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위장 사망 (8)
울산 신정동 신축 아파트단지.
박성남은 오미희가 울산에서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는 제보를 입수했다. 사건을 의뢰한 박강준 보험조사관으로부터 말이었다.
빌려준 돈을 받아 내는 건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오성희만 잡게 되면 어떻게든 돈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빌라 건축에 대한 소유권 이전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와장창 무너진 건. 오성희가 빌라 건축 자금을 모조리 빼돌려 체포 직전 자신의 친언니에게 맡겼다는 거였다.
결국 아직 완공되지 않은 빌라와 해당 토지는 온전히 대출을 실행했던 은행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내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아!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괴롭혀 주마!"
박성남은 씩씩거리며 차량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그늘에다 차량을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몇 시간째 오미희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그였다.
부동산 중개업자답게 박성남은 울산에 도착하자마자 중개업소를 돌아다니며 오미희가 샀을 만한 매물을 수소문했다.
―30평대 아파트로 최근에 매수한 매물이면서 현재에는 급매로 나온 것!
박성남은 자신이 옛 연인이었던 오성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30평 이상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허세. 그리고 신축 아파트단지를 선호하는 성향.
물론 명의자는 위장 사망한 오성희가 아니라 언니 오미희일 테지만.
[오미희는 공범으로 체포되기 전에 급하게 재산을 처분하려고 할 겁니다. 어쩌면 5만 원권 다발을 끌어안고 있을지도 모르죠.]
강준은 울산으로 내려간다는 박성남에게 언질을 줬었다.
"부동산이라도 있으면 압류라도 걸어둘 텐데……."
하지만 박성남이 바라던 것처럼 오미희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똑! 똑!
"여기서 뭐 하십니까?"
망원경까지 동원해 주변 아파트를 살피던 박성남을 의심스럽게 바라본 이웃 주민이 제지하고 나선 것이었다.
"아…… 혹시 이런 사람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누구신데 남의 아파트에서 망원경을 들이밀고 그러는 거요? 제대로 답변 안 하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안 그래도 고생하는 마당에 짜증이 박성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면서 대머리 남자 한 명이 차 안으로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성남의 목젖을 정확히 강타하고는 목을 끌어안았다.
"크…… 크헙!"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박성남은 정신을 잃었다.
* * *
박성남이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그가 그토록 찾던 오미희의 아파트 안이었다.
"진짜 끈질긴 사람이네…… 아니 우리 동생 그렇게 괴롭혀 놓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왜 이런데?"
오미희는 팔짱을 끼고서는 옆에 있던 대머리 남자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어! 다…… 당신!"
박성남이 놀란 것은 오미희 때문이 아니라 옆에 있던 대머리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대머리는 박성남에게로 다가와 그의 뺨을 툭툭 때렸다.
오미희는 대머리 남자 옆에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박 사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제가 뭔지 알아?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는 거지 근성! 그 거지 근성에 한 번 빠져들면 영원히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거야. 바로 당신처럼!"
하지만 그 순간 박성남의 머릿속에서는 대머리 남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현자 스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 여자 보험사기범에 살인 범죄자라고요! 정신 차리세요!"
"크크크……! 이 불쌍한 중생아, 당신이나 정신 차려! 육욕에 빠져서 우리 처제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는 꼴이라니…… 크흐흐!"
"뭐? 처제라고요……?"
대머리 남자는 평범한 사복을 입고 있어서 처음에는 몰라봤지만, 그는 분명 동월사의 스님이었다.
오미희는 기태현과 함께 기획부동산을 하면서 드나들었던 동월사에서 사찰의 사무와 살림을 담당하는 스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현자 스님은 불가에 귀의하기 전부터 속세에서 전과가 있던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미희는 박 사장을 설득해 보려는 듯 그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박 사장……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박 사장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박성남은 당장이라도 오미희의 멱살을 잡고 경찰서로 가고 싶었지만, 옆에서 버티고 있는 현자 스님의 덩치가 만만치 않았다.
소문처럼 어디서 주먹을 꽤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성희가 박 사장한테 빌린 거 당장에는 다 못 갚아. 지금 우리가 캐나다에서 부동산 사업을 해 볼 거거든. 우리도 사업을 해야 박 사장 돈을 갚아 줄 거 아니야?"
악성 채무자가 빠져나가려는 전형적인 핑계였다.
"그래서? 어쨌든 들어나 보자……."
"이 자식 태도가 너무 불량하네!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현자 스님은 큰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걸 본 오미희가 그를 쏘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우리 미희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 알겠냐?"
오미희는 가방에서 200g짜리 골드바 2개를 꺼냈다.
"일단 이거면 3천만 원은 될 거야."
"장난해? 원금이 얼마인데!"
"알아! 알지…… 그러니까 천천히 갚겠다는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 지금 우리 경찰에 넘기면 박 사장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돈도 못 받는 거야."
어떻게든 박 사장을 달래서 일을 무마시키고 한국을 뜨고 싶은 오미희였다.
"근데 지금 언니가 돼서 동생은 구속돼서 살인자가 되게 생겼는데 혼자 해외로 도망치겠다는 거야?"
"박 사장, 법정에서도 돈이 있어야 유죄가 무죄가 되는 법이야. 내가 밖에서 돈을 보내 줘야 우리 성희가 산다고!"
오미희의 얘기에 기가 막히는 박성남이었지만, 그 순간 미련이 남는지 오성희를 언급하는 얘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지 말고…… 박 사장이 우리 성희 좀 도와줘라. 나 지금 캐나다로 나가고 나면 내가 믿을 사람은 박 사장밖에 없어.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둘이 같이 살 부대끼는 사이였잖아."
보험설계사 시절부터 말발로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오미희였다. 그녀는 박성남을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회유하는 중이었다.
긴 한숨을 크게 내쉰 박성남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미희를 쳐다봤다.
"근데 어쩌지…… 지금 사람들이 오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떤 사람들!"
날카롭게 목소리가 째지는 오미희였다.
"오미희 당신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더라고."
"박 사장…… 혹시……?"
"사람이 무책임하게 말이야…… 팔지도 못하는 땅을 왜 그렇게 팔아 댔어? 정말 뒤탈 안 날 줄 알았던 거야? 당신이 기태현이랑 짜고서 팔아치운 땅! 그 땅 산 사람들이 지금 여기로 몰려오고 있다고!"
그 말을 들은 현자 스님은 베란다 창밖부터 확인했다. 아파트 마당에는 어디서 몰려온 건지 모를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멀리서 딱 봐도 한눈에 분노한 사람들로 보였다.
"어때? 그냥 어물쩍 넘어가기 힘들 거 같지?"
"이 새끼가……!"
퍽! 퍼퍽!
현자 스님은 박성남의 얼굴을 가격했다.
"스님! 그만둬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미희 씨, 경찰에 신고라도 할까요? 저렇게 떼거리로 찾아와서 저러는데!"
"미쳤어요? 지금 저 잡아가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아! 미희 씨, 미안합니다…… 전 그냥……."
현자 스님은 남들에게는 주먹까지 휘두르지만, 오미희에게 꼼짝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
"됐고, 얼른 짐이나 싸요!"
초조한 눈빛의 오미희가 잽싸게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건 커다란 캐리어 가방이었다. 그 안에 오미희가 도피할 수 있는 모든 게 들어있을 게 뻔했다.
밖에서 현자 스님이 짐을 챙기고 있는 동안 안방의 금고에서 오미희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골드바 수십 개를 끄집어냈다.
지금까지 빌라 건축을 빌미로 여기저기서 빌린 돈들과 기태현과 함께 작업한 기획부동산 수익금이었다.
"내가 이거 벌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렇게 자기네들은 노력도 안 하고 남의 것만 뺏으려고 드는 인간들이라니! 한심한 개돼지들!"
그때 밖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파트단지 앞에 모여 있던 기획부동산 피해자들이 오미희의 집으로 들이닥친 거였다.
"어머! 스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오미희 저 인간이랑 한패였어요?"
"아니 이거 완전 땡중이었네!"
"시발, 여기서 다 죽자!"
"오미희 어디 갔어! 오미희!!"
오미희는 급하게 안방 문을 잠갔지만, 성난 피해자들의 완력을 이기지는 못했다.
우지끈! 우지직!
방문의 문고리가 뜯겨나가며 문이 힘없이 열렸다. 그리고 금고의 골드바를 챙겨 든 오미희가 그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여기 있다! 이년이 우리 돈 들고 튀려고 한다!"
"현자 스님은 내버려 두고 일단 오미희부터 잡읍시다!"
"내가 너 오늘 갈아 마셔 버릴 거야!"
그때부터 기획부동산 피해자들과 박성남, 그리고 보험사기꾼 오미희와 그녀를 흠모하는 현자 스님이 뒤엉켜 한바탕 야단법석이 났다.
자연스럽게 이웃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그들은 모두 경찰서에서 재집결했다.
강준은 박성남을 내려 보내기 전에 이미 오미희의 아파트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박성남이 자신과 같은 처지인 기획부동산 피해자들과 뭉칠 때까지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사기죄로 구속된다고 해도 범죄수익금을 환수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강준은 차라리 그럴 바엔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통수를 불법으로 되돌려준 것뿐이니까.
* * *
부천 금형 공장 인근 커피숍.
강준은 사망한 노영숙의 아들을 다시 만났다.
"어머님에게 약을 타 죽인 놈들은 모두 1급 살인죄로 구속됐습니다. 이제 판사님의 공정한 처벌을 기다리는 것만 남았고요."
강준은 DNA 검사에 사용됐던 노영숙의 유골함을 아들에게 건넸다. 이미 대부분 기태현에 의해 야산에 뿌려지고 텅 비어 있는 유골함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아들은 떨리는 손으로 비어 있는 유골함을 열었다. 완전히 비어 있을 것 같았던 유골함 속에는 봉투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아드님에게 남기신 유산입니다. 어서 열어 보세요."
아들은 강준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서류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노영숙 씨 앞으로 된 재산은 없더군요. 근데, 예전에 들어 두셨던 생명보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노숙 생활을 하시면서도 보험료를 계속 납입하셨더군요."
그 말을 들은 아들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서류는 사망보험금 1억 원을 수령하기 위한 절차가 기재된 보험사의 안내문이었다.
"어머니……! 흐허허엉…… 허어엉!"
아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어머니의 유산을 받아들고는 오열했다. 노숙 생활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