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2)
경기반도체 평택공장.
"헤드헌터를 만난 적은 있습니다. 이직을 권유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강준이 만난 유승호 연구소장은 자신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게 몇 개월 전입니까?"
"네, 한…… 6개월은 됐죠…… 사실 회사에서도 기술 유출 때문에 민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뭐 항상 그래 왔지만, 반도체 분야는 워낙 경쟁이 심한 산업이라서요."
"헤드헌터의 이름이 에이스 맨파워라고요?"
"네, 이게 그때 받은 명함입니다. 저도 혹시나 오해를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받아둔 겁니다."
유승호 소장은 회사 노트 표지에 끼워둔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강준은 명함에 적힌 이름을 보고 흠칫 놀랐다. 첩보를 통해 김종문이 이 일에 관여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헤드헌터로 직접 본인이 등판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전면에 나서는 거 아닌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강준은 김종문 같은 인간이 절대 혼자서 설계하고 실행했을 것 같진 않았다.
"이직하라고 추천한 회사가 TM하이텍 아닌가요?"
"네 맞아요.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김종문이 필립 황과 함께 설립한 TM하이텍을 언급하자 유승호의 눈이 커졌다.
"사실 지금 이 사안은 국정원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사안입니다."
"국정원에서요……? 국가 첩보기관에서 말입니까?"
"네, 기술 유출은 국가적인 사안이기도 하니까요."
"저보고 지금 그 말씀을 믿으라는 겁니까? 재보험사에서 나온 보험조사관님의 말씀을요?"
유승호는 강준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유승호 소장님을 알았겠습니까? 국정원은 재보험사인 저희를 통해서 이번 사안을 지켜보려고 하는 겁니다. 때에 따라선 전면에 나서려고 하겠죠."
기술 유출 피해보험이라는 공적 보험의 명분을 쥔 정부에 국정원도 협조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제한된 정보를 주고 SS재보험의 보험조사관 박강준의 조사를 지켜볼 뿐이었다.
유승호는 강준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이 만난 헤드헌터가 언급한 TM하이텍을 알고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저는…… 유 소장님이 경기반도체의 기술을 외부로 유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강준의 말에 그는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제안한 금액은 연봉 30만 불에 가족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쿠퍼티노(Cupertino)에 제공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조건이라면 그리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지금 경기반도체에서도 꽤 좋은 조건으로 일하시고 있지 않나요?"
"그렇죠. 근데…… 옵션을 제시하더군요."
"옵션요?"
"네, 지금 경기반도체에서 생산하고 있는 나노급 D램의 회로설계를 그대로 구현하게 되면 회사 지분의 일부와 100만 불을 일시에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D램의 회로설계라면……?"
유승호는 아직도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을 이어갔다.
"도면을 그대로 들고나오라는 얘기죠. 수십 장의 설계도면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내려면…… 그건 저 혼자만의 힘으로 힘들뿐더러 시간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꽤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강준은 유승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 했다.
"소장님, 이걸 한번 봐주시죠."
강준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건 국정원에서 SS재보험에 제공한 필립 황의 사진이었다. 유승호 연구소장이 테이블에 놓은 사진을 만지려고 할 때, 강준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유승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준은 그의 기억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그곳은 경기반도체의 공장 연구소였다.
[오 실장, 혹시 어제 그 헤드헌터 만났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이고…… 미련한 사람아! 지금 이 회사에 비밀이 어디 있나?]
[혹시 소장님께도 연락이 온 겁니까?]
오 실장이라는 인물은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유승호에게 되물었다. 그는 섬세한 금테안경에 창백한 얼굴을 가진 인물이었다. 좁은 탕비실 공간. 유승호는 근무시간에 남들 모르게 그를 불러낸 상황이었다.
[여기 연구원들 거의 대부분한테 접촉했어! 연봉은 얼마나 부르던가? D램 나노 설계안을 대가로 옵션을 제시했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근데, 소장님한테는 얼마를 불렀습니까?]
[오 실장!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 사람들은 여기 기술만 빼가면 끝나는 거야.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건 그냥 우리를 낚으려고 하는 거겠지……!]
유승호의 말투는 진지했지만, 오 실장이라 불리는 연구원은 생각이 다른 듯했다.
[솔직히…… 연구소장님이야 여기서 탄탄대로로 자리 잡으셨겠지만, 저희는 또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까? 매년 연봉협상도 쉽지 않고, 언제까지 여기 회사에 다닐지도 모르는 상황이고요.]
[……그렇다고…… 오 실장은 남들한테 기술을 팔아먹으면서까지 이직하겠다는 건가?]
[소장님! 그럼 기술자들은 회사도 자유롭게 옮기면 안 된다는 겁니까?]
오 실장의 말에 유승호는 뭐라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평균치 월급보다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고액 연봉까지는 아닌 오 실장이었다.
[……자네…… 정말…….]
[그리고 말입니다. 소장님, 제가 이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가진 능력을 다른 회사에 가서 펼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는 겁니까? 혹시 제가 이직하더라도 뒤에서 무조건 기술 팔아먹는다는 악담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 실장은 유승호 소장을 밀쳐내고는 좁은 탕비실에서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유승호는 우두커니 그런 오 실장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승호 소장님은 필립 황을 모르시겠군요."
"이 사람이 필립 황입니까?"
"네 TM하이텍의 대표죠. 미국 영주권자고요. 아마 김종문 대표의 이직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만나게 됐을 사람입니다."
유승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신의 부하직원들을 더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소장님 연구소에 또 누가 넘어갔습니까? 꽤 많은 연구원이 TM하이텍으로 넘어간 거 같은데요?"
넘겨짚는 강준의 말에 유승호는 덜컥 겁이 났는지 고개를 떨구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마 한 명을 섭외하려고 하진 않았을 겁니다. 여러 명에게 접촉했겠죠."
"글쎄요…… 전 들어본 적 없는 일입니다."
"아마 본인들도 산업스파이 범죄를 저지르는 줄도 모르고 외부로 자료를 빼돌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지나친 말씀입니다……!"
잠시 침묵한 유승호 연구소장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아까 국정원에서 저희 경기반도체를 주목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건 사실인가요?"
"네, 이런 시기에 괜한 빌미를 줬다간 당장 산업스파이로 몰리고 말 겁니다."
"부하직원들은…… 제가 더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회사 내의 D램의 회로설계 도면은 암호화가 되어 있습니다. 파일을 복사한다고 해도 인증된 컴퓨터가 아니라면 열지도 못할 겁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미 경기반도체에 파일을 암호화하는 DRM(Digital Right Management) 보안 기술이 적용된 상태라는 거였다.
"만약 인증된 노트북을 외부로 반출한다면요?"
"그렇다고 해도 누가 파일에 접속했는지 그리고 몇 번이나 열어봤 는지가 기록에 남습니다."
강준의 생각보다 훨씬 보안에 신경을 써 둔 경기반도체였다.
"유 소장님, TM하이텍은 미국에 만들어진 신규법인이지만…… 그 배후가 무척 의심스럽습니다. 회사의 실체도 없는데 벌써 한국지사가 만들어졌고요. 한국의 반도체 기술을 빼가겠다는 의도가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도체 회로설계는 직접 생산하지 않는 팹리스(Fabless) 업체이기 때문에 제조설비를 가진 파운드리 업체가 많은 한국에 지사를 세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유승호는 자신이 TM하이텍을 변호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방어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소장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구원분 중에 오 실장이라는 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오혁진 연구실장 말씀입니까?"
강준은 오 실장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유승호의 기억에서 본 걸로 답했다.
"네, 금테안경을 쓰신 분이요."
"지금 한창 업무 중이라 좀 곤란하긴 한데……. 근데 오 실장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물어볼 사안들이 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죠."
접객실을 빠져나간 유승호 연구소장은 한참이 돼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이 넘게 지났을 때, 유승호와 함께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오혁진 연구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첫마디는 무척 퉁명스러웠다.
"뭡니까? 한창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고…… 뭐 경찰이라도 되는 거예요?"
"전 SS재보험의 박강준 보험조사관입니다. 외람되지만 저희 재보험사에서는 산업자원부의 예산으로 이곳 경기반도체에 기술 유출 보험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국민의 세금이 경기반도체의 기술 보호에 쓰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적어도 그 세금이 새어나가지는 않는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국가의 핵심기술이 새어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준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
"공무원들이 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 건지 전 도통 모르겠네요. 기술 유출 보험이라니……."
"오 실장, 일단 얘기나 한번 들어봐. 지금 국정원에서 우리 회사를 주목하고 있다잖아?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잖아?"
"네? 국정원요……? 미치겠네! 아니, 국가에서 기업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이나 잡으려 하고…… 이러니 나라 발전이 안 되지…… 참나!"
국정원이 접근했다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오혁진은 되레 목소리를 높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의 검지는 미세하게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굴로는 감췄지만, 몸으로는 전부 숨기지 못하지…….’
그때 오혁진의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뒤집어 진동을 멈췄다.
"누구 전화인데 안 받으시는 겁니까?"
"집사람 전화입니다. 왜요? 산업스파이하고 내통이라도 할까 봐서요?"
"이봐, 오 실장! 말을 왜 그렇게 하나! 이분도 결국은 우리 회사를 생각해서 오신 거 아닌가?"
옆에 있던 유승호 소장이 오히려 오 실장을 말렸다. 그러는 사이 강준은 오 실장이 덮고 있던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졸지에 강준의 손에 깔리고 만 오 실장의 손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이게!"
강하게 반발하는 오 실장이었다.
"봐요! 이거 보이시죠? ‘아내’라고 핸드폰에 찍혀있는 거요! 괜히 사람을 의심하고 말이야! 보험조사관이라는 사람이 진짜 막무가내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얼굴이 벌게진 오 실장이 강준을 몰아세웠다. 여차하면 자신을 함부로 의심한 일을 문제 삼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강준은 이미 오 실장의 기억을 읽어 냈다.
"오혁진 연구실장님, 김종문 대표님과는 친분이 두터우신가 봅니다."
"네……?"
오 실장의 당당하던 눈빛이 흔들렸다.
"어제 새벽까지 김종문 대표와 꽤 비싼 곳에서 술을 드셨군요. 보통의 직장인들이라면 가기 힘든 곳으로 보이는데요."
옆에 있던 유승호 연구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