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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선박보험 언더라이팅 (1) (207/250)

207화. 선박보험 언더라이팅 (1)

그해 말 대선이 치러졌다. 유력한 대한당의 대선후보였던 박상도 의원은 SH보험의 국정감사 건에 발목이 잡혀 당내 경선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결국 밍싱그룹의 지원을 받은 민한당의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물론 양당 모두 밍싱그룹의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었지만…….

시사뉴스닷컴은 대선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개인정보 유출 게이트로 인해 단박에 인터넷방송사까지 만든 유력 언론사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함 기자는 대선 과정에서 민한당으로부터 입당 제안까지 받았다. 물론 완곡한 거절을 표명하긴 했지만, 다음 총선에서 비례대표 자리를 예약받았다는 소문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 최은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냥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었다.

을지로 노포(老鋪) 골목.

"최 이사님, 이게 뭡니까? 그냥 가볍게 한잔 마시자면서요?"

"왜? 내가 나오면 가볍게 못 마시나?"

최은정과 함께 나온 이는 성원그룹의 재보험 계열사인 SS재보험의 김성호 대표 이사였다. 소프트재팬의 출자로 만들어진 소프트성원리의 새로운 회사명이 바로 SS재보험이었다.

그새 지분율의 변동이 이뤄져 소프트재팬의 지분은 모두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SS재보험의 주인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었다.

"김 대표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좀 더 격식 있는 곳에 갔겠죠……."

"박 소장이 언제 나한테 격식 차렸다고 그래? 새삼스럽게…… 부담스러우면 지금이라도 내가 갈까?"

"에이 왜 이러십니까? 하여간 나쁜 사람 만드시는 데는 선수시라니까요."

강준은 손사래를 치며 김성호 대표의 맥주잔을 가득 채웠다. 거품이 맛있게 끓어오를 때쯤 옆에 있던 최은정이 잔을 들어 올렸다.

"자! 반갑습니다! 여러분!"

"건배사라도 해야 하나?"

"에이, 대표님, 그런 거 하면 요즘 노땅 취급받습니다."

"그런가? 허허! 다들 들지!"

"그래도 이렇게 모였으니 제가 건배사는 할게요. 국내 보험업계의 발전을 위하여!"

퇴직한 강준의 입장까지 고려한 건배사였다. 이제 회사는 모두 달라졌지만, 그래도 셋 다 같이 외칠 수 있는 문구였다.

"크아아…… 좋네요!"

"오랜만에 박 소장 자네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 허허!"

최은정이 맥주잔을 내려놓고 SH보험으로 화제를 돌렸다.

"밍싱그룹이 얼마 전에 은밀하게 SH보험을 M&A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는 소식이 들려요."

윤미경 감사가 애초에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최진태 회장은 SH보험의 상속 지분을 밍싱그룹에 넘겼다. 하지만 그 지분은 이번 개인정보 유출 게이트가 터진 이후 고스란히 다시 M&A 시장으로 나왔다. 그건 밍싱그룹이 SH보험에 대한 경영권을 잠재적으로 포기한다는 걸 의미했다.

국내에서 악화한 여론 때문에 밍싱그룹은 한국 시장에서 손을 털기 시작한 것이었다.

"M&A 시장에 얼마에 내놨답니까?"

"지금은 2조 규모요."

"네? 2조요? 이제 돈 단위가 조가 되네요."

"SH보험의 전신인 한국보험이 원래 국내 시장에서 영업조직 하나는 끝내줬잖아요? 2조라는 인수가액이 그리 터무니없진 않죠."

시장에서는 중소 보험업계의 인수합병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수익성이 낮은 보험상품을 팔고 있던 중소 보험업체로서는 인수자가 나타났을 때 매각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인지도…….

"박 소장님, 이제 우리 성원그룹이 SH보험을 인수할 계획이에요."

"2조를 들여서요? 미쳤습니까? 사업영역도 겹치잖아요?"

"인수가액은 다시 협상을 해봐야 하지만, 우리가 SH보험을 인수하게 되면 한국 시장에서 벌어지는 보험업계의 과당경쟁을 막을 수 있어요."

외국계 보험이 단기간에 진입하면서 고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제대로 검증이 안 된 불량 보험상품이 판매되고 있었고, 그 틈을 머리 회전이 빠른 보험사기꾼들이 치고 들어오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되면 영업에서 공격적으로 나오는 보험사에 밀리는 거 아닙니까?"

"그게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보험상품은 엄청나게 복잡한 상품이거든요. 물론 공격적인 상품을 이용해 보험사가 단기간에는 실적을 올리기도 하겠지만 그게 장기적으로는 보험사를 부실하게 만드는 독으로 돌아오겠죠."

강준은 2조 원의 인수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더 묻고 싶었지만, 더 관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보험조사관인 내가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는 문제잖아…… 보험사 경영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말인데 박 소장…… 자네한테 내가 일거리를 하나 줄까 하는데 말이야."

"드디어 오늘 저를 보러 오신 용건이 나오는군요."

"허허! 눈치 하나는 여전하군. 근데 싫어? 일거리 주지 말까?"

"일단 들어나 보고요……."

김성호 대표는 강준의 반응이 예상됐다는 듯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SS재보험에서 인수하려는 선박보험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말이지……."

"언더라이터(보험계약 심사자)들이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나요?"

"현장까지 다 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보험계약자들이 우리한테 숨기고 있는 걸 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개 코처럼 냄새를 잘 맡는 저를 찾으시는 거군요."

김성호 이사가 민망한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강준에게 맥주잔을 들었다.

"에이, 천하의 보험조사관 박강준이 무슨 그런 노골적인 표현을 하고 그러나? 허허!"

"사실입니다. 일단 냄새를 잘 맡아야 구린 구석을 들여다볼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좌우간 대한선급에서 안전관리 검사기준을 충족시켰다는데, 내가 볼 때는 워낙 노후 선박을 개조한 거라 불안해서 말이지……."

강준은 회귀 전 벌어졌던 선박 사고가 떠올랐다. 무리한 증축과 과적, 그리고 평형수 부족으로 인한 총체적인 안전관리 부실. 그 여파로 반복적인 선박 사고가 발생했고, 그때마다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발생했었다.

"혹시 그 노후 선박이 증축 개조를 한 겁니까?"

"어!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구먼! 맞아. 여객선이라 증축을 해야 수익성이 올라가거든."

강준의 눈빛이 달라졌다. 최악의 선박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다면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강준은 회귀 전 사건의 시점보다는 빠른 시기였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중소 보험사에서 계약한 선박보험을 재보험으로 인수하지 않는다면 분명 선박 업계는 한차례 술렁일 것이다.

안일하게 해왔던 검사기관과의 유착관계, 그리고 노후 선박에 대한 느슨한 안전관리 기준 등. 그런 낡은 관행을 미리 뜯어고칠 수 있다면…… 강준은 자신이 회귀하면서 얻게 된 능력을 발휘해 어떻게든 선박 사고를 막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의무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었다. 누구든 바닷물에 빠진 사람들을 보게 되면 구하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었다.

"우리한테 재보험 인수를 요청한 곳은 신명보험이야. 중소규모 보험사라 아무래도 클라이언트한테 빡빡하게 굴지 못한 모양이더라고. 게다가 보험계약자가 대한선급에서 인증받은 심사기준을 들고 나오니 더 까다롭게 태클을 걸기 힘들었겠지…."

"보험계약자가 누군가요?"

"음…… 익산에 있는 장안해운이야. 그곳이 종교단체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돌고 말이야."

김성호 대표는 넌지시 강준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그 종교단체가 새천년교회입니까?"

"그래, 내가 박 소장한테 일을 맡기려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

1년 전 강준이 맡았던 군산의 새천년교회 장막파의 집단보험사기 사건. 그 사건의 몸통인 새천년교회와 연루된 해운회사였다.

"그럼, 장안해운의 대표자가 박상훈 목사인가요?"

"아니, 그렇게 단순했으면 내가 박강준 자네한테 일을 맡겼겠나? 내 선에서 처리했겠지."

"하긴 쉽고 편한 일 맡기실 분이 아니시죠."

"허허! 그만큼 자네가 보험조사관으로서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지."

김성호 대표의 옆에 앉아 있던 최은정은 그 칭찬에 동의하기라도 하듯 강준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였다. 순간 강준은 빡빡한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이상한 건 장안해운 경영진이 회사가 매각된 후에도 그대로라는 거야. 기존 경영진의 전문성을 인정해 줬다? 내 경험상 그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거든…… 그리고 새로운 임원으로 등록된 이사가 천광균이라는 사람인데 새천년교회 장로더라고."

"박 목사 하수인이네요."

"그렇긴 하지만 법적으로 장안해운은 새천년교회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셈이지……."

"자금추적을 해보면 알지 않을까요?"

"맞아."

강준은 잠시 생각을 하다 되물었다.

"장안해운의 선박이 몇 척인데요?"

"4척이야. 국내는 인천에서 제주도를 오가는 노선, 그리고 해외는 군산에서 중국 산둥반도인 칭다오와 스다오로 가는 노선을 가지고 있더라고."

"꽤 규모가 있는 해운사네요."

"근데 여객 운송으로는 큰 수익을 남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증축을 통해서 선박의 적재량을 늘렸는데…… 수익을 높이기 위해 안전을 포기해 버린 격이지."

"대한선급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김성호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그의 깊은 고민이 엿보였다.

"자기네들은 절차대로 했다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 그러니 어쩌겠어? 우리 SS재보험의 언더라이터들은 서류를 믿을 수밖에……."

"일단 대한선급의 담당자부터 만나 봐야겠군요."

"그래 그게 순서겠지."

강준은 순간 뭔가 떠올랐다.

"근데 김 대표님, 사건의뢰비는 얼마나 주실 겁니까?"

"얼마나 원하는데?"

"제가 받고 싶은 만큼 불러도 됩니까?"

"불러봐. 부른다고 다 주지는 못하지만……."

"에이, 안 불러요. 예산이 얼마인데요? 저도 그거에 맞춰서 해드릴게요."

"한 장! 그게 최선이야!"

"에이…… 벌써 다 정해 놓고 나오셨네!"

강준은 실망한 듯 노가리 하나를 뜯어 물었다.

"강준 씨, 이번 사건만 잘 해결해 주시면 보너스가 있어요."

"보너스요?"

"새로 인수하게 되는 SH보험의 SIU팀을 당분간 강준 씨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오! 그거 구미가 좀 당기네요."

강준은 사실 보너스가 아니라도 사건을 맡을 생각이었지만, 한번 튕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절차상 룰 같은 거나 다름없었다.

"참! 그리고 말이야. 내가 오늘 왜 이 자리에 눈치 없이 나온 줄 아나?"

"사건 의뢰하러 나온 거 아니십니까? 갑자기 또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복선을 까십니까?"

"이제 둘이 진짜 연애라도 해보라고.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최은정과의 계약 연애가 흐지부지 끝난 이후, 둘은 어색한 관계만 이어오고 있었다.

"저…… 그…… 그건 저희가 알아서……."

"대표님, 갑자기 훅 들어오시네!"

최은정도 예상을 못 했던 건지 얼굴을 붉히며 김성호 대표를 흘겨봤다. 강준도 어색해지지 않으려 농담조의 말을 덧붙였다.

"재벌과 일반인…… 이거 판타지에서나 나오는 얘기 아닙니까?"

"내가 둘이 결혼이라고 하라고 했나? 요즘 비혼이 대세라며? 외로운 청춘들끼리 연애만 하라는 거지…… 너무 주변 의식하지 말라고. 나중에 후회해……."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강준은 맞은 편의 최은정의 얼굴을 살폈다. 어쩌면 남들 눈을 의식해서 진짜 감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둘이 진짜 연애를 시작할 시점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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