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음해 (2)
청주 아파트 단지 앞.
해리츠 보험의 윤태영 보험조사관은 김유정을 만나기 위해 청주의 한 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콜센터에서 근무했던 김유정은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청주로 내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윤태영은 얼마 전 그녀를 만났던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강준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게끔 설득한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일을 다시 부탁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젠장…… 그 여자를 또 만나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태영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는 직속 상사인 박성태 이사의 일방적인 업무지시에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경찰에서 민간보험사로 이직한 후 월급은 대폭 올라 살림살이가 나아지긴 했지만, 회사의 뒤치다꺼리를 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보험조사 업무의 대부분은 보험사기의 당사자로 지목된 이와의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었다. 윤태영은 때로는 그들을 윽박지르고 때로는 회유하며 일 처리를 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엔 나도 열정이 있었는데…….’
뎅뎅! 뎅뎅!
카페의 출입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편안한 옷을 입은 김유정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윤태영에게 다가왔다.
"뭐예요? 아침부터."
"자꾸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먼저 이것부터……."
윤태영은 김유정에게 봉투 하나를 쓱 내밀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던 김유정도 얼른 봉투를 자신의 핸드백 안에 넣었다.
"지난번에 수고해 주셨는데 차비도 못 드려서요. 이해하시죠?"
"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또 왜요?"
"기자회견 이후에 여론도 많이 돌아섰고, 박강준 소장을 온라인에서 따르던 이들도 의견이 이제는 갈리더라고요."
"저기 윤 실장님."
"……네, 말씀하시죠."
김유정의 표정에서는 이미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윤태영도 대충 짐작이 됐다.
"몇 년 전 일로 전 더 엮이고 싶지 않거든요. 지난번 한 번으로 끝난 일 아니었어요?"
"저희가 귀찮게 해드린 점은 무척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제안을 가지고 왔거든요."
"하아……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한숨부터 내쉬는 김유정이었지만, 듣기 싫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해리츠 보험에서 건넨 돈은 그녀에게도 꽤 짭짤했을 터였다.
"이번에는 유정 씨도 좀 무리를 해 주셔야 합니다……. 혹시 박강준 소장에게 직접 돈을 줬다고 증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 돈을 준 것처럼 꾸며 달라는 거예요. 지금?"
목소리를 높인 김유정의 말에 윤태영이 주변을 둘러봤다. 오전 시간이라 여자들밖에 없는 카페 안이었다. 하지만 민감한 말이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네, 어쩌면 유정 씨도 부담을 많이 가지시는 일이라는 거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근데 만약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희로서도 큰 거 한 장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큰 거라면…… 구체적으로 얼마요?"
"1억 원입니다. 말 한마디로 1억이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로 제가 법적인 책임을 질 수도 있는 거고요?"
윤태영을 쏘아붙이는 김유정이었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박강준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만, 돈이 급했을 뿐이었다.
"죄송한데요. 그건 힘들 거 같네요. 윤 실장님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는 김유정이었다. 윤태영도 그런 김유정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남편분께서 최근에 실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지금 우리 남편까지 뒷조사하시는 거예요? 보험조사팀이 보험사기 잡으러 다닌다더니…… 겨우 그런 일 하시는 거였어요?"
보험조사관인 윤태영의 자존심을 정조준하는 김유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도 실직한 남편으로 인해 자존감이 망가진 상황이었다.
"기본적인 사항만 알아본 것뿐입니다. 유정 씨, 그리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실 일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보자면…… 이번에 부담을 한번 지시고 가계 부담도 더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김유정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윤태영을 노려봤다. 일반인이었으면 그 눈빛에 당황했겠지만, 수많은 보험계약자와 실랑이를 해 왔던 윤태영으로서는 늘 있는 일이었다.
"……별로 생각이 없으신 거 같군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죠."
살벌한 눈빛을 계속 받고 있을 이유는 없는 윤태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에게 김유정이 읊조리듯 말했다.
"후회해요."
"……뭘 말입니까?"
"그 기자회견에 나갔던 거요. 조용히 사는 사람을 왜 자꾸 들쑤셔 놓는 거예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김유정의 말에 카페 주변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다.
* * *
천안 골프클럽.
송정록 이사장은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홀을 돌고 있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잡은 필드 약속이었다.
"하하! 자세가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가 아부를 떨고 있는 사람은 소프트재팬의 외동딸, 손미영이었다.
"이사장님도 바쁘실 텐데 굳이 이렇게 저랑 라운딩을 다 잡아주시고…… 영광이에요."
"허허! 제가 더 영광이죠. 아버님은 잘 계시죠?"
"우리 아버지 안부를 묻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대요? 잘 계시죠. 바쁘시고."
퉁명스럽게 답하는 손미영이었다.
"사실은 지방 선거가 얼마 안 남지 않았습니까? 제가 민한당 후보로 출마를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그쪽 당 골수층들이 워낙 세게 저를 비토하는 바람에……."
"그러게 왜 대한당에 기웃거리셨어요? 차라리 못 할 거면 가만히라도 계시던가."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 직설적으로 대꾸하는 손미영에게 스무 살이나 많은 송정록 이사장이 쩔쩔매고 있었다.
"하하! 정치라는 게 원래 불러 주는 대로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이번에 민한당에서는 절 후보에 올려놓고는 있더라고요."
"제가 잘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손미영은 성의 없이 대꾸하고는 샷을 날렸다.
"나이스샷!"
"나이스샷!"
손미영의 드라이버를 건네받은 캐디도 함께 나이스샷을 외쳤다. 그리고는 조용히 골프 카트에 숨겨져 있던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자 이제 18홀 넘어갑니다. 준비하시고!"
골프 카트의 운전석에 올라탄 캐디는 송지희 실장이었다. 강준의 보험조사팀은 이미 이번 폭로 건의 배후에 소프트퍼시픽의 손미영이 있다는 걸 파악한 상태였다.
* * *
청주 산업단지.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박준식은 김유정의 남편이었다. 얼마 전까지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회사를 나왔다.
표면적으로는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었지만, 그건 박준식이 남들에게 둘러대는 말에 불과할 뿐이었다.
회사가 인원을 정리한 건 맞지만, 회사 사정과는 별개로 박준식은 원래부터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가 얼마 전 새로 구한 직장은 외제 차 판매직이었다. 벤츠나 아우디 같은 독일 차는 아니었지만, 국내에서 상당한 인지도가 있는 미국 차의 영업소였다.
"미국 차가 역사가 깊은 브랜드입니다. 카탈로그 보시면 알겠지만 튼튼한 이미지가 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외제 차를 왜 타고 다닙니까? 성능이요? 에이…… 그런 거 다 거기서 거깁니다."
가만히 그의 영업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해리츠 보험의 윤태영 보험조사관이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김유정의 남편에게 접근한 거였다.
김유정이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가 있을까 내심 불안하면서도 태어난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정신 차렸을 거라는 기대. 그런 기대를 받는 박준식이었지만, 윤태영의 눈에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여전히 허세만 가득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 차 한 대 팔면 얼마나 떨어지시는 겁니까?"
"……네? 아…… 하하! 저희도 영업 마진은 빡빡합니다. 하지만 다른 브랜드들은 영업지점이 많아서 거기서 빠지는 비용이 상당하거든요. 저희는 저 같은 영업사원들 위주라 거의 직거래로 산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황스러운 질문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답하는 박준식이었다.
‘어디서 약을 팔아……?’
윤태영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아…… 해리츠 보험의 보험조사관…… 이셨군요……."
박준식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최근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리츠 보험이 원하는 대로 기자회견장에 나가는 대가로 천만 원의 꽁돈을 받았었다.
"차 수십 대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을 한꺼번에 버실 수도 있는데…… 어떠신가요?"
"혹시 제 집사람 관련한 얘기인가요?"
"네. 제가 한번 찾아뵙는데…… 거절하시더군요……."
"잠깐만요… 그러니까 제가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윤태영은 박준식이 궁금해하는 게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보험업계의 골칫덩이인 박강준 보험조사관에 대해 앞에 나서주실 걸 요청했었습니다. 그 대가로 1억 원을 제시해드렸고요."
1억 원이라는 구체적인 액수에 박준식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굴리며 눈알을 위로 뜬 박준식이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근데 말입니다. 대기업인 해리츠 보험에서 그걸 원하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있죠. 냉정히 말씀을 드리자면 법적인 책임을 지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물밑에서 저희가 도와드리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김유정 씨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하는 거죠."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 박준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사법적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들었지만, 그걸 진심으로 걱정하지는 않는 듯했다.
"박강준한테 돈 먹였다고 진술하라는 말이죠?"
"네, 정확히 말씀해 주셨네요. 이미 사건 내용을 알고 계셨나 봅니다."
"마누라한테 나도 듣는 게 있으니까……."
차를 판매할 때와는 180도 달라진 박준식의 태도였다. 그의 말투에서는 이미 거들먹거림이 배어 있었다.
"그럼 집사람이 어디 언론 같은 데다가 말하면 되는 겁니까?"
"네, 제가 언론사를 특정해서 기자를 보내드릴 겁니다. 그럼, 원래 있었던 일에서 조금 양념만 쳐서 얘기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그 기자분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거고요."
"……돈은요?"
"돈은 인터뷰가 끝나고 지급해드릴 겁니다. 물론 은행 계좌는 안 되고 현금으로 지급해드려야죠."
박준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얄팍한 그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박준식 씨, 혹시 사모님을 설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한번 해 봐야죠. 근데 워낙 고집이 있는 여자라, 잘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혹시 그 돈 말입니다. 선불로 일부 안 될까요?"
돈 얘기를 이어가는 박준식이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말로 설득하는 거보다는 눈에 ‘뙁!’ 보여 주는 게 훨씬 빠르거든요…."
"제가 그 문제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회사와 협의해 보겠습니다."
"네네…… 천천히 협의해 보십시오. 협의가 끝나면 제 번호로 연락해 주시고요."
능글맞게 웃는 박준식은 자신이 협상의 우위를 점했다는 걸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