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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4) (218/250)

218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4)

한 달 뒤. 을지로 SS재보험사.

TV 언론에서는 경기반도체의 기술 유출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이번 D램 나노 칩의 기술 유출에는 몇 년 전 미국 반도체업계에서 일하다 한국으로 스카웃되었던 유 모 연구소장이 깊게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검찰이 김종문의 스카웃 제의를 뿌리친 유승호 소장을 구속한 건 의외였다.

그리고 검찰의 수사상황은 일부러 누가 그런 듯 언론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박 소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유승호 연구소장은 절대 아닐 겁니다."

"지금 검찰에서 유 소장을 조사하고 있다는데?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야? 설계도면이 유출된 건 사실이잖아?"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경기반도체의 D램 나노 칩의 설계도면이 유출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유승호 연구소장이 검찰에 소환된 사실만을 가지고 언론은 수많은 기사를 재생산했다.

어느새 의혹의 당사자인 유승호 연구소장은 국가 기술을 팔아넘긴 천하의 매국노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 김종문의 TM하이텍으로 오혁진 연구실장을 비롯해 경기반도체의 핵심 연구원 4명이 함께 이직했습니다. 근데 이상한 건 아직 그들 모두 미국으로 출국하지 않았다는 거죠."

"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성호 대표는 호기심이 동하는 듯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그들의 최근 행적을 살펴보니까 TM하이텍이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중국 상하이로 오간 출입국 기록이 있었습니다."

"호오라…… 그럼 미국에 세워진 법인은 눈속임이라는 거야?"

"아마도요. 어쩌면 연구원들이 달콤한 제안에 속았을지도 모릅니다."

"김종문이 그들을 속였다는 거야?"

"아뇨. 아무래도 상해기술진출 총공사 쪽에서 직접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오혁진 연구실장이 단독으로 기술적인 성과를 내긴 힘들거든요. 결국 단기적으로는 도면만 빼내면 목적은 달성한 거니까요."

강준은 그들이 여전히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데서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근데 박 소장…… 유승호는 혐의를 벗기가 좀 어려울 거 같아……."

"네? 유 소장은 분명 결백할 텐데요?"

"이번에 물밑에서 검찰을 움직인 게 실은 보험협회야."

"보험협회요?"

"그런 보험협회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게 바로 해리츠보험이고."

"정부 부처와 협력하는 기술 유출 보험은 업계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요? 솔직히 그간 국내에서 보험업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강준은 해리츠보험에서 이번 일에 대해 개입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기술 유출 보험은 민간 보험사 입장에서는 큰 손해가 날 수 있는 상품이야. 정부에서 공적 보험으로 재원을 마련한다고 해도 민간 보험사들이 받아야 할 리스크도 제법 될 거거든……."

"그래서 초장에 일을 망쳐 버리려는 수작이군요?"

"경기반도체에서 기술 유출이 됐다고 여론이 들끓고 그걸 정부 세금으로 보상해 준다고 하면…… 국민 여론이 어떻겠어?"

"혈세 낭비인 기술 유출 보험 정책 자체를 반대하겠죠."

김성호 대표는 상황이 안타깝게 돌아간다는 듯 TV의 경기반도체 소식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유승호 소장을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일은 이렇게 됐지만…… 억울한 사람은 없도록 해야겠지."

강준은 사무실을 빠져나오면서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서울 동부지검에서 경제범죄를 담당하는 형사 4부의 이은진 검사였다.

그녀는 지방 검찰청의 한직을 떠돌다 얼마 전 서울로 다시 올라와 있었다.

* * *

구의동 동부지검 앞.

잠깐 시간을 낸 이은진이 인근의 카페로 강준을 만나러 나왔다. 동부지검에서 기업 범죄를 담당하는 다른 형사 6부였지만, 이은진은 이 사건에 자처해서 맡았다.

"제가 보니까 유승호 씨는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요."

"근데 왜 구속기간을 연장하는 겁니까?"

"그건 위에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저희로서도 기술 유출 같은 사건은 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유 소장이 도면 파일을 복사하거나 출력물을 빼돌린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근데 기술 문서를 출력해 집으로 가져간 적은 있었어요."

검찰이 유승호를 계속 잡아두는 이유가 있긴 했다.

"그건 집에서 계속 관련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게 D램 나노 칩의 구체적인 기술을 담은 것도 아니고, 공개된 연구 자료를 출력한 것들일 뿐입니다."

"알아요. 유 소장도 그렇게 주장하고요."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지만, 카페에서는 여전히 백색소음이 들려왔다.

"근데…… 혹시 그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국정원에서 박 소장님께 먼저 정보를 줬다고 하던데…… 무슨 꿍꿍이들이 있는 거 아니에요?"

이은진 검사는 강준이 아직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는지 물어보는 거였다.

"저 아직 최은정 이사랑 교제하는 사이입니다. 그런 제가 검사님께 솔직하지 못할 이유는 없죠."

이은진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최은정을 들먹인 강준이었다.

"덕분에 윗선에 찍혀서 지방으로 뺑뺑이 돌았죠."

"얘기가 그렇게 흐르나요? 후후…… 좌우간 돌이켜보니 국정원에서 저한테 미끼를 던진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옛날 일을 떠올리며 웃던 이은진 검사가 다시 표정을 싹 바꾸며 말을 이었다.

"유승호 소장이 노트북에 띄워진 설계도면을 카메라로 찍어 그 파일을 USB에 담아뒀다는 의혹이 있어요."

"의혹이요……? 그럼 아직 그 USB를 증거로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말씀이네요."

"……제보를 한 건 받았어요."

"제보요? 누가 제보를 했단 말입니까?"

"익명의 제보자요. 발신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서버고요."

"김종문이 대표로 있는 TM하이텍이겠군요."

"그래서 좀 이상하다는 거예요. 분명 박 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TM하이텍은 기술 유출을 하기 위한 경유지잖아요? 근데…… 왜 굳이 중간에 우리 쪽에 제보를 했을까요?"

미간을 좁히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이은진이었다.

"유승호를 기술 유출범으로 몰고 자신들은 빠져나가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오혁진 실장을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은 지금 한국에 머물고 있잖아요."

"김종문과 필립 황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며칠 전에 미국으로 출국한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럼 혹시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요?"

"김종문으로서는 그럴 이유가 별로 없어요. 왜냐면 본인이 유승호와 접촉한 게 알려졌는데…… 만약 유승호가 기술 유출범이 되어 버리면 자기도 공범이 되는 격 아닌가요?"

"이 사건…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셋업된 걸 수도 있겠네요."

"그 누군가가 박 소장님이 말씀하신 상하이의 리리쥔이라는 건가요?"

강준은 곰곰이 생각을 되짚어봤다. 강준이 유승호 소장을 찾아간 지 일주일 후에 오혁진은 갑자기 휘하의 연구원 세 명과 함께 잠적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회사의 막중한 업무부담과 부당한 대우에 폭발한 연구원들의 집단퇴사였다. 하지만 강준은 사라진 오혁진이 분명 김종문의 회유에 넘어갔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오혁진이 사라진 직후에 언론에 보도된 경기반도체의 기술 유출은 유승호 소장을 범인으로 몰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판에서 온전히 빠져나가려는 인물은 오혁진인지도 몰랐다.

"리리쥔이 무슨 꿍꿍이를 펼치려는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TM하이텍에 포섭된 오혁진 실장을 찾으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오혁진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직도 별다른 소식이 없나요?"

"검찰이 흥신소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휴대폰 위치추적이나 금융거래 내역으로 찾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당연히 해 봤죠. 근데……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그럼 연구원들이 밀항이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이은진은 본인도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쨌든 국정원은 유승호를 기술 유출범으로 보고 있어요. 검찰에서는 혐의가 나오지 않더라도 모든 의혹을 유승호 씨에게 덮어씌우려고 할 거예요."

"사라진 오혁진 연구실장을 조사도 안 하고서요?"

"박 소장님은 오혁진을 기술 유출의 범인으로 보시는 거예요?"

"적어도 이번 사건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유승호 소장이 결백하다는 사실도 밝혀낼 수 있겠죠……."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기술 유출 사건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었다. 무고한 유승호 연구소장을 희생시켜서 말이었다.

* * *

을지로 보험조사사무소.

"세 명 중 한 명이 자택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네, 어젯밤에 정은규 연구원의 친누나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그간 김준혁은 사라진 연구원의 온라인 흔적을 찾고 있었고, 제이콥과 송지희는 연구원 가족들을 전담마크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오혁진 연구실장을 따라간 세 명의 연구원 중 한 명인 정은규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당장 가보자고."

"근데…… 정은규 연구원이 누군가를 만나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하긴 본인도 많이 위축되어 있겠지. 유승호 소장이 검찰에 붙잡혀간 상황에서 까딱 잘못하다간 기술 유출범으로 몰릴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강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 모습을 본 송지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 생각에는 유승호 연구소장을 데리고 같이 가서 설득해 보는 게 어떨까요? 제가 들어보니까 유 소장이 나름 휘하 연구원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더라고요."

"그래? 근데 지금 검찰에서 구속 중이지 않나?"

"내일이 구속기간 만료일이에요. 우리가 유승호 소장을 설득해 보죠."

"……가능하겠어? 지금 심신이 지친 상황일 텐데……."

"맞아요. 지쳤겠죠. 근데 역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유 소장의 결백을 믿고 밝혀 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박 소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유승호는 절대 아니라고요."

송지희의 눈빛은 절실했다. 유승호의 가족들을 만나봤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의 결백을 풀어 주려는 것이었다.

"김준혁 실장, 어때? 경기반도체에서 도면 파일이 복사된 건 확실히 아니지?"

"네, 암호화 시스템에서는 복사된 흔적이 없긴 합니다. 근데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 그게 뭔데?"

"파일이 복사되진 못했는데 시스템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암호화 시스템을 무력화하려고 시스템 관리자에 접속하려고 시도한 거죠."

강준은 그의 예상대로 조직적인 해킹 시도가 있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이걸 뚫지 못한 겁니다."

"확실해?"

"네, 관리자에 접속한다고 해도 접속 흔적이 다 남거든요. 근데 경기반도체의 암호화 시스템에는 6개월 전부터 관리자로 접속에 성공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면을 모니터 화면에 띄워두고 촬영을 한 거군."

"소장님, 그런 촬영 파일이 있다는 건가요?"

"아니, 내 눈으로 확인을 못 했고, 증거도 없는 상태야."

"아…… 만약 그렇게 도면을 빼간 거라면…… 다시 전산화시키는 작업에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겠는데요?"

김준혁의 말에 강준은 언뜻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쩌면 사라진 연구원들은 촬영한 도면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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