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7)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이은진 검사는 검찰 조사관들과 함께 김종문을 데리고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이미 수많은 취재진이 체포된 김종문의 모습을 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발! 이거 도대체 뭐냐?"
"조용히 안 합니까! 당신이 한 짓 때문에 경기반도체가 얼마나 손해를 본지 몰라서 그래요?"
"검사님, 그거 아직 유출이 안 됐다니까요! 그놈들 아직 한국 빠져나가지도 못했다면서요!"
"전산파일을 종이로 출력해서 전달합니까? 메일로 보내면 끝이지! 쯧!"
이은진은 김종문에게 한번 쏘아붙이고는 그의 손목을 천으로 덮었다.
"아니 진짜 이건 풀어 달라니까……."
"피의자 체포할 때 수갑 채우는 게 원칙입니다. 천으로 가려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아세요!"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펑! 퍼펑! 펑!
"김종문 씨! TM하이텍을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필립 황의 사망이 사실입니까?"
"경기반도체의 도면 촬영본을 중국의 협력사에 메일로 보냈다는 게 사실입니까?"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에 김종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답했다.
"그…… 그건 검찰 조사에서 충실하게 답하겠습니다."
"필립 황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질문은 계속됐지만, 김종문은 검찰 관계자들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차에 올라탄 김종문에게 이은진 검사가 물었다.
"김종문 씨, 이제 당신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죠?"
"그게 누군데요?"
"유승호 연구소장이요. 결자해지! 본인이 싼 똥은 본인이 치워야겠죠?"
이은진의 말에 수갑 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김종문이었다.
* * *
상하이 푸동지구.
오혁진 실장은 TV 화면으로 필립 황이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확인했다. 일말의 희망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필립 황이 홍문호텔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한 날, 호텔을 빠져나와 인천공항까지 도착했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오 실장 일행을 기다린 사람들은 지금 자신을 감시하는 린칭의 사람들이었다.
출국금지가 내려졌다는 말과는 달리 린칭이 안내한 특별 출입국심사대에서는 오혁진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아무런 제지도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됐던 돈도 지급되지 않았다. 원래의 20억 원은커녕 한국에서 받던 연봉을 월급으로 쪼개서 받는 형편이었다. 오 실장과 연구원들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경기반도체에 대한 새로운 보도가 나온 것이었다.
김종문의 TM하이텍과 필립 황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는 경기반도체 오 모 연구원의 일탈을 말이었다.
"오 실장님 저거 우리 말하는 거 아닙니까?"
"……."
오혁진은 부하 연구원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이제 졸지에 그들은 회사를 배신한 기술 유출범에다 매국노가 됐다. 저렇게 언론에 이름이 공개되면 다시 한국에 돌아가 취업할 수도 없을 터였다.
"저희 진짜 어떻게 합니까? 돈도 못 받고 이제 빈털터리인데……!"
"김 대리…… 돌아가자……."
"어디로요?"
"한국으로.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강제로 우리가 당했다고 그러면 정상은 참작될 거다. 적어도…… 기술 유출범 딱지는 피할 수 있겠지."
"오 실장님! 인제 와서 그게 말이나 됩니까? 우린 벌써 엎질러진 물이라고요!"
잠시 망설이던 오혁진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며칠 전부터 한국에서 사람이 와 있어. 결국엔 자수하라는 건데……."
"누가 와 있는데요?"
"보험조사관 박강준…… 우리가 마음을 먹으면 대사관 직원들을 보내 주겠다고 하더라고."
오 실장의 말을 듣고 있던 김 대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두가 지친 상황에서 이제는 투항해야 할 때였다.
그날 저녁.
오혁진은 감시원에게 사우나를 간다는 핑계를 대고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상하이에 온 이후 린칭 일당의 감시는 느슨해졌다.
반도체 공장을 본격적으로 세우는 단계에 돌입했기에 그들로서도 언제까지 강제로 연구원들을 관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식 사우나장에 들어선 오 실장은 예의 그렇듯 온탕으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몸을 담그고 있는 강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 좀 해 보셨어요?"
"……연구원들을 설득해 보고 있습니다."
"자수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습니다. 김종문이 체포된 마당에 검찰이 오 실장님의 행각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 실장은 뜨거운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그고는 다시 올라왔다.
"제가 D램 나노 칩의 회로 도면을 유출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다만, 김 대리를 포함해 저를 따라온 연구원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저들은 그저 제 지시를 따랐을 뿐이죠."
자신이 책임을 다 지고 가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으셨다면 오 실장님이 해 주셔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이제는 무슨 요구를 받더라도 놀랍지 않네요."
린칭 일당으로부터 시달려온 오 실장은 만사를 포기한 듯 초연한 모습이었다.
"미 FBI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천인계획(千人計劃)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린칭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걸로 보이고요."
"필립 황을 죽인 것도…… 린칭이었나요?"
"린칭의 정보원이 죽인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각국에서 점조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저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저희도 감시당하는 형편이라……."
강준은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었다.
"오 실장님의 존재 자체가 큰 힘이 될 겁니다. FBI에서는 오 실장님이 의회에서 증언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상원 외교위원회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 정계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조직적인 기술 유출에 대해 경고를 날릴 생각인 겁니다."
"……."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오혁진이었다. 이번 사태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커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저도 확답을 받고 싶습니다. 저를 제외한 연구원들을 기소하지 않는 것으로요……."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한번 힘써 보죠. 경기반도체 경영진이 고소를 취하한다면 검찰에서도 무리하게 수사를 계속해 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외국에까지 끌려와 고생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죠……."
기술 유출 과정에서 강제성을 입증하는 게 사는 길이라는 걸 은근슬쩍 알려준 강준이었다.
"……유승호 연구소장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얼마 전에 복직했습니다. 경영진에서도 오해가 있었다는 유 소장님의 해명을 받아들였고요……."
잘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오혁진이었다.
"솔직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회사를 배신한 건 유 소장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건 아니었거든요."
"이해합니다. 제대로 된 대우가 필요했겠죠. 물론 방법이 잘못되긴 했겠지만요……."
강준의 타박에도 오혁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듯 고개를 떨궜다.
"집에 가고 싶습니다. 너무 멀리 왔어요……."
한탄하듯 내뱉은 오혁진은 고개를 들고는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키를 강준에게 내밀었다.
"제 자켓 주머니에 하드디스크 하나가 들어있을 겁니다. 거기에 제가 지금까지 모은 린칭 일당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걸 모으신 겁니까?"
"도면 전산화한 걸 올리는 서버가 있더라고요. 거기를 역으로 공격해서 얻어 낸 자료입니다. 경기반도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체에서 수집한 기술 문서를 가지고 있더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뭘요?"
"아직 린칭의 손아귀에 있지 않으십니까?"
온탕의 열기에 얼굴이 가려진 오혁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필립 황처럼 될까 봐서요?"
"네."
"내일 새벽에 대사관 직원들을 보내주십시오. 린칭이 오늘 밤에 베이징으로 올라가거든요. 제일 감시가 소홀할 때일 겁니다."
"다른 연구원분들도 준비하고 계시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준비요? 여기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은 게 최선입니다."
오랜 감시 생활 끝에 그가 깨달은 노하우이기도 했다.
강준은 먼저 탈의실로 나와 오혁진의 라커를 열었다. 그의 말처럼 점퍼의 안주머니에서는 묵직한 하드가 들어 있었다. 외장 하드디스크로 나온 것이 아니라 본체에서 억지로 뜯어낸 하드디스크였다.
"뭘 도와드릴까요?"
어느새 다가온 사우나의 직원이 강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준은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100위안짜리 열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팁이에요.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요."
주변 눈치를 보던 직원이 강준이 건넨 지폐를 얼른 받아들고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중국에서는 친구를 사귀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저도 한국인 친구가 몇 명 있습니다. 다 친한 사이들이죠. 여기 상하이에 살고 있고요."
"가끔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럼 또 봅시다!"
강준은 직원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자신의 라커에 오혁진의 라커 키를 넣어 두고는 자리를 떠났다. 직원은 린칭이 심어둔 감시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여러 차례 뇌물을 통해 그를 포섭했고 결국 사우나라는 안전지대를 확보한 것이었다.
* * *
2주일 후.
을지로 박강준 보험조사사무소.
"박 소장님, 고맙습니다. 이제 제 억울함이 조금 풀린 거 같습니다. 여기 계신 송 실장님도 애 많이 쓰셨고요."
유승호 연구소장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 강준을 찾아왔다. 오혁진 실장이 연구원들과 함께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들의 증언 덕택에 유승호의 기술 유출에 대한 세간의 오해는 완벽하게 풀렸다.
"근데…… 앞으로 오혁진 실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구속은 피하기 힘들 겁니다. 이미 D램 나노 칩의 도면이 유출된 건 되돌리기 힘드니까요."
"능력이 있는 친구인데…… 안타깝습니다. 국내 업계에서도 찍혔으니 이제 취업도 힘들 텐데…."
이미 오혁진도 감수했던 일이었기에 강준도 어쩔 수 없었다. 유승호는 다른 연구원들의 안위에 대해서도 물었다.
"나머지 연구원들의 복직은 가능하겠습니까?"
"SS재보험의 김성호 대표님이 경기반도체 경영진들과 어느 정도 얘기가 오간 것 같습니다. 연구원들도 제대로 모르고 넘어간 것이고……."
"다행입니다. 그들도 돈을 많이 준다니까 얄팍한 마음에 넘어간 겁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구나 돈은 좋아하니까요…… 하하!"
어색함을 깨는 건 어느새 자리에 합류한 김준혁이었다.
"기업에서도 그간의 연구원들에 대한 대우도 재고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반도체 분야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유승호 소장은 강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기술 유출에 대해서 SS재보험에서 보상 절차심의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몇백억 수준의 보상금이 지급될 겁니다…… 근데 과연 국회 감사에서 그걸 물고 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사실 그보다 더한 손실일 겁니다. 반도체는 전자산업의 쌀이 아닙니까? 앞으로 더한 경쟁이 펼쳐질 텐데…… 이번 같은 일이 또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죠."
얼굴이 어두워지는 유승호였다. 강준은 앞으로 각 분야에서 글로벌 기술 전쟁이 격화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국회 쪽에서 기술 유출 보험에 대한 감사가 시작되면 힘을 써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여기 분들이 제 억울함을 밝혀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누군가를 도와야죠."
유승호 연구소장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