원래부터 이렇게까지 도망쳐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김유정과의 이혼을 생각했던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아내와의 연락도 차단한 채 돈만 가지고 태국으로 입국했다.

[그 인간 핑계는 기자들이 자기한테 달라붙었다는 거예요! 나도 괴로워요!]

박준식이 김유정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은 당사자인 김유정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대한뉴스의 인터뷰 기사가 나간 이후 말 그대로 멘붕에 빠져 버렸다. 매일같이 기자들이 집 밖을 지키고 있었고, 그 와중에 남편은 자신이 양심을 판 1억 원의 대가를 들고 튀어 버린 거였다.

"피터 사장님, 이제 조만간 그 쓰레기 같은 인간하고 만나게 되겠네요."

"근데 저도 거기까지 같이 가야 하는 건가요?"

"그럼 저희만 보내려고 하셨습니까? 같이 가시죠. 비용은 얼마든지 댈 테니까요."

능글맞은 피터 장은 비용 얘기를 마치더니 강준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전 박 소장님을 믿었습니다. 한국 TV에서 아무리 박 소장님이 뇌물을 먹었다 뭐다 해도…… 전 제 주변에 절대 그런 사람 아니라고 얘기하고 다녔다니까요?"

보다 못한 함께 온 제이콥이 나섰다.

"피터 사장님, 박준식이 거기서 돈을 많이 잃었답니까?"

"아직 VIP룸에서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아직 다 잃지는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소장님, 박준식이 돈 떨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 오늘 밤은 여기서 좀 놀다 가면 안 됩니까?"

제이콥의 말에 피터 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여기 좋은 클럽들 많지. 어차피 나도 거기까지 갈 차량도 구해야 하니까 시간 걸려요."

"지금 타고 다니는 차로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에이, 그 동네 비포장도로도 있어서 제 차로는 못 갑니다. 중간에 퍼지면 정말 난감해지는 거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죠. 제이콥 너도 놀고 싶으면 나갔다 와라."

강준의 말을 들은 제이콥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 피터 사장님이랑 맥주 한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근데 같이 안 가시렵니까?"

"다녀와. 난 할 일이 좀 있다."

"무슨 일이요?"

"김유정이 여길 온다고 해서 말이지……."

"여기 방콕까지 말입니까?"

"아직은 몰라. 갑자기 일방적으로 문자가 온 거라서 말이다."

옆에 있던 피터 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공항으로 픽업 나갈까요?"

"아닙니다. 비행기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냥 호텔에서 제가 기다리고 있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제이콥과 함께 다녀오세요. 내일 운전하셔야 하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시고요."

"헤헤! 같이 못 마셔서 안타깝네요. 다녀와서 꼭 같이 자리하시죠."

강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하지만 손은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김유정이 좀 전에 방콕 시내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 * *

방콕 스쿰빗(Sukhumvit) 호텔.

강준은 로비에서 김유정을 기다렸다.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간간이 메시지를 보내오는 거라고 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지만, 강준의 느낌은 싸했다.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했다.

"박강준 씨, 저희랑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당신들 누굽니까?"

당당히 지갑 속에 배지를 보인 그들의 정체는 한국의 국정원 요원들이었다.

"영장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저희는 국가 정보기관입니다. 굳이 그런 절차를 거치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어떤 용건으로 절 데려가려는지는 알려주실 수 있겠죠?"

"연락을 받았습니다. 뇌물죄로 쫓기는 박강준 씨가 해외로 도피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더라고요."

강준은 대충 짐작이 됐다.

"대한당 쪽인가요?"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기관입니다. 국가 이익을 해치는 사안에 대해서만 개입하죠."

단호하게 말하는 요원은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은 강준의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끌어냈다. 로비에 있던 현지 호텔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국정원 요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호텔 입구 문을 열고 펍에 간 줄 알았던 제이콥과 피터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양손 가득 포장해 온 음식들과 맥주를 들고 있었다.

둘은 호텔에 혼자 남은 강준을 생각해 테이크아웃으로 음식과 술을 포장해 가져온 것이었다.

"어! 박 소장님!"

"소장님!"

제이콥은 망설임 없이 요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피터 장은 현지 경찰을 호출했다.

"정말 당신들 국정원 맞아! 아무 죄 없는 소장님을 왜 데려가려는 건데?"

"이거 공무집행방해죄야!"

상황을 지켜보던 강준이 제이콥을 뜯어말리며 정중히 말했다.

"국정원은 국가보안법 같은 특정 법률 위반자가 아닌 이상에야 긴급체포 권한이 없는 거 아닌가요?"

"임의동행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럼 조사 목적과 동행 장소를 밝혀야 하지 않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박강준 당신은 지금 해외 도피 혐의를 받고 있어요. 거기에 자금세탁 혐의까지!"

국정원 요원은 짜증이 난다는 듯 쏘아붙였다.

"동행 장소는 어디죠?"

"저희 요원들이 머무는 다이아몬드 호텔 스위트 룸입니다. 이제 됐죠?"

"아뇨, 임의동행 경우에 6시간을 넘길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동료들이 밖에서 기다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사에는 그보다 더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국정원의 활동이 그렇게 딱딱 원리원칙대로만 되진 않으니까요……."

요원의 미간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태국 경찰이 오고 있다는 걸 알고는 한발 물러섰다. 괜히 현지 수사조직과 얽혔다간 자기네들이 더 피곤해질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가죠. 근데 제 동료들도 함께 가겠습니다. 제 신변 안전을 위해서요."

"뭐 그렇게 하시죠. 대신 시간은 조금 오버될 수 있습니다!"

"네, 그 정도야 협조해야죠. 하지만 오늘 밤 내에는 끝내주십시오. 제가 내일은 할 일이 좀 있어서요."

국정원 요원은 강준의 요청에 미간을 좁히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강준과 제이콥은 국정원 요원들의 차에 올라탔고, 피터 장은 그 차량을 뒤따랐다. 그들이 강준 일행을 데리고 어디로 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 * *

청주 김유정의 아파트.

"그 인간이 지금 카지노에 있다고요? 미친 개새끼……!"

손을 부들부들 떠는 김유정이었다. 송지희는 강준의 연락을 받고 김유정의 자택을 찾았다. 하지만 김유정은 남편이 방콕으로 간 것까지만 알고 있었을 뿐이고, 강준에게 본인이 방콕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낸 적은 없었다고 했다.

결국 강준을 임의동행하게 만든 국정원이 김유정을 사칭해 문자를 보냈다는 얘기였다.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게 어떨까요?"

"……제가 뭘요?"

"김유정 씨가 박 소장님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는 거요……. 지금 와서 되돌이켜 봤자 김유정 씨가 얻는 건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적어도 태국에 있는 남편분을 응징할 수는 있겠죠."

이미 강준의 보험조사팀에 그간의 사정을 실토한 김유정이었다. 인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보험조사팀이었다. 눈앞의 송지희 실장이 자신에 대한 어떤 증거를 가졌는지 몰랐다.

"……애도 친정에다 맡기고 왔어요. 방콕에 있는 그 인간 잡아 와야죠. 이혼할 때 하더라도…… 껍데기까지 다 벗겨서 아주 빈털터리를 만들어 버릴 거예요!"

김유정은 이제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 대한 독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게 설사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할지라도 말이었다.

"약속드리죠. 비방이나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걸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정식으로 다시 인터뷰해 주세요. 해리츠 보험 윤태영이 종용한 거라고요."

송지희의 요청에 김유정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뒤집었다. 스마트폰에는 녹음 버튼이 켜져 있었다.

"민사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방금 그 약속…… 지켜 주시는 걸로 알게요."

"저를 믿지 못해서 녹음하신 거군요."

송지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도 이런 보험 하나쯤은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당신들도 보험조사 업무를 할 때 이런 녹음을 하잖아요?"

뻔뻔하게 대답하는 김유정에게 송지희는 별다른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제 그녀 자신밖에 믿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윤태영 실장의 제안을 받으실 때도 이렇게 하셨나요?"

"당연하죠. 돈 준다고 그랬다가 딴소리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근데 이건 그 인간이 저한테 가르쳐 준 거예요……. 생각보다 잔머리를 굴리는 인간이거든요."

"그럼 박준식 씨한테 해리츠 보험의 검은 제안이 담긴 녹음 파일이 있다는 거네요?"

"만나면 물어보세요. 제가 따로 인터뷰할 것도 없이 그 파일만 있으면 반박 기사를 내실 수 있을 거예요."

송지희는 어쩌면 박준식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왜냐면 그에게 녹음 파일이 있다는 걸 해리츠 보험에서도 알고 있다면 그걸 어떻게든 없애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국정원이 움직였다는 얘기를 제이콥에게 전해 들은 송지희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유정 씨, 남편분한테 화가 나셨지만 죽기까지 바라진 않으시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김유정의 동공이 흔들렸다. 박준식은 어쨌거나 아이의 아빠였다. 그를 응징하는 것과 그가 죽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박준식 씨한테 연락할 방법을 찾으세요. 윤태영과 대화한 녹음 파일을 빨리 공개하지 않으면 본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녹음 파일이 있다는 걸 해리츠 보험 쪽에서 과연 모르고 있을까요?"

김유정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남편의 방에서 명함 하나를 가져 나왔다.

"이게 그 새끼 SNS 주소예요. 그걸로 여자들까지 만나고 다녔더라고요. 쓰레기 같은 놈……."

"박준식 씨가 이 SNS는 계속 보고 있을 거라는 얘기네요?"

"네, 아마도요…… 태국까지 가서 얼마나 호의호식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니 SNS는 들여다보고 있겠죠."

"고맙습니다. 남편분하고 연락이 닿으면 바로 전화를 드릴게요."

김유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송지희에게 머뭇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시사뉴스닷컴이 아니라 대한뉴스에서 제 기사가 난 거죠? 전 그쪽에 인터뷰하지도 않았는데요……."

"원래 대한뉴스 기획에 인지도가 있는 시사뉴스닷컴 함지훈 기자가 주연이었거든요. 근데 주연배우가 이탈해 버렸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기획자가 직접 배우로 나설 수밖에요."

"그럼 그 기자님은…… 왜 그러신 거래요?"

"그야, 진짜가 아니었으니까요. 진짜가 아닌 걸 보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송지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김유정을 바라봤다. 김유정은 차마 그런 송지희의 눈빛을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자신이 무척이나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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