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선박보험 언더라이팅 (5)
철썩~ 철썩!
검푸른 바다는 오늘따라 파도가 높았다. 김학필 반장은 천광균이 그 시간에 부둣가로 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캄캄한 밤, 바다 한가운데서 도박판이 벌어진다는 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강 형사, 해경에다 공조 요청했어?"
―반장님! 그놈들이 정식 절차를 밟아서 협조를 요청하라는데요? 이거 야밤에 공문이라도 띄워야 하는 겁니까?"
"하여간! 이 와중에 무슨 절차야! 절차는! 범죄가 밤낮 가리고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좌우간 야간 당직자들이라도 있을 거 아냐? 해경에서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인원들이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강 형사 너는……!"
그때 김학필의 눈앞에서 두 대의 고속보트들이 굉음을 울리며 나타났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의 선박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바다로 나간 선박을 향해 말이었다.
―반장님, 저라도 지원을 하러 갈까요?
"잠깐만……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자…… 너 선박거래소 사람들 알지?"
―알죠.
"그쪽에 연락해서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배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
―네? 지금 이 시각에요?
"그럼 내일 움직이리?"
―알겠습니다! 반장님. 일단 연락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학필은 부둣가에 서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어선용 선박을 바라봤다.
치익!
담배를 한 대 피워문 김학필은 초조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둣가로 오기로 했던 강준이 여태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갔지만, 강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의심됐지만, 김학필은 눈앞의 선상 도박장을 보고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 * *
좀 전 시각. 고기잡이 어선.
"뭐 해? 어서 패 돌려요."
신이 난 장경훈이 패를 섞는 김 선장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도 에이스 세 장! 잘하면 포커, 그게 아니더라도 풀하우스를 만들 수 있는 패였다.
사실 김 선장은 돈을 더 달라는 자신의 요구가 먹히지 않자 장 대표에게로 돌아선 거였다. 선상에서의 판에서 모든 걸 탈탈 털겠다는 그들의 계획에 균열이 생겼다.
그런 김 선장을 바라보는 고민재 과장과 박형식 사장, 그리고 장경훈의 선박 양도증을 가져온 천광균 이사는 점점 얼굴이 굳어가고 있었다.
가져온 현금은 총 20억 원. 점점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초반에는 잃어 주다가 점점 판을 키워 한 방에 장경훈의 판돈을 다 잃게 만들고, 가져온 선박 양도증을 담보로 재차 돈을 빌려주게 하겠다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잃어주는 판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장경훈의 입꼬리는 계속 올라갔고, 이제 슬슬 상대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왜들 이래? 점점 표정들이 안 좋아지시네?"
"시발! 닥치고 카드나 칩시다."
"오우! 고 과장 이제 보니 입이 많이 거치시네…… 좋은 회사 다니시는 인텔리분이라 난 그런 말은 평생 안 쓰고 사시는 줄 알았지? 흐흐!"
고 과장은 카드를 뿌리는 김 선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가 준 카드는 7 스페이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카드였다.
김 선장 본인의 입으로 적어도 패를 돌리는 것만큼은 타짜에 버금간다고 하지 않았나? 원하는 카드를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말이었다.
‘저 인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죽어요."
고 과장은 이번에도 카드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맞은편의 박 사장은 애매한 카드를 받았는지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카드를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받고 두 개 더!"
천만 원짜리 칩 두 개를 판 중앙에 던지는 박형식 사장이었다. 그는 전과는 다른 양상에 긴장했지만, 자신의 손안에 든 패를 더 믿었다.
킹이 두 장 포함된 풀하우스.
장 대표의 오픈된 카드는 에이스 한 장과 9 두 장. 그리고 퀸이었다. 박 사장은 장 대표의 히든카드 속에 9가 두 장이 있지 않은 한, 자신이 이기는 패라고 생각했다.
"뭘 그렇게 잔잔하게 가시나? 받고 올인!"
와르르!
장경훈은 갖고 있던 모든 칩을 가운데로 모조리 밀었다. 당황한 박형식이 옆자리의 김 선장을 바라봤다. 김 선장은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쥐고 있던 카드를 내려놨다.
"나…… 나도 죽어……."
"뭐야, 이거! 둘이 짠 거 아니야!"
흥분한 고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 선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외쳤다.
"왜들 이래요? 우리가 같이 모여서 카드 친 게 얼마인데 이렇게 서로를 의심하고 그래요?"
"시발 그렇잖아! 아까부터 장 대표한테만 좋은 패가 가는 게 이상하지 않아?"
"지금 내 패가 좋을지 안 좋을지는 까봐야 아는 거 아닌가?"
실실 웃으며 약을 올려대는 장경훈이었다. 그는 박 사장에게 어떻게 할 거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박 사장은 장경훈의 뒤에서 내내 판을 지켜보고 있던 천광균 이사를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올인!"
"박 사장님!"
그를 말리는 고 과장이었다. 고 과장은 이 판이 무척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판을 당장 중단시켜야 했다. 패의 흐름이 안 좋을 땐 일단 판에서 일어나 자리 순서부터 바꾸는 것처럼 말이었다.
"자, 박 사장님! 올인을 받으셨으니 무슨 패인지 보실까?"
"……킹 풀하우스!"
히든에서 킹 두 장을 뒤집어 보이는 박 사장이었다. 순간 그는 짜릿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칩을 쓸어 담았다. 마치 옆에 있는 누군가가 훔쳐 가기라도 하듯 말이었다.
"잠깐! 거기서 스톱!"
"……뭐야…?"
"왜 이리 성질이 급하실까…… 내 패도 봐야죠. 이번 판 끝나면 판돈 좀 더 올립시다. 이거 원 싱거워서!"
무심하게 히든카드를 툭 던지는 장경훈이었다. 그의 패는 에이스 풀하우스. 박 사장과 같은 풀하우스였지만, 에이스가 킹보다 더 높은 족보였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나보고 선박 양도증까지 가져오라고 설치더니만…… 이거 이대로 끝나는 건가? 흐흐!"
새파랗게 질린 박 사장과 막 폭발할 것 같은 고 과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장경훈은 실실거렸다.
"내가 그냥 당신들한테 당해 주니까 그동안 멍청한 호구로 보였지? 어때? 돈 잃는 기분이? 내가 그래도 이 도박판에서 굴러먹는지만 20년째야. 당신들한테 그냥 당할 줄 알았어? 크흐흐……."
이미 셋이 공모한 걸 다 알고 있었던 장경훈이었다.
"김 선장…… 당신 정말……!"
고 과장은 김 선장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김 선장은 비릿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그러게…… 날 무시하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 이거 봐 결국은 내 손에서 결판나는 건데! 왜 그리 잘난 체 들이야!"
고 과장은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주먹으로 김 선장의 얼굴을 갈겼다. 피가 튀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장경훈은 그저 낄낄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말이었다.
"재밌네! 재밌어…… 역시 없는 것들은 항상 이렇다니까! 자기들끼리 서로 지지고 볶고…… 그러다가 결국은 서로 뒤통수치고 끝나거든! 크흐흐!"
어릴 때부터 장안해운의 황태자로 커왔던 장경훈의 비아냥거림은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고 과장의 기운을 풀리게 했다.
"김 선장…… 들었지? 우리가 왜 망하는지……!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당신이 여태 그러고 사는 거라고!"
안경을 다시 주워 쓴 고 과장은 칩을 챙기는 장경훈을 바라보며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천광균 이사를 바라봤다.
천광균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는 천천히 무전기를 들어 송신 버튼을 눌렀다.
치이이익!
"다들 여기 불빛 보이지? 이리로 건너와!"
―네, 알겠습니다!
고 과장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박상훈 목사가 일이 틀어졌을 때 쓰라고 했던 카드를 써야 했다. 그건 폭력이었다.
"참 나! 왜 이리 다들…… 양아치처럼!"
장경훈은 이런 상황을 못 겪어 본 건 아니었지만,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보아온 사이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김 선장! 이 사람들 좀 말려봐! 우리 이제 서로 안 보고 살 거야? 저기 바다에라도 빠뜨려 버리게?"
바닥에 쓰러진 김 선장은 이미 피떡이 되어 말도 못 하는 상황이었고, 고 과장은 장경훈의 시선을 피했다. 지역 유지인 장경훈을 버린다는 게 내심 찜찜한 고 과장이었다.
"장 대표, 그러지 말고 그냥 남은 선박 소유권 그거 그냥 넘겨요. 어차피 장안해운 넘어간 상황에서 선박 소유권 쥐고 있어봤자 뭐 하겠어? 반쪽짜리지 안 그래?"
"말은 바로 하랬다고 반쪽짜리는 아니지. 내가 형들하고 피 터지게 싸워서 받아 낸 우리 아버지 유산이야!"
"누가 그걸 그냥 넘기라고 했어요? 적절한 가치를 평가해서 지불하겠다고 하잖아요!"
"누가? 박상훈 목사가?"
"왜 이래요? 장안해운은 교회랑은 상관이 없다니까……."
헛웃음을 치는 장경훈이었다.
"내가 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로 아나 보지? 사무실 안 나가니까 회사 속사정도 모르고 있을까 봐?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여!"
장경훈은 박 목사의 실질적인 대리인인 천광균 이사를 노려봤다.
바깥에서는 고속보트들이 선박에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내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도박판이 벌어지던 조타실로 들어왔다.
"천 장로님!"
"여기 이 인간 끌어내세요. 배신자들은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하니까요."
천광균의 말에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바닥에 널브러진 김 선장을 밖으로 끌어냈다. 남자들은 새천년교회의 장막파 일당이었다.
"장로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천광균에게 되물어온 이는 한때 군산교회의 살인사건에 용의자로 체포되었었던 황인규였다. 그는 여전히 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장막파의 구심점인 지상덕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천광균을 따르고 있었다.
"던져 버리세요. 물고기 밥으로나마 세상을 위한 한 줌 밀알이 되도록요."
"……장로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신이 난 황인규가 신도들을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경훈은 경악했다.
설마 천광균이 살인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경악한 건 장경훈만이 아니었다. 천광균과 같은 편이었던 선박수리소 박형식 사장과 대한선급의 고민재 과장도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저 장경훈의 돈을 털어먹고 선박 소유권까지 빼앗아 장안해운을 온전히 꿀꺽할 생각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들의 계획에 살인이 있으리라고는 둘 다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물고기 밥이 되기 직전인 김 선장도 마찬가지였다.
"사…… 살려 줘! 장 대표! 뭐라고 좀 해 줘! 제발!"
필사적으로 소리를 치는 김갑수 선장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조타실로 들려왔다.
"천 이사…… 왜 이래? 이건 정말 아니잖아……."
"여기는 바다 한가운데입니다. 김갑수 선장은 박형식 사장과 고민재 과장과 함께 공모해서 사기도박을 벌였고요. 장 대표님은 그들의 먹잇감이었죠."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해? 당신 미쳤어!"
"만약 경찰에 가게 된다면 전 이 모든 일을 장경훈 대표님이 지시해서 한 일로 진술하겠습니다."
천광균은 장경훈이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조타실 밖에서는 ‘풍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갑수 선장이 물고기 밥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