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선박보험 언더라이팅 (8)
새천년교회 개척단장인 한영숙은 여신도 한 명과 함께 제3금융권 지점에 들어섰다. ‘웰컴신용’이라고 쓰인 지점에 들어서자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한영숙을 반겼다.
"지점장님은요?"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미 그들에게 한영숙은 VIP고객이었다.
"권사님, 정말 대출이 나올까요?"
"그럼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여기 지점장님이 저랑 오랜 친분이 있으세요."
"……네."
한영숙의 말마따나 일행이 들어가자 지점장은 입에 귀에 걸린 채 환대했다.
"세인트 빈센토 섬 프로젝트는 잘 되어 가시죠?"
"네, 이제 곧 그곳으로 떠나는 일만 남았는걸요."
"부럽습니다. 저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애 엄마랑 아들내미가 발목을 잡는 바람에 한동안에 여기 묶인 신세입니다. 허허!"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지점장을 보자 한영숙을 따라온 여신도는 긴장이 한층 풀렸다. 그녀는 신용대출로 받을 2천만 원을 가지고 세인트 빈센토 섬으로 갈 여비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자! 서류를 한번 볼까요?"
"은정 씨, 준비한 거 지점장님 드리세요."
"네……."
여신도는 고분고분 가져온 서류를 꺼내 놓았다. 그걸 심각한 표정으로 살피던 지점장은 대출 승인을 위한 요구 조건이 다 채워진 걸 확인하고는 한영숙과 음흉한 눈빛을 교환했다.
"보니까 신도님은 신용이 좋으시네요. 어디 연체한 데도 없으시고, 저희 웰컴신용에서는 이번 달 프로모션 기간이기도 해서 추가로 오백은 더 나올 거 같네요. 하하!"
"은정 씨, 이건 분명 하나님의 계시에요! 이제 낙원에서 은혜로운 삶을 사는 것만 남았어요."
"권사님 덕분이에요. 제가 낙원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힘 써주셨잖아요. 이곳은 제게 지옥이나 다름없었거든요."
"이제 모든 걱정 싹 다 털어 버리세요. 낙원으로 가게 되면 마음의 평안을 찾으실 겁니다. 우리 같이 기도할까요?"
한영숙은 자연스럽게 지점장과 여신도의 손을 마주 잡고서는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주 예수 우리를 구원하사! 지옥 불에서 어린 양들을 구하시고……. 은혜로운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슬며시 눈을 뜬 지점장은 맞은편에서 역시 눈을 뜨고 기도문을 외고 있는 한영숙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한 건 했다는 듯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매님들 밖에 손님이 온 모양이네요. 이 서류는 제가 직원한테 말해서 한 시간 내로 대출 나갈 수 있게 해드릴 테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점장님 천천히 다녀와요. 저흰 여기 있을게요."
"커피는 저쪽에서 있으니까 타 드시면 되고요."
벌컥!
지점장이 문을 열기도 전에 바깥에서 지점장실을 향해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지점장이 들이닥친 남자들에게 물었다.
"여기 한영숙 씨 계시죠?"
"네? 저기 저분이신데……."
지점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들은 한영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복이었지만, 그들은 한눈에 봐도 형사들이었다.
"한영숙 씨, 당신을 사기죄로 긴급체포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영장 갖고 왔어요?"
사복형사들을 뒤따라 들어온 이는 김학필 반장이었다.
"이거 찾으십니까?"
김학필은 한 손에 체포영장을 꺼내 들고 한영숙에게 보였다.
"한영숙 씨가 새천년교회 소속인 다수의 신도에게 신용대출을 받게 하고 그 돈을 갈취한 혐의입니다!"
"잠깐만요. 피해자가 있어야 혐의가 성립하죠."
"왜 피해자가 없어요? 세인트인지 뭔지 어쩌고 그 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경찰에다 단체로 신고를 했는데 무슨 소리야!"
한영숙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 섬에서 나오는 배가 없을 텐데……."
"교회 지도부에서 아예 무인도를 만들어 놓고 못 나가게 했더라고요! 여권도 일체 뺏어 놓고!"
"그러니까…… 신도들을 누가 빼돌렸냐고요?"
김학필 반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빼돌리긴 누가 빼돌려? 그야말로 노예 섬이던데? 김 경사 여기 지점장도 같이 체포해."
"네? 전…… 왜?"
"대출 과정에서 본인 확인도 안 거치고 나간 대출이 수십 건이더라고요. 서류만 받아놓고 그 서류를 재탕해서 불법 대출을 승인한 거겠죠?"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가 다 통화로 본인한테 대출 확인을 하는데……."
"신도들 핸드폰을 여기 있는 한영숙 씨가 다 걷어서 갖고 있었다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김학필 반장의 추궁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지점장이었다.
"아니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목소리까지 일일이 확인해요?"
"기지국이 한 군데로 나오더라고요. 발신지는 한영숙의 자택으로 나오네요. 아쉽죠? 교회 주소로 했으면 변명이라도 할 텐데요. 아! 맞다! 신도들이 해외로 출국한 이후에도 계속 대출이 승인됐더라고요. 그건 또 어떻게 변명하시려나?"
김학필의 손짓에 형사들이 지점장과 한영숙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는 끌어냈다.
"형사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전 세인트 빈센토 섬에 꼭 가야 해요……."
여신도는 김학필 반장에게 매달리듯 호소했다. 돈을 갈취당할 뻔했던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를 감싸고도는 형국이었다.
"김은정 씨죠?"
"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죠?"
"지금 본인 부모님께서 경찰서에 와 계십니다.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저희 부모님이요?"
입술을 달달 떨면서 대답하는 김은정이었다. 그녀에게 부모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낙원인지 뭔지 하는 섬으로 갔다가는 탈출도 못 하고 가죽 공장에서 평생 노예 생활을 했을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세인트 빈센토는 선택받은 자들의 신앙공동체예요! 일부러 흠집 내려고 하는 거죠……? 권사님!"
김은정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는 걸 견딜 수 없다는 듯 울먹이며 한영숙에게 외쳤다. 하지만 한영숙의 태도는 웰컴신용의 지점에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은정 씨, 경찰에 가서도 우리 신앙공동체를 배신하지 마세요.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의 믿음을 박해하고 있는 겁니다!"
심리적으로 무너진 김은정을 따뜻하게 다독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을 빌미로 겁박하는 한영숙이었다.
"김은정 씨, 저 여자 말 듣지 말아요. 한영숙은 대출 사기로 전과만 5범인 사람입니다!"
김학필의 말에 김은정은 자신이 쥐고 있던 일말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몇 개월간 준비했던 낙원의 섬, 세인트 빈센토 섬으로의 이주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전주지방법원 형사 법정.
박상훈 목사는 황인규를 비롯한 장막파 신도들과 함께 법정에 섰다. 김갑수 선장을 살해한 혐의를 비롯해 50여 명의 새천년교회 신도들을 세인트 빈센토 섬에서 감금한 혐의였다.
"박 소장, 어떻게 장경훈 대표가 그렇게 쉽게 털어놓은 거야?"
"뇌물죄야 몇 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본인이 죽을 것 같았겠죠. 목숨 앞에서 장사 있습니까?"
강준은 전주까지 내려온 SS재보험의 김성호 대표와 함께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봤다. 검사는 두껍게 쌓인 자료를 책상에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질문했다.
"피고 박상훈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김갑수 씨가 사망한 날 해상 위의 선박에 있었습니까?"
"……아니요."
"대신 박상훈 씨의 지시를 받은 천광균 씨가 그 자리에 있었겠죠?"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럼 천광균 씨에게 묻죠."
검사는 박상훈과 한자리 떨어져 앉은 천광균을 향해 동일한 질문을 했다.
"김갑수 씨가 도박에서 돈을 모조리 따자 새천년교회 장막파 신도들을 해상으로 불러들였죠?"
"아니요.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검사는 둘이 그렇게 나올 줄 예상했다는 듯 증인 한 명을 불렀다. 사기죄로 기소된 새천년교회 개척단장 한영숙이었다.
그녀는 천광균과는 다르게 애초부터 믿음으로 새천년교회에 합류한 게 아니었었다. 털어먹기 좋은 먹잇감이 그곳에 있었고, 개척단을 통해 교회 지도부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신앙이란 그저 도구였을 뿐이었고, 이렇게 된 마당에 검사와의 형량 협상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새천년교회에서는 박상훈 목사의 말이 법이에요. 아무도 그에게 반박을 못 했어요."
"박상훈 목사가 직접 김갑수 선장의 살해를 지시한 걸 들은 적이 있습니까?"
"네, 들었어요. 김 선장이 원래는 협조하기로 했는데, 배신했다고 했죠. 아시잖아요? 새천년교회에서 배신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요."
"어떻게 다루죠?"
"비밀조직인 장막파를 통해서 처단해요. 어떤 식으로든 벌을 내리죠."
검사는 박 목사와 함께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황인규를 향해 다가갔다.
"그날 밤, 고속보트 두 척을 빌려 해상으로 나갔죠?"
"……아니요. 안 나갔습니다."
"이미 고속보트의 선주가 진술했습니다. 그날 황인규 씨가 배를 빌리러 왔었다고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 이건 다 우리를 핍박하려는 음모예요! 저 여자도 더러운 배교자일 뿐이라고요!"
흥분한 황인규의 말은 재판부의 새천년교회에 대한 신뢰를 더 무너뜨렸다.
"재판장님 이 사건에서는 결정적으로 두 명의 목격자가 있습니다. 당시 선박에 있었던 사람 중에 새천년교회와 연관되지 않은 두 명이죠."
그 둘은 뇌물죄로 재판을 받는 중인 장경훈과 서해안 선박수리소의 박형식 사장이었다.
해상에 버려진 김갑수 선장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지만, 살인죄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둘의 증언이 한 시간가량 이어졌고, 판사는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폐정을 선언했다.
"최종 선고는 2주 후에 열겠습니다."
땅! 땅!
재판이 끝나자 김성호 대표는 강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소장 수고가 많았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알겠습니다. 근데 대표님, 같이 먹을 사람이 있는데 합류시켜도 괜찮을까요?"
"어? 누군데?"
"이번 사건 해결하면서 협조해 준 형사님들요."
"그럼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히 대접해야지. 가자고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강준은 오늘따라 실실 웃으면서 앞장섰다.
"가시죠. 제가 전화해서 예약해 놨습니다."
"웬일이야? 자네가 이렇게 센스있는 사람이 아니었잖아."
"에이 사람이 발전도 하고 그래야죠."
잠시 후, 강준에 김성호 대표를 앞장세워 들어간 곳은 시내의 고급 한우집이었다. 방문을 열자 10명도 넘는 형사들이 쭉 도열해 있었다. 김학필 반장과 함께 일하는 강력계 형사들이 총집합한 것이었다.
"어! 박 소장님 오늘 고기 사신다고 하셔서 다 모였는데……."
함께 온 김성호 대표를 보고 김학필 반장은 분위기가 어떻다는 걸 대충 눈치챘다. 강준이 김성호 대표에게 내세워 군산 경찰 강력계에 고기 회식을 시켜주는 거였다.
"와! 어째 오늘 신나게 데려온다고 했더니만 역시! 뭐 어떻게 해? 맛있게 먹어야지!"
김성호 대표는 손바닥으로 강준의 등을 한 대 때리고는 씩 웃었다. 강준이 얄밉기는 하지만 밉지는 않다는 표정이었다.
"내 소개를 하겠습니다. SS재보험의 김성호 대표라고 합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박강준 소장을 도와주셨다니 제가 대신 인사드리죠."
김성호 대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내 특유의 넉살로 형사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