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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5) (219/250)

219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5)

오혁진은 이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눈치챘다. 한 달째 감금 생활을 하며 카메라로 찍어온 D램 나노 칩의 회로 설계도면을 다시 전산화시켜 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더 괴롭게 만드는 건 자신이 설득해 데려온 연구원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거였다.

"오 선생님, 여기서 지내시기 불편하시죠?"

"뭐…… 좀 답답하긴 하네요."

깍듯한 태도의 남자는 한때 파키스탄에서 공자 문화교류원의 책임자로 일했던 린칭(林淸)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한국 반도체 기술을 빼내는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었다.

그는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지만, 리 처장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경기반도체 연구원들을 밀착해서 감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막 차를 우리려던 참입니다. 잠깐 쉬었다 하시죠."

커다란 나무 다기 판에 린칭은 뜨거운 물로 작은 찻주전자를 씻어 냈다. 그리고는 이내 작은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랐다.

"드시죠. 뜨거울 때 드셔야 향이 좋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도면을 다시 전산화하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일이 얼마 정도 진척이 됐나요?"

"마무리 단계이기는 합니다. 근데…… 그 도면을 가지고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이고요."

오혁진은 내심 불안했다. TM하이텍의 중국지사로 데려갈 거라던 김종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두 번의 상하이 출장에서 오혁진은 현지의 반도체와 관련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설비나 장비도 보지 못했고, 관련 기술자들이라던 사람들도 반도체에 관련해서는 문외한인 것 같았다.

"중국에서 반도체는 물론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정부에서 파격적인 지원이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 함께 가 보셨던 창저우의 공장은 아마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로 지어질 겁니다."

"아직 삽도 제대로 안 떴던데…… 그럼, 저희가 가도 당분간 할 일이 없는 거 아닙니까?"

린칭은 지그시 웃으며 다시 오혁진의 찻잔에 차를 부었다.

"이해합니다. 지금 무척 마음이 복잡하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걸 보십시오."

린칭은 자신의 차 키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최근에 스웨덴의 대표적인 차량 브랜드 볼보를 인수한 중국 지리 자동차(吉利汽车)의 SUV 차량 키였다.

"오 선생님, 파괴적 혁신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파괴적…… 혁신이요?"

"네, 미국의 저명한 경영학자 크리스텐슨 교수가 주창한 경영전략이죠. 일단 단순하고 저렴한 제품으로 시장부터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겁니다."

린칭의 말에 오혁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가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린 세계의 반도체 시장을 지배할 겁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오 선생도 우리와 함께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굳이 여기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으실 이유는 없는 거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린칭의 표정 뒤에는 반강제적 압박이 숨어 있었다.

오혁진이 연구원들과 묵고 있는 숙소는 중국인 명의의 호텔이었다. 스위트 룸을 사무실로 이용하고 최고급 식사를 매끼 제공받지만, 스마트폰을 포함한 일체의 통신기기를 쓸 수 없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뉴스 기사를 보고 연구 자료를 볼 수는 있었지만 교묘하게도 파일을 외부로 전송할 수는 없었다.

"약속한 20억 원의 금액은 언제 지불되는 겁니까?"

"이번에 도면 전산화 작업만 끝나면 1차로 지불할 예정입니다."

"자…… 잠깐만요! 지금 1차라고 하셨나요?"

"네, 김종문 대표님이 미리 말씀을 안 드렸나요?"

"금시초문입니다!"

오혁진은 아차 싶었다. 도면을 외부로 빼돌리는 게 기술 유출 범죄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따로 계약서를 쓰고 일을 진행한 게 아니었다.

인제 와서 말을 바꾼다고 해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거였다.

"저희도 안전장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 선생님과 연구원분들이 상하이에 일정 기간 근무한 이후에 나머지 금액은 지불할 생각입니다."

"그 일정 기간이라는 게 도대체 얼마가 된다는 겁니까?"

"1년입니다."

오혁진은 두 주먹을 꾹 쥐고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속으로 억눌렀다. 혼자만의 문제였으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같이 데려온 연구원들이 있었다.

"하아…… 처음하고는 말이 다르네요."

"달라진 건 전혀 없습니다. 저희와 함께 일하는 동안 충분한 연봉을 드릴 거고, 창저우에서 지낼 숙소도 무료로 제공할 예정입니다."

"……그럼 책정된 연봉은 얼마인데요?"

"2억 원에 성과급을 별도로 지급합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현재의 연봉에 비해 두 배 이상이 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오혁진은 린칭을 신뢰할 수 없었다. 리리쥔이 광화문 호텔에서 얘기했던 창대한 미래도 이제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일단…… 알겠습니다."

오혁진은 지금의 상황이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다. 린칭은 그런 오혁진의 속마음을 간파하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선생님, 현명하게 판단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유승호 소장처럼 되실 순 없지 않겠습니까?"

"……."

오혁진은 린칭의 말에 섬뜩함을 느끼며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감시하는 인원 한 명이 오혁진을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감시원은 오혁진의 발걸음이 사무실로 쓰는 스위트 룸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자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제 방에서 조금 쉬었다 가려고 합니다! 그것도 안 됩니까?"

평소 같지 않은 오혁진의 모습에 감시원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깐만 있다가 다시 일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네, 그럽시다……."

띠리릭!

방으로 돌아온 오혁진은 인기척을 느꼈다.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직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직원은 얼른 청소 카트를 끌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오혁진은 뭔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침대맡에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늘 밤 자정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서랍 속에 핸드폰은 넣어 뒀습니다.

오혁진은 침대맡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쪽지에 적힌 대로 폴더식 2G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쪽지의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오혁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었다. 작은 희망이 다시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 * *

정은규 연구원의 집.

"은규야, 너도 잘 알잖냐? 내가 하지 않았다는 거."

"……네 알죠."

유승호 연구소장은 송지희의 설득에 강준과 함께 정은규의 집을 찾았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친누나와 함께 잠시 머무는 임시 숙소였다. 그만큼 정은규는 린칭 일당이 자신을 어떻게 해코지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 네 입장도 알겠다. 지금은 말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겠지."

지켜보던 송지희가 안타까운 듯 끼어들었다.

"정은규 연구원님, 유 소장님께서 기술 유출범으로 온 국민의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에요. 작은 진술이라도 소장님께는 큰 힘이 될 거예요."

"……글쎄, 전 오혁진 실장님을 따라간 거밖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오혁진 실장은 어디에 있는 거죠? 연구원님은 오 실장을 따라 누구를 만났나요?"

고개를 숙이며 더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정은규였다. 강준은 이미 정은규의 기억을 읽는 상태였다. 그가 묵었던 호텔의 이름을 알아냈고, 당장에라도 그 호텔 이름을 대며 압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준은 정은규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면 마음을 고쳐먹은 거로구나?"

"……소장님, 전 그냥 연구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많은 걸 바라고 간 것도 아니었고요."

"오 실장이 뭐라 그러면서 꼬드겼냐?"

잠시 침묵한 정은규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본인도 억울한 면이 있었을 테니까.

"미국 실리콘밸리로 진출할 기회라고 했어요. 저도 그걸 믿었죠. 근데…… 그 사람들 목적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라면 김종문 대표를 얘기하는 거니?"

"아니요. 필립 황이요. 김종문은 그냥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었어요. 필립 황이 회사를 키워서 매각하자고 했어요. 자기가 월스트리트의 큰 투자자들을 잘 안다면서요."

"그래서 무슨 조건을 내밀었니?"

"연봉도 연봉이지만 스탁 옵션을 준다고 했어요. 솔직히 경기반도체에서는 그냥 일개 연구원이지만, 거기서는 제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유승호 연구소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정은규의 입장을 이해했다.

"나도 그 마음 잘 안다. 회사의 일개 부속품으로 끝나지 않을까 조바심도 있었겠지. 그래도 박사까지 끝내고 온 건데……."

"죄송합니다."

"은규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냐? 그동안 연구원들 대우도 제대로 못 챙긴 내 잘못이지."

서로의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강준은 정은규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김종문 일당이 경기반도체의 암호화 시스템에 접속을 시도했습니다. 사내의 D램 나노 반도체의 회로 도면을 빼내기 위해서였죠.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 그래서 우리보고……."

정은규는 대충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저도 눈치가 있는데 대충 짐작은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온 거기도 하고요. 오 실장님이 회로 설계의 초안을 작성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오 실장님 지시대로 설계 도안을 다시 그렸고요."

"그러니까 회로 도면의 출력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말씀이네요."

"네, 저희 머릿속에 대충 있으니까 초안만 잡아주면 재설계가 가능했던 거고요. 물론 그 일이 떳떳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는 정은규였다. 강준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했다.

"린칭이라는 자가 연구원들을 호텔에 감금했죠?"

강준이 린칭을 언급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정은규였다.

"그…… 그걸 어떻게?"

"저희도 어느 정도 조사를 끝마친 상태입니다. 다만 호텔의 정확한 위치와 그곳에 있는 린칭의 사람들, 그리고 기술 유출에 대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아! 물론 연구원분들은 강요로 회로 재설계에 참여한 거니 법적인 처벌은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안심하십시오. 그러려면 정은규 연구원님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하나 더 묻죠. 김종문과 필립 황 그 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둘의 이름이 나오자 정은규는 주머니 속에 든 2G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실은 필립 황 덕분에 제가 거기서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이걸로 연락하면서요……."

강준이 폴더폰을 열자 국가번호 1로 시작하는 국제전화번호가 통화 내역에 찍혀 있었다.

"그 번호가 필립 황하고 연락했던 번호예요. 한국시간으로 밤이면 전화를 받더라고요."

강준은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필립 황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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