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3)
김종문은 어젯밤 필립 황이 했던 얘기가 계속 귀에 맴돌았다.
[생각해 봐요. 형님! 리 처장한테 우리가 끌려갈 필요가 없다니까요!]
[돈이 거기서 나오는데 어떻게 해?]
[회사 대표 누구예요? 형님이 대표! 그리고 내가 등기 이사! 미국은 이사회 결정이 제일 중요해요. 우리 둘 지분 합치면 과점주주. 리 처장이 무슨 수를 쓰건 회사 매각에 태클을 걸지 못해!]
필립 황은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상해기술진출 총공사의 리리쥔 처장을 배신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종문은 일전에 한 번 당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쉽사리 누군가를 믿지 못했다.
아무리 입 안에 혀처럼 달콤하게 군다고 해도 말이었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침대맡의 핸드폰이 울렸다. 경기반도체의 오혁진 연구실장이었다.
"네, 실장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죠? 아 오늘 새벽이었나요? 하하!"
―저녁에 중국 쪽에서 관계자분이 건너오신다고 하신 거 때문에요…….
"중요한 클라이언트죠. 우리가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하려고 해도 결국엔 매출을 올려줄 곳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긴 한데… 요즘 회사 분위기가 좀 예민해서요…… 혹시 저만 가도 될까요?
난감했다. 김종문은 자신이 TM하이텍의 대표이사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리리쥔 처장에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특히 자금지원을 해 주기 시작하면서 리 처장의 태도는 더욱더 고압적으로 변했다.
그런 리 처장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중간점검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간 김종문이 포섭한 경기반도체의 연구원들을 모두 확인하기를 원했다.
"다 오시면 좋긴 한데…… 늦게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솔직히 제가 좀 이해가 안 되는 건…….
통화음 너머 들려오는 오혁진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가는 그였다.
―왜 그렇게 상하이 쪽에만 목을 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필립 이사님께서는 미국 쪽으로 영업을 해 보면 활로가 보일 거라고 하시던데…….
김종문은 아차 싶었다. 어젯밤 새로 온 연구원들이랑 얘기하느라고 테이블 반대편에서 필립 황과 오혁진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신경을 전혀 못 썼다.
근데 그 틈에 벌써 필립 황이 오혁진에게 바람을 넣어 버린 것이었다.
"오 실장님, 사업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쌓아가는 것도 좋지만 결국엔 굵직한 하나가 나머지를 다 먹여 살리는 게 사업입니다!"
―물론 그 부분은 저도 이해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TM하이텍의 대표는 엄연히 저 김종문입니다. 필립 황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필립 이사는 그냥 기술 이사일 뿐이죠."
―아무래도 경영자의 입장은 또 다르겠죠…… 어쨌든 오늘 다른 연구원들은 힘들겠습니다.
김종문으로서는 난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경기반도체를 다니는 이들을 강제 집합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죠. 상하이 쪽 관계자가 일주일은 있을 테니까 그 안에는 한번 다 같이 모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네,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역시 오 실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종문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 테라스로 나갔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필립 이 자식은 잘난 체만 하지…… 눈치가 없어! 눈치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김종문은 주머니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 유심히 살펴봤다.
"이게 정말 보안망을 뚫고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다는 거지? 혹시 이거 믿고 움직이다가 좆되는 거 아닌지 몰라……."
리리쥔 처장이 보내온 USB 안에는 암호화 시스템인 DRM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해킹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고 했다.
김종문은 오 실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에 대한 포섭이 끝나면 그들을 대상으로 D램 나노 설계 회로 도면을 해킹 USB를 통해 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보안이 뭔지 해킹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김종문은 의심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잡다한 생각들을 불러왔다.
"굳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젠장!"
말을 그렇게 했지만, 손목시계를 본 김종문은 서둘러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곧 리리쥔 처장을 태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 * *
광화문 호텔 중식당.
리리쥔은 혼자서 몇십 분째 떠들고 있었다. 현재 중국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정부가 얼마나 반도체 산업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앞으로 중국에서 ‘제조2025’라는 정책을 국가전략으로 내놓을 겁니다. 내년 양회에서 발표될 예정인데, 양회에서 발표된다는 건 실제로 추진이 된다는 뜻입니다."
"……양회가 뭡니까?"
"매년 3월에 개최되는 중국의 양대 정치 회의입니다. 전인대와 정협을 합쳐서 양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인대는 중국 전역의 대표 3천 명이 베이징에서 모여 향후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겁니다. 정협도 정협 대표들이 모여 국정 전반에 대해 회의를 하는 거고요."
필립 황이 비꼬듯이 중간에 한마디를 보탰다.
"그거 진짜 민주주의 아니고 대충 흉내만 내는 거? 맞죠?"
리리쥔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맞은편의 김종문과 오늘 처음 만난 오혁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답했다.
"밖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식 민주주의죠. 우리는 13억 인구의 거대한 대국입니다. 양회는 중국 특색의 효율적인 의사 결정 방식입니다. 한국처럼 양쪽이 찢어져서 싸우고 서로 헐뜯지는 않죠."
필립 황은 리리쥔의 돌려 까는 발언에 헛웃음을 쳤다. 김종문은 그런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리리쥔이 오혁진의 눈에 우습게 보여서 본인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괜히 다 넘어온 오혁진이 다른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낭패였다.
"리 처장님, 어쨌든 반도체 쪽으로도 엄청난 투자가 이뤄진다고 들었습니다."
"시 정부 차원에서 두 팔 벗고 나섰습니다. 알다시피 중국 은행은 거의 국유기업이죠. 그 은행들을 통해서 몇백만 위안의 자금이 동원될 겁니다. 당연히 중국 내 공장을 설립하게 되면 토지사용료가 면제되고 세금도 5년간 면제입니다."
"파격적인 혜택이군요. 앞으로는 중국에 반도체 연구시설을 만드는 것도 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하!"
김종문의 추임새에 리리쥔의 입꼬리가 확 올라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필립 황은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 처장님은 그럼 반도체 산업에 지원하는 공무원이신 겁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혁진 실장이 물었다.
"네 그렇긴 합니다만…… 조금은 특별한 일을 합니다."
"특별한 일이라면……?"
"전 베이징의 중난하이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중난하이라면……?"
"중국을 움직이는 최고위층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이죠."
자신의 입으로 정체를 슬쩍 드러낸 리리쥔이었다. 오혁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꽌시가 좀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긴 했어도 최고위층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혁진은 어쩌면 이게 자신에게 큰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 실장님, 뭐든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지금 중국 정부가 반도체에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제가 TM하이텍을 만든 게 그냥 만든 게 아닙니다. 이런저런 계획들이 다 밑바탕이 된 거죠."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기대감을 한껏 실어주는 김종문이었다.
"그럼 필립 이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넘어간 이후에 매각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이미 매각 대상자는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김종문은 필립 황을 돌아보며 눈짓했다. M&A 시장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읊어보라는 얘기였다.
"펀더멘털만 좋으면…… 와이낫?"
애매하게 대꾸하는 필립 황이었다. 애초에 그를 이 판에 끌어들인 건 리리쥔이었지만, 이제는 묘하게 불편한 관계가 돼 버린 둘이었다.
"필립 이사님, 이제 우리 좀 편하게 털어놓고 얘기해도 될까요? 오 실장님도 이제 우리 사람이 될 텐데 못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네, 좋아요! 전 아까부터 솔직히 좀 불편했거든요. 난 돈에만 관심 있어요. 중국 정부가 어쩌고…… 저쩌고 난 관심 없어요."
서울을 방문한 리리쥔은 속으로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그도 위에다 보여야 할 성과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목표로 삼았던 유승호 연구소장을 포섭하는 데 실패해 버렸다.
김종문에게 믿고 맡겼던 게 탈이었다.
‘무능한 인간 같으니라고……!’
리리쥔 처장은 옆자리에 앉아 허허실실 웃고만 있는 김종문을 속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오 실장님, 우리가 원하는 건 경기반도체가 가진 기술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연구원들을 스카웃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물론 오 실장님을 비롯한 연구원분들이 훌륭한 인재라는 건 틀림없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리 처장은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고는 오 실장에게도 권했다.
"우리는 단시간에 반도체 산업에서 굴기(堀起)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반도체 산업이라는 게 엄청난 규모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저나 다른 연구원 몇몇이 넘어간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죠……."
오 실장은 자신의 몸값을 생각하지 않고 무척 솔직하게 말한 거였다. 그건 매사 가감 없이 말하는 엔지니어의 화법이기도 했다.
"경기반도체가 D램 나노 칩에 있어서는 독보적이지 않습니까?"
"……현재로서는요."
"저희가 원하는 건 칩을 설계할 수 있는 회로 도면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혁진의 머릿속에서는 유승호 연구소장이 떠올랐다. 그가 이미 경고한 바이기도 했다.
"그건 회사 기밀입니다…… 요즘에는 도면도 모두 전산화되어 있는데, 그 전산 데이터가 암호화되어 있어서 쉽사리 가져 나오지도 못하고요."
리 처장은 김종문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김 대표님, 아직 설명을 안 해 주셨나요?"
"아…… 그, 그게… 아직은 시기상조라……."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다고요!"
"네 죄송합니……."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던 김종문은 순간 말을 삼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그리 죄송할 건 없었다. 이 일을 먼저 제안한 것도 리 처장이고, 실패한 유승호에 대한 포섭을 계획한 것도 리 처장이었다.
김종문은 굳이 자신이 리 처장으로부터 질책을 받아야 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옆자리의 필립은 그런 걸 진즉에 깨달았는지 리 처장이 뭐라 하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 지금 바로 말씀드리죠. 오 실장님 여기에 파일을 담아오시면 됩니다. 암호화는 뚫을 수 있는 거니까 문제없이 도면 파일들 담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저보고 회사 기밀을 갖고 나오라고요?"
리 처장의 말에 황당해하는 오혁진 연구실장이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김종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한테 스카웃을 제안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습니까? 이걸로 다른 연구원들까지 설득하라고요? 이거 원…… 진짜 큰일 날뻔했네요! 제가 오늘은 잘못 나온 자리 같네요.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드르륵!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난 오 실장이었다.
"천년만년 경기반도체에 있으실 겁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으셔야죠. 한국 돈으로 20억 원 준비했습니다."
액수를 말하는 리 처장의 말은 오혁진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했다. 평생 벌어도 못 버는 돈. 눈 한번 딱 감으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