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선박보험 언더라이팅 (7)
한 달 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88km 지점
수비크(Subic) 해안.
300명 이상을 태울 수 있는 여객용 선박이 여러 채 정박해 있었다. 부둣가를 미끄러져 가듯 달리는 밴에는 박상훈 목사와 고민재 과장, 그리고 이제는 장안해운 대표가 된 천광균 이사가 타고 있었다.
"고 과장님 여기 필리핀 교통부에서 대한선급의 인증만 받게 되면 곧바로 운항 승인을 해 준다고 했습니다."
"일이 잘돼 가고 있다는 얘기네요?"
"그럼요, 별 탈이 있을 리가 있나요? 우리에겐 고 과장님이 계신데요? 하하!"
박상훈 목사의 농담에 고 과장은 호응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도 언제든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서해안 선박수리소의 박형식 사장은 해상에서의 도박판이 벌어진 날 이후에 큰 거 한 장을 먹고는 나가떨어졌다. 그도 나름의 욕심이 있었겠지만, 김갑수 선장이 물고기 밥이 되는 걸 목격하고는 장안해운의 행보에 거리를 뒀다.
물론 장안해운에서 나오는 기존 선박의 수리 물량은 날름날름 받아먹었지만 말이었다.
"저도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건 제 영역이 아니라 잘 모릅니다. 오히려 저보다는 고 과장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책임을 떠넘기는 박 목사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고 과장이었다.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 버린 그였다.
"일단 군산항으로 입항시켜서 구조시설 보강하고, 평형수 조정합시다."
"고 과장님, 선박은 한국으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네? 여기서 수리하겠다고요?"
"한국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을 겁니다. 굳이 그럴 이유는 없을 것 같고요."
처음 듣는 얘기에 화들짝 놀라 박 목사를 돌아보는 고 과장이었다.
"사전에 그런 얘기는 없었잖습니까! 그리고 여기 필리핀 선박 수리 능력으로 제대로 된 증축이 될 것 같습니까? 잘못하다간 큰 사고가 납니다. 해상사고는 한 번 났다고 하면 대형 사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대비가 되어 있습니다."
흥분한 고 과장의 말에 침착하게 답하는 박 목사였다.
"네……? 대비가 되어 있다니요?"
"국제 해상보험에 새로 가입했습니다. 2천억 원짜리 보험이니 웬만한 사고가 터져도 수습이 가능할 겁니다."
"한국의 재보험사에서도 받아 주질 않았는데…… 어느 국제 해상보험사가 가입을 시켜 줬단 말인가요?"
박상훈 목사는 마치 은혜라도 받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중국의 밍싱보험입니다. 우리 교회와는 인연이 깊죠."
고민재 과장은 해외 해상보험과도 일을 해 봤지만, 밍싱보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밍싱보험은 최근에 중국 국영 보험사인 안생보험을 인수한 곳입니다. 어쩌면 SS재보험 같은 국내 재보험사보다 훨씬 안정적일 겁니다."
"그럼…… 신명보험에 가입된 해상보험 요율이 올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네, 거긴 방해꾼들도 있지 않습니까? 굳이 한국의 보험사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죠."
박상훈 목사가 말하는 방해꾼이란 보험조사관 강준과 군산경찰서 김학필 반장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고민재 과장이 그간 선주들과 담합하며 인증검사를 대충 눈감아주긴 했어도,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기본은 지켰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 그 선을 넘어서는 거였다.
"과장님도 언제까지 대한선급에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저보고 장안해운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란 말입니까?"
박 목사의 유혹에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고민재였다. 김갑수 선장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고민재는 자신이 먼저 장안해운의 임원으로 영전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독박 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 과장은 이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두는 데 더 고심해야 하는 처지였다.
근데 필리핀 현지에서 선박을 개조하자고?
"여기 선박수리소도 꽤 쓸 만합니다. 한국에서 증축 공사를 해야 한다는 건 선입견이지요."
"목사님,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현장을 모르셔도 너무 모르십니다!"
고민재는 흥분한 목소리로 수비크 만의 도크(dock)에 세워진 구형 선박들을 가리켰다.
"지금 저 상태로 운항할 수 있다고 보세요? 디젤 엔진부터 갈아치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화물 운송도 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선체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그게 그냥 되는 줄 아십니까? 배관, 전기, 통풍, 조명 설비들이 싹 다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용접은요! 용접에 얼마나 기술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고 과장은 이곳에서 선체 구조를 변경한다면 도저히 인증을 자신의 이름으로 내주기 힘들 것 같았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겁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실 거니까요."
박 목사는 흥분한 고 과장을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태연한 얼굴로 미소까지 지으면서 고 과장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목사님!"
그 상황을 지켜보던 천광균 이사가 다시 반발하려는 고 과장을 조용히 말렸다.
"과장님, 향후 절차적인 건 저랑 다시 얘기하시죠."
"뭘 다시 얘기한다는 겁니까! 지금 나 엿 먹이려고 환장했습니까?"
고 과장은 결국 자기 속마음을 바닥까지 내보였다.
* * *
며칠 뒤, 제이콥은 현지인들과 함께 수비크 선박수리소에서 선체 개조작업을 시작한 장안해운 소속의 선박에 올라탔다.
현지에서 채용된 관리감독관의 한 사람으로 말이었다. 그를 그곳에 소개한 관리자 마이크는 제이콥으로부터 사전에 두 달 치의 월급을 몰래 받았다.
"이봐, 제이콥 당신은 선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균열 간 곳 카메라로 찍어!"
"네, 알겠습니다."
제이콥은 이미 장안해운이 한국의 해양수산부로부터 허가를 맡은 구조변경 도면을 입수한 상태였다.
이제부터 선체 곳곳을 돌아다니며 도면과 다르게 작업한 곳이나 부실하게 작업한 곳들을 집중적으로 카메라에 담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대한선급의 보고서와 대조하면 분명 감사원을 움직일 만한 뭔가를 찾아내게 될 터였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선박 개조작업을 지켜보는 천광균 이사는 한국인 혼혈인 제이콥의 얼굴을 보고 관리자에게 물었다.
"네, 제가 아는 후배입니다. 중국계 피가 섞여 있죠."
차이나타운이 건재한 필리핀, 그곳에서 화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관리자인 마이크는 자신의 인맥이라도 과시하듯 천광균의 질문에 답했다.
어쩌면 그건 혼혈인들이 익숙한 그곳에서 가장 적절한 둘러댐이었는지도 몰랐다.
* * *
다시 한 달 뒤.
대한선급 본사 특별감사위원회.
강준이 SS재보험사를 통해 제출한 장안해운 선박의 부실 선박검사 자료 때문에 감사원은 발칵 뒤집혔다. 자기들이 정기 감사를 벌여왔던 대한선급이 엉망이라면 곧 자신들의 감사 업무가 엉터리였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선박 평형수 관리시스템 적합성 시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네요?"
"이전에도 시험 항목을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해왔던지라……."
"분명히 검사지침에 따르면 시험 결과를 정량화하라고 나와 있잖아요? 수치로 기입해야 한다고!"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주의만 주고 넘어갔던 부분도 특별감사가 진행되자 감사위원들은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리고 문제는 선체 구조변경 도면하고 실제 변경된 내용 하고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지금 구조변경한 선박은 수비크 항에 있어요?"
"4척 다 아직 수비크 선박수리소 도크에 있습니다."
"이거 일부러 필리핀 쪽에 선박을 갖다둔 거 아니에요?"
제이콥이 찍은 사진을 살펴본 감사위원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대한선급 관계자들을 노려봤다.
"고 과장……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귓속말을 속삭이듯 대한선급의 품질감사팀이 고민재 과장에게 말했다. 실제 수비크 항까지 출장을 나가 검사 업무를 진행했던 담당자가 바로 고 과장이었다.
"저…… 일부 구조변경에서 차이가 나긴 했지만…… 추가로 수정 공사를 하라고 의견을 줬습니다……."
연신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 시간째 감사 항목들에 대해 해명하는 고민재였다. 그는 15년이 넘는 직장 생활 중에 오늘이 제일 힘든 날이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하지 못했던 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추궁이 끝나자 슬슬 본론을 꺼내놓는 감사위원의 발언이 시작됐다.
"사실 특별감사 전에 제보를 받은 게 있습니다. 근데 그건…… 저희도 좀 민감한 사안이라…… 제보자를 직접 이 자리에 불렀습니다."
"네? 제보자라면……?"
대한선급 관계자들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했다. 제보자라고 나타난 사람이 얼마 전까지 장안해운의 대표로 있었던 장경훈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전보다 한층 수척해진 얼굴의 장경훈은 유독 대한선급 감사대상자 중 한 명을 노려봤다. 그는 선상에서 김갑수 선장의 죽음을 함께 목도했던 고민재 과장이었다.
"오늘 제 발언으로 저 역시 형사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오랜 해운업계에 몸담았던 장경훈이었기에 그의 등장만으로도 대한선급의 관계자들은 어떤 폭탄 발언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저기 점잖게 앉아 있는 고민재 과장이 장안해운에 받아 간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관례이긴 했지만…… 이번에 신규 선박 3척의 인수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기가 찬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장경훈 씨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이 자리에서 두루뭉술하게 누구를 비난하는 행위는 안 됩니다!"
감사위원장이 장경훈의 발언을 지적했다.
"그 신규 선박들의 실소유주가 바로 접니다. 필리핀 선박의 선주가 바로 저라고요!"
"그럼 내부자 거래를 했다는 겁니까?"
"뭐 그게 불법이라면 벌을 받겠습니다. 근데, 제가 운영하는 필리핀 현지법인에서는 분명 선체를 늘리는 건 안 된다고 고지했거든요. 엔진이 늘어난 선체 용적에 따라가지를 못한다고요……."
감사위원장이 대한선급 관계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체 변경안에 선체 길이를 늘이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긴 하네요. 대한선급에서도 방금 장경훈 씨가 얘기한 걸 알고 있었나요?"
"아뇨,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디젤 엔진도 교체한다는 조건이어서 저희로서는 인증을 통과시켰던 겁니다……."
장경훈은 그 발언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서 고 과장을 가리켰다.
"고 과장 당신도 엔진 교체가 없다는 걸 보고 받았잖아? 기관장인 김병재랑 대면해볼래?"
"장경훈 씨, 일단 앉으세요!"
감사위원장은 장경훈이 자리에 앉자 구석의 고민재 과장을 향해 되물었다.
"좀 전에 장경훈 씨가 말한 게 사실입니까?"
"……저…… 그게……."
"사실이에요. 아니에요? 둘 중 하나잖아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 고 과장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이 아닌 건…… 아니지만……."
"똑바로 말하세요!"
"엔진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벌게진 고 과장은 이미 멘탈이 나가 있었다.
"장경훈 씨 말대로 검사대상 업체에 돈 받은 것도 사실이에요?"
"……그…… 그게……."
"맞아요? 돈 받았냐고요? 부인하면 검찰로 사안 넘길 겁니다!"
"……네, 맞습니다. 받았습니다……."
고 과장의 답변에 감사위원회가 술렁거렸다. 웬만하면 부인했겠지만, 뇌물 제공의 당사자인 장경훈이 버티고 있기에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이제 그는 사 측의 징벌을 넘어 형사처벌을 감당해야 할 처지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