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선박보험 언더라이팅 (3)
강준은 포커판의 돈을 압수하려는 김학필 반장을 말렸다. 김학필도 도박판을 잡으러 온 건 아니었기에 겁만 주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다음부터는 돈 걸고 포커 치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죠. 재미로 한 겁니다. 재미로!"
김 선장이 상황을 무마시키듯 김학필 반장에게 웃으며 답했다.
그때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눈치를 보던 박형식 사장이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서해안 선박수리소입니다…… 어…… 장 대표……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서둘러 전화를 끊는 박형식 사장이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강준이 박 사장의 기억에서 읽었던 장경훈의 전화임이 분명했다.
"조사관님,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기적인 안전 검사도 절차대로 진행했고요. 구난 시설과 조타 시설에 대한 200여 개 항목에 대한 안전 검사는 매년 시행되는 겁니다."
날이 선 목소리의 고민재 과장이 현무호에 대한 방어적인 주장을 펼쳤다. 김 선장도 함께 말을 보탰다.
"그렇지. 검사받은 자료도 사무실에 다 있으니까……."
강준은 표적을 김 선장에게로 옮기며 질문했다.
"김 선장님은 원래 비응해운에서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나야 예나 지금이나 그냥 현무호 선장이니까."
"비응해운에서 장안해운으로 경영권이 바뀌면서 여객선을 4척이나 추가로 들여왔더군요. 그것도 20년이 넘은 선박을요……."
"6.25 전쟁 때 타던 배도 유람선으로 개조돼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겨우 20년 연한 된 선박은 양반이지. 허허!"
김 선장의 웃음에 선박수리소 박 사장과 고 과장이 함께 웃었다. 그들은 강준에게 괜한 사람 잡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제가 장안해운을 방문해서 직접 확인해 보죠."
"그렇게 하시죠. 저희 대한선급에서도 해운회사가 노후 선박을 들여오는 걸 환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민간기업의 경영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근데 말입니다…… 장안해운의 소유주가 바뀌었는데 경영진은 여전히 장경훈 대표가 맡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된 건지 아십니까?"
"그야…… 속사정은 저희로서도 알 길이 없죠."
고 과장은 입을 딱 다물었지만, 김 선장은 강준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김 선장님, 아까 예전부터 현무호 선장을 맡으셨다고 하셨죠? 그러면 비응해운…… 아니 이제 장안해운이 된 본인이 근무하는 회사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회사 굴러가는 거는 나도 잘 몰라…… 나야 바다 위에서만 생활했으니까, 배 운항 잘하고 월급 잘 나오면 된 거지……, 회사 지분이 어쩌고 그런 건 난 잘 몰라."
적당히 넘기려는 김 선장이었다. 그런 그를 비웃듯 강준은 정곡을 찔렀다.
"그런 분이 회사 대표분과 포커 게임을 밥 먹듯이 치셨습니까?"
강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셋은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상대가 무슨 패를 가진지 모르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니까 말이었다.
"……난 장 대표하고 포커 안 쳤는데……."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거짓말로 비켜나가려는 김갑수 선장이었다. 그는 매사 그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임기응변과 책임회피. 김 선장은 일단 잡아떼고 나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한 거였다.
"그건 장 대표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선장님께서 운행하시는 현무호의 자료도 요청해 보고요."
"……그거야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셋 다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었다.
"그럼 또 뵙죠."
"보험조사관님, 나중에는 정식으로 미팅 요청을 해 주시면 좋겠네요."
"요청하면 뭐 합니까? 피하고 만나 주지를 않는데?"
강준은 고민재 과장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철제계단을 쿵쿵 내려오던 김학필 반장이 내내 궁금해하던 걸 물었다.
"박 소장님, 장경훈이 도박꾼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형사들이 알려줬나요?"
"아까 박형식 사장이 전화를 받는 걸 들었습니다. 분명 장 대표라고 했거든요."
"그 짧은 순간에 대단하십니다. 형사 하셔도 되겠습니다. 하하!"
강준은 너스레를 떠는 김학필 반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내가 당신보다 경찰 짠 밥은 더 많이 먹었을걸, 나도 한때는 20년 경력의 베테랑 경찰이었으니까…….’
오늘따라 강준은 자신의 입으로 회귀 전 일들을 발설할 수 없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 * *
새천년교회 익산지부.
송지희는 중년 여성들과 함께 1층 카페에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새천년교회의 개척단이었다.
새로운 신앙적 유토피아를 개척한다는 개척단. 하지만 그 신앙적 유토피아에는 구체적인 실체가 있었다.
세인트 벤센토.
필리핀 남부 셀레베스 해(Celebes Sea)의 작은 섬. 그곳이 박상훈 목사가 유토피아로 지정한 곳이었다. 이미 토지매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리조트와 파인애플 가공 공장, 그리고 대규모 가죽제품 공장이 설립되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기치는 자급자족!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적인 자본주의 위에 세워진 청교도적인 자급자족 신앙공동체였다.
"송 자매님이 그곳에 가시면 큰 역할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근데 권사님, 제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송지희는 커다란 뿔테안경을 쓴 채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중년 여성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봤다는 듯 능숙하게 답했다.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가 미리 예단할 수 없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깨끗한 영토랍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씩 신앙의 주춧돌을 놓는 거죠."
"제가 지금까지 해 온 간호사 일을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신도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과업을 맡게 될 거예요."
송지희는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던 간호사로 자신을 소개했다. 신앙적 돌파구를 찾지 못한 어린 양. 그들에게는 적당한 먹잇감이었다.
"근데 제가 모아 놓은 돈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하죠?"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간절히 원하면 다 방법이 있습니다."
중년 여성이 들이민 것은 신용대출을 위한 준비서류였다. 그녀는 전직 대출중개사 한영숙이었다.
새천년교회에 입교한 그녀는 신도들의 돈을 영혼까지 뽑아내는 데 자신의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했다. 그런 능력을 보인 덕택에 새천년교회 개척단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였다.
"박 목사님은 언제 오시나요?"
"목사님께서는 개척단의 거름을 준비하러 가셨어요. 아시죠? 우리 교회가 필리핀으로의 여객선 운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요."
여객선 운항이라는 말에 송지희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도 듣긴 했어요…… 우리 교회에서 해운회사도 세웠다고요."
"네, 장안해운이 바로 새천년교회의 소유랍니다."
"근데…… 권사님……."
송지희는 한영숙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장안해운에서 제가 일을 해 볼 수 있을까요? 세인트 빈센토 섬으로 가려면 그때까지 돈을 많이 모아야 하잖아요."
"흠…… 그 방법이 아니더라도 유토피아로 갈 방법은 많습니다. 자매님 의지만 있다면요."
한영숙은 속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송지희의 신용이라면 3천만 원 정도는 쉽게 땡길 수 있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제3금융권까지 더하면 1억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제가 실은 신용불량자라서요……."
송지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반대로 한영숙의 미간은 일그러졌다.
"아…… 자매님, 왜 그 얘기를 지금에서야……."
"권사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누구든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다고요. 믿음만 있다면!"
"그…… 그렇긴 하죠. 하지만 신앙적 노력과 희생 없이는 힘듭니다."
"제가 노력할게요. 장안해운 여객팀에 절 넣어 주세요. 제가 유토피아로 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어요!"
헌금을 강탈해 가려면 먼저 일자리를 달라는 거였다. 한영숙은 옆에 있던 전도사에게 송지희를 데려가라고 눈짓했다. 김이 팍 새어 버린 그녀였다. 송지희는 이제 2급 신도로 분류될 예정이었다.
신앙의 노예로 섬에 갇혀 살면서 개미처럼 돈을 벌어들일 교회의 도구로서 말이었다.
* * *
장안해운 사무실.
강준과 김학필은 그곳에서 몇 시간째 기다렸지만, 대표인 장경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골프장으로나 가볼 걸 그랬습니다."
"골프장이요?"
"네, 회사에 붙어있을 거로 생각했던 제가 바보였습니다. 전에도 항상 낮에는 골프장, 밤에는 술집을 전전했었거든요."
"장경훈의 나머지 형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 두 형들도 만만치 않죠. 한 명은 선유도에 땅 팔아먹고 그걸로 서울에 빌딩을 올렸다는 얘기가 들리고 다른 한 명은 마약중독자입니다. 세 형제 중에 그나마 정신 차리고 있는 게 장경훈이죠."
"장경훈도 도박중독자라면서요?"
"그래도 여기 장안해운의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잖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장안해운의 사무실은 꽤 널찍했지만, 오래된 연식만큼 낡아 있었다. 회사가 직원들의 일하는 공간까지 신경 쓰지 않는 게 눈에 보였다.
경리직원이 있는 총무팀과 선박을 관리하는 운항팀, 그리고 재무팀까지. 세 팀으로 나눠진 직원들은 한 공간에서 파티션만 나뉘어 일하고 있었다.
다들 퇴근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중에 유일하게 눈빛이 살아있는 사람은 장안해운으로 경영권이 넘어갈 때 임원으로 영입됐다는 천광균 이사였다.
‘저 인간이 새천년교회 프락치라는 거지…….’
강준은 김성호 이사가 말해 줬던 정보를 떠올렸다.
강준이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슬쩍 읽은 천광균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새천년교회의 장로였다. 박상훈 목사의 지시에 따라 이곳 장안해운을 장악하러 온 사람이었다.
강준은 건강이 걱정되어 보일 정도로 어두운 안색에 매서운 눈빛을 한 천광균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대표 자리도 얼마 못 갈 것 같은데요?"
"네? 뭐 제가 모르는 거라도 있나요?"
"아까 우리를 맞았던 천광균 이사라는 사람 말입니다. 새천년교회 신자인 거 같은데요?"
"네? 새천년교회요?"
크게 말하는 김학필의 입을 강준이 막았다.
"여기 직원들이 다들 의욕이 없어 보이는데…… 그래서 새천년교회가 더 작업하기 수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가 넘어가도 발 벗고 나서서 막을 사람들이 없으니까요."
"근데 박 소장님, 일단 나가시죠. 여기서 죽치고 있어 봤자. 장 대표 만나기 힘들 겁니다. 제가 그 인간 잘 가는 술집을 알고 있으니까 거기나 가 보시죠."
"차라리 저 사람을 따라가면 박상훈 목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강준은 눈짓으로 천광균 이사를 가리켰다. 그 역시 강준 일행이 신경 쓰이는지 연신 접객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네, 장안해운입니다…… 1억 원이요? 대표님, 지금 금고에 현찰이 없습니다…… 네? 안 된다니까요!"
전화를 받은 재무팀 직원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망나니이긴 했어도 회사 사장에게 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김 대리님, 전화 이쪽으로 돌려줘요."
"네, 이사님……."
재무팀 직원은 천광균 이사 쪽으로 전화를 돌렸다. 천 이사는 그런 장 대표의 전화가 한두 번이 아닌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이미 회사의 실권이 그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