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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개인정보 유출사건 (8) (206/250)

206화. 개인정보 유출사건 (8)

광역수사대 특수경제과.

"경감님, 검찰이 김우현의 죽음을 이대로 묻고 지나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맞아, 오토바이를 버리고 간 블랙박스 영상까지 나온 마당에 못 찾을 건 없지. 우리가 확실히 증거를 내민다면 검찰도 계속 우길 수 없을 거고."

허찬 경사의 토로에 이진철 경감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강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임정근의 보이스피싱 사무실에 있던 놈 중에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는 겁니까?"

"네, 범행에 사용된 오토바이를 샅샅이 조사해 봤지만, 범인의 DNA를 추출할 수 있는 생체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목격자가 진술한 범인의 생김새나 걸음걸이는 비교해 보셨나요?"

"멀리서 찍힌 CCTV가 있긴 했지만, 범인을 특정할 만큼 화질이 좋지 못했습니다. 범인의 모습이 너무 조그맣게 잡혔고요……."

"살해 도구는 찾아보셨습니까?"

"……아니요. 인근 도로의 수풀들을 뒤졌는데 못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인원을 밑도 끝도 없는 곳에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강준은 타인의 기억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상대와 접촉해야만 하는 제약이 있었다. 지금 강준이 제일 만나고 싶은 이는 임정근이었다.

"제가 구치소의 임정근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들 겁니다. 교정 당국에서 면회를 불허했습니다."

"공범들과 접촉할까 봐 그런 거 아닙니까?"

"검찰의 입김이 들어갔을 겁니다. 지금 임정근은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괜히 다른 얘기가 흘러나오는 걸 원하지 않겠죠."

핑과일보의 자료를 토대도 보도된 내용에는 임정근이 흑룡회 간부였으며, 홍콩 경찰 당국의 수배를 받아온 이력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의문은 그가 어떻게 한국의 대형 보험사를 인수한 밍싱그룹에 연루되게 됐으며, 수많은 해외 출입국 기록에도 불구하고 검거되지 않았는지였다.

그렇게 의혹은 자연스럽게 임정근의 배후에 베이징의 큰 권력층이 개입했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었다.

"살인죄가 아니라면 송환될 가능성도 있겠군요."

"아마 여론이 잠잠해지면 그런 수순을 밟을 겁니다."

"개인정보 유출 건 정도로는 잡아둘 수 없다는 거군요."

"네, 이번 일을 계기로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법의 잣대는 과거에 머물러 있거든요. 강력범죄가 아닌 이상 송환을 막기는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살인죄를 밝혀야죠……."

강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면서 중얼거리듯 답했다.

‘내가 직접 구치소로 들어가는 수밖에…….’

"경감님, 임정근의 다음 재판이 언제입니까?"

"재판이요? 다음 주 초가 될 겁니다. 판사가 아마 이성환과 함께 재판정에 세울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전까지 김우현을 살해한 범행 도구를 찾아보겠습니다."

"네? 박 소장님께서 어디서 범행 도구를 찾는다는 말씀인가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강준의 전략은 상대가 자신을 먼저 찾게 만들려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했다.

강준은 문래동에서 적당한 폭의 회칼을 직접 제작했다. 문래동에는 각종 금속 가공업체가 몰려 있었기에 원하는 크기의 칼을 제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블러핑!

그리고 그 칼을 담당 검사에게 보냈다. 마치 증거품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었다.

* * *

서울 중앙지검.

검찰에서 연락이 온 건 증거품으로 찾았다는 칼을 보낸 지 정확히 이틀 후였다. 하루는 자체적인 검증이 필요했을 것이고 또 다른 하루는 당사자인 임정근에게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검찰청에 불려간 강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차명학 검사였다.

"양평 별장에서 뵙고 여기서 또 뵙네요."

강준은 먼저 차 검사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별장을 언급하는 인사말에는 그간의 성 접대를 뚫고도 살아남은 차 검사에 대한 힐난이 담겨 있었다.

"야! 박강준 이거 진짜 증거품 아니면 알지? 내가 너 증거품 위조죄로 감방에 처넣을 거야."

"여전하시네요. 반말부터 지껄이시는 거?"

"뭐 새끼야?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너 여기가 어디라고 설쳐!"

차 검사는 강준이 앉은 책상을 구둣발로 한 번 ‘쾅’ 찼다. 사실 차 검사가 오기 한 시간 전부터 그들은 강준은 좁은 책상 앞에 앉혀두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강준이 앉은 쪽에는 발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발을 오므리고 앉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고, 검사가 앉아야 할 자리에는 발을 쩍 벌리고 앉을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일종의 심리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강준에게는 그런 얄팍한 전술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오늘은 역으로 그들을 낚기 위해 온 것이었다.

"검사님이야말로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거 같네요. 오늘 전 피의자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전 국민의 비난을 받는 임정근을 감춰 주고 있는 검찰을 도와주러 온 겁니다."

"하아…… 이 새끼가 진짜!"

차명학은 손을 치켜들며 강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건 마치 검사라기보다는 칼을 들고 협박하는 조폭에 더 어울렸다.

"그 칼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시려는 거죠?"

"허튼 짓거리 하면 죽여 버릴 테니까 토시 하나 빼먹지 말고 털어놔."

"임정근이 저한테 알려준 곳에 있더라고요."

"뭐? 임정근이?"

"네. 저번에 경찰이 들이닥친 보이스피싱 사무실에 숨겨놨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사무실 어디에서 찾았냐고?"

"천장에서요."

막힘없이 대답하는 강준이었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건 차 검사였다. 분명 임정근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강준…… 우리 솔직히 얘기해 보자. 임정근이 왜 너한테 알려주냐? 말이 안 되잖아?"

"자기가 죽인 게 아니었나 보죠. 검찰을 믿을 수 없어서 저한테 결정적인 살인 증거를 알려준 거 아닐까요? 자기가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도 있으니까요."

잠시 둘 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차 검사는 강준을 노려봤지만, 강준도 그 눈빛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너 여기서 딱 기다려! 오늘 집에 못 갈 줄 알아!"

"……."

차 검사가 씩씩대며 흥분해 나갔다가 데려온 이는 사건 용의자인 임정근이었다.

"뭐야? 둘이 인사라도 나눠."

임정근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강준을 바라봤다.

"당신 뭐야? 왜 자꾸 거짓말을 해서 여기 검사님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야?"

드디어 직접 강준과 대면하게 된 임정근이었다.

"나도 궁금하네. 김우현 죽인 날…… 그 회칼 당신이 직접 만든 거지? 그 칼 어디다 감췄어!"

단 한순간의 기회를 강준은 놓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임정근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퍽! 퍼퍽! 퍽!

차 검사는 강준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둘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강준은 임정근의 기억을 읽어 내려 필사적으로 엉겨 붙었다.

[오빠, 말도 없이 내 차 어디다 쓰고 온 거야?]

[왜? 불편하니?]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차가 없어지니까……. 어머! 근데 옷에 그거 뭐야?]

여자는 임정근의 바람막이 점퍼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켰다.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임정근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걸로 봐서 둘은 실질적인 동거 관계였다.

[얼른 씻어! 같이 저녁 먹게.]

[참, 내가 트렁크에 공구통 갖다 놨으니까 당분간 거기에 둬라.]

[공구통? 무슨 공구통?]

[뭐 그런 게 있으니까…… 그냥 그런 줄 알아!]

여자는 임정근의 성질을 돋우지 않으려 더는 캐묻지 않았다. 쇼파 위에 털썩 주저앉은 임정근은 혼잣말을 내뱉듯 부엌으로 들어간 여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람 찌를 땐 그 칼이 손맛이 제일 좋더라고. 흐흐!]

임정근은 김우현을 찌를 때를 떠올린 것인지 히죽거리며 웃어댔다.

강준은 혐오스러운 임정근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눈앞에 난장판이 된 책상을 발견했다.

"차 검사님, 저 전화 한 통 합시다."

"뭐? 전화? 전화는 조사 끝나고 나가서 해! 이 새끼야!"

핸드폰은 압수당했고, 검찰 조사는 언제 끝날지 몰랐다.

"변호사 입회하기로 했거든요…… 이거 검찰 참고인 조사 형식이잖아요. 민훈 변호사가 오늘 좀 늦는다고 했는데 언제 오나 싶어서요……."

차 검사의 얼굴에서는 짜증이 확 묻어나왔다.

"새끼가! 그럼, 처음부터 얘기했어야지! 누굴 뺑뺑이 돌려!"

그때, 조사실 바깥에서 다른 초임 검사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차 검사의 귓가에다 뭔가를 속삭였다.

"거, 다 들려요…… 제 변호사 도착했다고요? 얼른 들여보내 주시죠? 참고인 조사 시에 변호사 입회는 보장된 거잖아요?"

"야! 이 새끼 내보내!"

강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임정근을 향해 지그시 웃었다.

"조만간 또 보자."

"어떻게? 난 중국 갈 건데 다음에 나를 어떻게 볼 거니?"

"임정근…… 너 아무 데도 못 가. 여기서 저지른 죄는 여기서 죗값을 치러야지."

"맘대로 해봐라."

자신만만해 하는 임정근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뒤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임정근에게 살인 혐의가 추가된 며칠 뒤, 양양 이사는 서광걸을 데리고 광화문으로 급히 향했다.

김우현을 살해한 회칼이 임정근의 내연녀 차 안에서 발견되자 여론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익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외국계 회사로 찍힌 밍싱그룹은 어쩌면 한국 시장에서 퇴출당할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양양은 더 이상 대한당의 박상도 의원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무능한 백상현 대표에게 사태처리를 맡겨둘 수도 없었다.

얼마 전 양양에게 본사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그건 임정근을 포기하라는 지시였다.

"이사님, 이쪽입니다."

서광걸은 긴장한 듯 양양을 음식점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안경을 낀 남자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어나 양양 이사를 향해 인사했다.

그들은 야당인 민한당의 유력 정치인 둘이었다. 한 명은 3선 의원 김진수였고, 또 다른 한 명은 한승일과의 지자체 선거에서 졌지만, 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연남시장 지형준이었다.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양 이사님께서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SH보험의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어서 우리도 조심스럽긴 했습니다."

양양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간의 불만을 토로해댔다. 한국 시장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그걸 듣는 민한당의 두 정치인은 때로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참을성 있게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의 애로 사항을 경청하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두 분께 부탁드리는 것은 국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SH보험에 대한 국정감사를 막아 달라는 겁니다."

"그건…… 이미 대한당의 박상도 당 대표가 나서서 막아서고 있지 않습니까?"

노회한 정치인인 김진수는 밍싱그룹의 관계자가 자신들에게까지 찾아온 이유를 확인하듯 물었다.

"양양 이사님께서는 그간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정파로 나뉘어 입장을 달리해서 싸운다는 게 아무래도 이사님으로서는 꽤 낯선 풍경이었으니까요."

"……보험을 들고 싶으신 거군요."

"네. 함축하자면 뭐 그렇습니다."

서광걸은 양양 이사의 장황한 말을 짧게 전했다. 민한당 김진수는 옆에 앉은 지형준 시장을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미 그 자리에 나오기 전에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대한당으로 갈 정치 자금의 물꼬를 민한당으로 바꿔 놓을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SH보험사에 대한 국정감사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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