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기술 유출 피해보험 (1)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천안의 부동산 업자 김종문은 한동안 조용히 지냈지만, 몇 달 전부터 사업병이 다시 도졌다.
그가 새로 시작한 사업은 헤드헌팅 사업이었다. 기업체 인사팀과 긴밀한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헤드헌팅 사업은 언뜻 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가 그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딱히 잘 보여야 할 거래처를 뚫지 않아도 인력을 송출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상해기술진출 총공사.
나름 현지에서 공기업이니 일거리가 끊길 염려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출소하고 나서 상하이를 비행기로 오간 횟수만 수십 번이었다. 갈 때마다 김종문을 인맥을 넓히겠다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고미술품 보험사기에 얽혀 내연녀에게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한때나마 청도를 들락거렸던 게 김종문은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건물 관리만 하며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좀이 쑤신 것도 한몫했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미국에 회사를 세워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아무래도 기술 유출이다 뭐다 해서 한국에서도 불필요한 오해를 살 이유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지만 한번 뒤통수를 맞았던 김종문은 매사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니까…… 리 처장님 말씀은…… 제가 미국에 회사 하나 정도는 투자하라는 말씀이군요.]
[그게 저희가 김 대표님께 바라는 조건입니다.]
사업이라는 게 공짜는 아니니까. 김종문은 그 정도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사업파트너인 리리쥔 처장이 왜 굳이 미국에 회사를 세우라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김종문은 그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린스호텔 라운지 커피숍.
김종문이 만날 사람의 이름은 필립 황. 펜실베니아 주립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에서 일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먼저 커피숍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김종문은 한눈에도 껄렁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가 필립 황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김종문 대표님?"
"필립 황 씨죠?"
"네, 필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보다 연배도 한참은 높으신 거 같은데. 하하!"
미국인 특유의 과장되고 밝은 성격을 가진 필립 황이었다. 그는 한국 문화를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첫인사를 나눴다.
"리리쥔 처장님이 대단한 이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하던데요"
"에이 대단하긴요……! 그냥 펀드 하나 작게 했었습니다. 중국 기업들 투자업무 봐주다가 리 처장님하고 알게 된 거고요."
"재미교포신가요?"
"제가 중학교 때 미국으로 왔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교포 1.5세대라고 할까요? 근데 뭐, 서로 편하게 하자고요. Korean businessmen are too uptight! (한국 사업가들 너무 격식을 차려!)"
"뭐라고 한 거예요?"
필립 황이 알아듣지 못할 영어를 자기 앞에서 나불거리자 살짝 미간을 좁히는 김종문이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어쨌든 우리는 같이 미국에 회사를 세우는 겁니다. 형님 맞죠?"
"리 처장이 나보고 그렇게 하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난 미국을 가 보지도 않았는데?"
형님이라고 붙임성 있게 다가오는 필립 황의 말투에 묘하게 말려 들어가는 김종문이었다. 김종문도 슬슬 말을 편하게 놨다.
"실리콘밸리! 전 세계 스타트업이 모여드는 IT산업의 본고장! 나 본고장이라는 표현 좋아해요. 하하!"
"그러니까…… 난 거기에 왜 회사를 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중국에서 일할 사람들 연결해 주는데 말이야……."
"노노!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에 회사가 있어야 미국 투자회사들에서 투자를 받죠!"
김종문에게 투자란 곧 남의 돈을 의미했다.
"받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게 뭐 맘대로 되나?"
"내가 그거 전문이잖아요! 이 프로젝트에 내가 합류한 이유. 반도체 회사 만들어서 투자금 끌어오고 10배, 100배로 뻥튀기해서 되팔기!"
김종문은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리 처장에게 필립 황을 만나 미국에 회사 하나를 만들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김종문은 그저 자금 돌릴 페이퍼컴퍼니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저기…… 필립, 무슨 반도체? 그거 대기업들이 뛰어들어서 하는 거 아니야?"
"반도체 공장 크죠. 근데 거기에 들어가는 장비 회사, 설계 회사도 엄청나게 많아요. 우린 그중에서 하나를 차리게 될 거예요. 바로 이 사람 섭외해서."
필립 황은 김종문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건 누군가의 이력서였다. 김종문은 헤드헌팅 일을 준비하면서 엔지니어의 이력서를 많이 보아왔다.
"여기 유승호 씨가 반도체 회로설계의 권위자죠. 미국 대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으로 귀국했어요. 김 대표님은 이 사람 데려다가 실리콘밸리에서 회사 만들면 되는 거예요."
"잠깐…… 어디 보자……."
유심히 이력서를 들여다보던 김종문이 필립 황에게 물었다.
"스탠퍼드 대학이 미국에서 좋은 대학인가?"
"거기 끝내주지! 실리콘밸리가 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줄 알아? 스탠퍼드 출신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야."
김종문은 필립 황의 말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또 한편에서는 리 처장이 그를 자신에게 붙여 준 이유도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경기반도체에서 근무했네…… 거기 대기업이라 연봉이 만만하지 않을 텐데. 우리가 제시하는 연봉에 오려고 하겠어?"
"머니? 머니 걱정은 하지 마요. 중요한 건 엔지니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리 처장은 김종문에게 미국에 회사를 세우는 자본금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페이퍼컴퍼니가 아니라 진짜 엔지니어를 데리고 오는 거라면 말이 달라지는 거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회사를 세워야 하나……?"
"물론이지. 실리콘밸리에 꼭 회사를 세워야 해. 내가 한국에 온 목적도 그거고!"
필립 황의 의지는 무척 확고해 보였다. 마치 자신의 회사를 창업하는 것처럼 말이었다.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그러지…… 필립, 당신은 근데…… 여기서 당신 역할은 뭐야?"
김종문의 질문에 필립 황이 기다렸다는 듯 검지 손가락을 말아 보였다.
"내가 잘하는 거 하나 더! 나 돈 냄새 잘 맡아. 지금은 차이나머니의 시대! 돈 잘 쓰는 쪽에 붙어야. 돈 벌 수 있는 거야. 머니!"
"그건 잘 알겠는데…… 차이나머니인지 뭔지를 어떻게 쓸어 담냐고?"
필립 황은 그제야 뭔가 소통이 잘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못 들은 거야? 돈…… 상하이 회사에서 주기로 했어."
"상해기술진출 총공사?"
"그래, 맞아! 리리쥔이 회사 세우는 돈 우리한테 전부 다 주기로 했어. 유노?"
김종문은 잘 이해가 안 됐다. 상해기술진출 총공사에서 자신을 파트너로 정한 건 일정 금액의 투자를 본인이 하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회사 설립 자금을 비롯해 운영비를 전부 다 대준다? 뭔가 이상했다.
‘근데 언제부터 이 자식은 나한테 반말이지……?’
김종문은 이내 눈앞의 필립 황에 대한 호기심으로 생각이 옮겨 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리콘밸리에 회사를 세운다는 건 그의 말처럼 남들에게 내세우기 좋은…… 멋들어진 일인지도 몰랐다.
* * *
을지로 SS재보험 본사.
김성호 이사는 오랜만에 강준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박 소장, 자네 요즘 뭐 하고 있어?"
"지난번 장안해운 사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일단 좀 쉬고 있습니다."
"뭐? 자영업자가 쉬면 어떻게 해? 벌써 몇 달이나 지났잖아?"
"에이…… 석 달입니다. 석 달! 자잘한 일들은 들어오는데 돈 되는 일이 안 들어와서 그렇죠."
사실 그간 강준은 경영진이 모조리 구속되어 버린 장안해운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장안해운의 대표였던 장경훈은 교도소 안에서 더는 선박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차피 회사 지분은 처분한 상태였기에 선박만 판매하면 깔끔하게 정리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남은 장안해운의 직원들이었다.
결국 강준이 찾아간 곳은 대인해운의 후계자이자 지금은 투자사인 대인벤처스의 구민철이었다.
[박 소장님, 장안해운은 알아보니까 수익성이 별로 안 좋더라고요.]
[그렇긴 하죠. 여객선 운항이라는 게 크게 돈은 안 되죠….]
[차라리 인근 섬을 도는 관광상품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먼 곳을 오가며 애매한 화물 사업은 정리하고요.]
[진짜요……? 역시 제가 구 대표님 찾아오길 잘했습니다! 대표님 없었으면 장안해운은 해체였거든요.]
[하하!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이사회 통과 절차가 남아있긴 합니다.]
대인벤처스가 장안해운을 인수하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고, 그 기간 강준은 별다른 굵직한 사건을 맡지 못했던 거였다.
김성호 대표는 그런 강준의 상황을 알지 못했기에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
"좌우간 자네 덕분에 우리 SS재보험의 언더라이팅 능력이 한 단계 올라간 건 사실이야! 선박보험을 취급하는 해외 보험사들도 우리 쪽에 재보험 의뢰를 해오기 시작했거든."
"잘됐네요. 이제 한국에도 든든하게 믿고 맡길 재보험사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김성호 대표는 팔짱을 끼고는 강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보아하니 뭔가 일거리를 맡길 게 뻔했다.
"대표님, 그냥 바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뭡니까? 이번에는? 별로 돈이 안 되는 일인가 봐요. 제 눈치를 다 살피시는 걸 보니까요."
"허허! 이제 아주 귀신이 다 됐구먼!"
머쓱하게 웃는 김성호 대표는 준비해 뒀던 자료집을 강준에게 내밀었다. 표지에는 산업자원부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정권 초기라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건데…… 기술 유출 보험상품을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겠다는 거야."
"그럼 보험사들의 손해가 크지 않을까요? 기술 유출로 인한 손해액을 산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요."
강준은 회귀 전 얼핏 들었던 기업비밀 보험이 논의만 되다가 폐지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최근에 기술 유출사례가 많나 봐. 아무래도 한국 제조업이 잘 나가다 보니 최근에 해외에서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기술 탈취 시도가 좀 있었나 봐."
"더 중요한 건 인력 유출이겠죠."
강준의 말에 김성호 대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정부에서는 기술 유출 보험상품을 공적 보험의 형태로 가져갈 모양이야. 아무래도 민간 보험사에서는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재보험사인 SS재보험에 언더라이팅을 맡긴 거군요."
"맞아. 찾아보니 해외에서는 기술 유출 보험이라는 게 있긴 하더라고. 보험사 입장에서야 달가운 상품은 아니겠지만, 기업들을 위해서는 정액제 형태로 보험이 있어야 할 거 같긴 하더라고."
김성호 대표는 이미 기술 유출 보험을 공적 형태로 가져가는 것에 대해 찬성하고 있었다.
"근데 최근에 반도체 쪽에서 문제가 터졌어. 박 소장, 자네 경기반도체 알지?"
"네, 알죠. 대한민국에서 경기반도체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거기서 첩보가 들어왔어."
"누가 기술 유출한다는 첩보요?"
"그래…… 사실 이번에 기술 유출 보험상품을 시범적으로 적용한 곳이 바로 경기반도체거든. 어찌 보면 국내 제조업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인데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좌초될지도 몰라."
김성호 대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진심으로 이번 일에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기술 유출 사태를 막아야겠군요."
"이번 사건 비용은 우리 SS재보험에서 지불할 생각이야. 근데 기술 유출 보험기금에서 나가는 돈이라 많이는 못 줘."
"이해합니다. 저도 석 달 쉬긴 했지만, 회사 굴러가는 데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염려 마시죠."
강준은 흔쾌히 사건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김성호 대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