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8)
베이징 중난하이.
밍싱그룹 샤오빙(肖斌) 회장은 긴장한 기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별장 건물을 향해 들어갔다.
미국 상원에서는 한국인 오혁진이 상해기술진출 총공사가 주도한 경기반도체의 기술 탈취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그간 자신이 당한 모든 일에 대한 경과를 조목조목 밝혔고, 린칭 일당이 탈취한 글로벌 기업들의 기술 문서를 공개했다.
파장은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졌다. 국제 사회는 이제 중국이 주도하는 천인계획(千人計劃)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국은 지식재산권 문제를 통상적인 문제로까지 가져왔다. 강준이 회귀하기 전 봤던 미중 무역분쟁이 좀 더 앞당겨지게 된 것이었다.
린칭이 경질된 것은 물론이고 경기 반도체 D램 나노 칩의 기술 탈취를 주도한 린칭의 상관 리리쥔도 문책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일의 실질적인 기획자이자 반도체 굴기의 과업을 맡은 밍싱그룹의 샤오빙 회장도 리리쥔과 함께 중난하이로 문책을 당하러 호출되어 온 것이었다.
미리 와 있던 리리쥔 처장이 썩은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 처장님, 분위기는 좀 어떻습니까?"
"원로분들이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우리가 괜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우리야…… 위에서 지시를 받은 대로 움직인 거 아닙니까?"
대답 대신 담뱃갑을 꺼내 샤오빙에게 한 개비를 권하는 리리쥔이었다.
치익! 칙!
불이 붙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샤오빙은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원로 앞에선 어떤 핑계이건 다 소용없을 거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원로들도 이 사태를 책임질 누군가가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샤오 회장, 우리 아무래도 전략을 바꿔야 할 거 같습니다."
"처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좀 이따 들어가서 보면 알겠지만, 이미 우리는 처분이 결정됐습니다."
"그럴 리가요? 우리가 장 서기의 자금을 다 쥐고 있지 않습니까……?"
샤오 회장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정치판의 경험이 풍부한 리 처장의 말에 오금이 저렸다.
"장 서기가 어떤 사람인 줄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우린 그냥 금고지기일 뿐입니다. 일단은 쥐 죽은 듯이 원로들 말씀을 경청하기만 하세요. 돈을 내놓으라면 내놓고, 직위를 내놓으라면 내놓으셔야 합니다."
리리쥔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충고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샤오빙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까지 올라오게 됐는지 돌이켜봤다.
무수히 많은 정적을 냉혹하게 제거하며 밍싱그룹의 총수에 올랐다. 물론 동향의 리리쥔이 자신을 끌어주기는 했어도. 그의 말대로 밍싱그룹의 모든 것이 그냥 주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진흙탕을 뒹굴며 쟁취해낸 노력의 산물이었다. 샤오빙은 그걸 내려놓아야 한다는 리리쥔의 말이 이성적으로는 이해됐지만, 마음으로는 온전히 납득되지는 않았다.
담배를 필터 가까이 태운 리리쥔이 입술을 달싹이며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평소 같지 않은 그의 모습이었다.
"샤오 회장, 이제 들어갑시다."
"리 처장님 혹시 다른 대안은 없는 겁니까?"
걸어가던 리리쥔이 우뚝 멈춰서서 샤오빙을 돌아봤다.
"샤오 회장, 당신 전임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한번 생각해 봐요. 이게 그냥 버틴다고 될 일인지……."
샤오빙의 전임자들은 지금 모두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부패를 이유로 갖가지 죄목이 붙은 채 말이었다.
* * *
석 달 후, 홍콩.
핑과일보 본사.
"밍싱그룹 총수가 실종됐다는 겁니까?"
"네, 샤오빙 회장의 지난 석 달 동안 행방이 묘연합니다. 상하이방에서 가장 주목을 받던 기업가였는데 말입니다……."
핑과일보의 사주인 지미 리는 턱을 매만지며 미궁에 빠진 밍싱그룹에 대해 언급했다.
"혹시 샤오빙 회장이 비자금을 빼돌리려고 숨은 것 아닐까요? 밍싱그룹에서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으면 천문학적인 돈이 밍싱그룹으로 흘러 들어갔을 테니까요."
"박 소장님은 샤오빙 회장이 정말 중국 본토에서 탈출하려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강준은 회귀 전 중국 기업가들이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걸 봤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특히 홍콩의 금융시스템은 샤오빙 회장에게 자금세탁에 유리한 장소일 테니까요."
강준의 말에 지미 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박 소장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군요. 밍싱그룹은 상하이방의 비밀 자금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상하이방의 돈줄을 샤오빙 회장이 갖고 놀았다는 거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샤오빙 회장이 얼마를 가지고 도피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박 소장님의 추측이 옳다면 상하이방은 새로운 판을 짤 겁니다."
"밍싱그룹은 그럼……?"
"사라지고 밍싱그룹을 대체할 새로운 회사가 만들어질 겁니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요."
지미 리는 핑과일보의 어제 발행된 핑과일보 영문판을 강준에게 보였다. 1면에는 미국 상원에서 언급된 린칭과 리리쥔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미 FBI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조금씩 풀고 있습니다. 반응이 폭발적이더군요.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립 황이 사망한 사건은 홍콩인들에게 꽤 충격이었을 겁니다."
강준은 개인정보 유출 게이트 때 임정근에 대한 자료를 보내준 지미 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미 FBI에 강준이 자료를 넘기는 대가로 제안한 건 이번 경기반도체의 기술 유출사건과 관련한 FBI 자료를 핑과일보에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슬슬 중국 본토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는 홍콩이었다. 몇 달 뒤에 이곳에서는 행정장관의 완전 직선제 선거를 요구하며 우산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우산 혁명의 중심에 핑과일보와 사주인 지미 리가 있을 터였다.
밍싱그룹의 기술 탈취 사건은 그런 정세 속에서 미 정부에서 홍콩을 주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 줬다.
그리고 예견치 못한 샤오빙 회장의 반란은 오히려 상하이방의 숨은 권력자들이 홍콩을 더 옥죄게 되는 이유를 만들어주게 된 건지도 몰랐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저한테 말입니까?"
"네, 그분은 홍콩 투자업계의 거물이기도 하죠."
"그런 사람을 왜 제게 소개한다는 말씀입니까?"
"한국에 새로 설립되는 저가 항공사에 투자하려고 하는데, 박강준 소장님 얘기를 했더니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제게 부탁을 하더라고요…… 항공노선에 대한 보험요율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 지미 대표님, 전 일개 보험조사관일 뿐입니다."
강준은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지미 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은 그 사람이 투자한다는 저가 항공사의 대표가 소프트재팬 손주영 회장의 딸입니다. 박 소장님께서도 아는 인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제야 강준은 왜 홍콩의 투자자가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알아차렸다. 재보험 문제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로이즈의 멤버 찰스 벌링턴의 내연녀 손미영. 그녀가 바로 한국에서 새로 설립되는 저가 항공사의 대표였기 때문이었다.
* * *
홍콩 국제금융센터.
지미 리와 함께 나온 이는 드래곤 펀드의 스티브 탕이라는 사람이었다. 드래곤 펀드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자본으로 중국 시장에 투자하는 펀드였다.
스티브 탕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실무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기회를 포착해 사업을 시작한 인물로 보였다.
"필립 황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습니다. 무척 충격이었죠. 실은 뉴욕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스티브 탕은 강준이 맡았던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필립 황이 어떤 연유로 리리쥔 처장과 연결된 건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럼요, 솔직히 말씀드려 필립 황과 저는 경쟁자였습니다. 둘 다 중국 시장에 관심을 가지는 미국 투자자들의 펀드를 운영하고 있었으니까요."
"반대로 중국 본토의 넘쳐나는 자금을 미국에 투자하는 역할도 해오신 거 아닙니까?"
강준의 말에 스티브 탕이 속내를 들켰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굳이 돌려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역전이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난 30년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 왔으니까요. 이제는 돈 많은 중국 부호들이 넘쳐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부호 중에서는 석연치 않은 돈을 가진 자들도 많겠죠? 밍싱그룹의 샤오빙(肖斌) 회장처럼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제와는 벗어난 거 같군요."
스티브 탕은 유려한 말솜씨로 예민한 사안들을 피해 갔다. 그리고는 본론을 꺼냈다.
"손미영 씨에 대해서는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의 부친이신 손주영 회장께서 성원그룹과 한국의 재보험사를 차리셨죠. 물론 이제는 지분 정리를 하셨다고 들었고요."
"박 소장님은 그 양사가 왜 갈라섰는지 아십니까?"
그의 뉘앙스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양사가 갈라섰다는 얘기였다.
"아뇨. 들은 바는 없습니다."
"손주영 회장의 딸인 손미영 씨가 저가 항공사를 설립했습니다. 항공사 이름은 소프트퍼시픽입니다. 들어보셨나요?"
"들어본 것 같긴 합니다. 혹시 최근에 취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네, 맞습니다. 홍콩과 인천을 잇는 노선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홍콩, 그리고 중국의 각 도시를 잇는 노선도 개발 중이더군요."
그는 이미 소프트퍼시픽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손미영 씨로서는 당연히 부친이 지분을 가진 소프트성원리에 본인 항공사의 항공기 사고 보험을 맡겼겠죠?"
"그랬겠죠. 더군다나 비행기 사고의 경우에는 민간 보험사에서 감당하기 힘드니 재보험사에 바로 맡기려고도 했을 거고요."
"네…… 근데 예상외로 당시 소프트성원리에서 손미영 씨의 항공사 보험 가입을 거부했었습니다."
강준은 보험조사관으로서의 촉이 섰다. 김성호 대표였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건 안전성에 관련된 일일 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아마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소프트퍼시픽의 모 회사인 소프트재팬에서도 압력이 들어갔고요."
"근데 소프트성원리의 경영진이 고집을 꺾지 않은 거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성원그룹에서 소프트재팬의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서로 갈라서게 된 겁니다."
강준도 모르고 있었던 SS재보험의 속사정이었다. 옆에 있던 핑과일보의 지미 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스티브 탕 씨는 소프트퍼시픽이 최근에 확보한 항공기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구매한 항공기랍니까?"
강준의 질문에 스티브 탕이 대신 답했다.
"구매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대형 항공사로부터 15대의 비행기를 임대했습니다. 연한이 20년이 넘은 기종으로요. 게다가 기종은 사고 이력이 많은 B636 기종이고요."
"한 가지만 묻죠. 이런 사항까지 파악하고 계신 스티브 씨는 뭘 고민하는 겁니까? 의구심이 들면 투자를 하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한숨을 길게 내쉰 스티브 탕은 지미 리를 한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 펀드 자금의 40%가 소프트재팬 손주영 회장의 자금입니다."
"아…… 투자를 거절할 명분이 필요하신 거군요."
강준이 이제야 그가 자신을 보고자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독이 든 성배를 마시기 전에 독이 들었다는 걸 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거였다.
펀드의 수익률이 고꾸라지더라도 책임 소재는 분명히 해야 했으니까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