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위장 사망 (7)
김신애는 기태현의 행각을 전해 듣고 한참을 굳어 있었다. 그리고는 힘들게 입을 뗐다.
"협조할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
"그날 사망소견서를 조작한 이유가 뭡니까?"
한숨을 한 번 내쉰 김신애는 차분한 기색을 되찾았다.
"전 그냥 오빠 부탁을 들어준 거예요."
"의료기록 조작은 엄연한 공문서위조라는 걸 알았을 텐데 그냥 부탁을 들어준 거라고요?"
강준의 압박에 송지희도 끼어들었다.
"공문서위조면 간호사 자격도 박탈되는데 본인의 직업을 걸고 남자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거라고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진짜예요. 오빠가 저랑 결혼을 약속했었거든요……."
어쩌면 그녀도 기태현에게 속은 것인지도 몰랐다.
"최근에 오빠가 알게 된 재벌 3세가 있다고 했어요. 그 사람 문제만 해결해 주면 큰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문제가 될 거를 알면서도 사인을 고쳐 쓴 거군요."
"……네."
일견 김신애의 변명은 말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남편을 위해 작은 불법 정도는 눈감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서울병원을 조사하고 온 송지희는 김신애를 틀어쥘 비장의 카드를 들고 있었다.
"병원에서 근간에 졸피뎀을 처방해 준 이력이 급격히 늘었더라고요. 혹시 김신애 씨가 알려준 건가요?"
"네? 뭘요……?"
송지희의 말에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지는 김신애였다.
"제가 볼 때는 사망한 노영숙 씨는 졸피뎀 과다복용으로 숨진 거 같은데요? 그 졸피뎀은 과연 어디서 구했을까요?"
"……뭘 어떻게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졸피뎀은 불면증으로 오시는 환자분들한테 흔히 처방하는 약이에요."
"인근의 약국 기록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죠. 누가 졸피뎀을 사 모았는지를요."
"말도 안 되는 소설 쓰지 말아요!"
졸피뎀 얘기에 흥분한 김신애가 송지희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강준은 둘을 말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김신애의 기억을 읽었다.
김신애의 기억은 차 안에서 기태현과 함께 있는 장면이었다.
[오빠 이거 진짜 뭐에 쓰려는 거야? 이것도 100알 이상 한꺼번에 삼키면 사람 죽는다?]
[그럼 네 말은 안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아냐?]
[그렇지. 사람이 그냥 쉽게 죽나?]
[실험을 해 보면 되지. 막걸리에 타서 먹여 보고, 소주에 타서 먹여 보고…… 흐흐!]
능청스럽게 묻긴 했지만, 김신애는 이미 기태현이 뭘 하려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오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투자를 받는 거야?]
[신애야, 이 기획부동산이라는 게 말이야. 결국 초기투자금은 있어야 하는 거거든. 일단 땅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오빠는 그럼 지금까지 그런 땅 살 돈도 없이 부동산투자인지 뭔지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김신애가 따져 묻자 인상을 팍 찡그리는 기태현이었다. 그의 냉랭한 성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오빠 기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좀 불안해서.]
김신애도 기태현의 성격을 아는지 먼저 수그렸다. 그리고 기태현은 오성희에게 했듯이 똑같은 레퍼토리로 이내 김신애를 안심시키려 했다.
[내가 그랬잖아, 오빠와의 사이에는 항상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너까지 나를 안 믿어 주면 내가 어떻게 밖에서 사업을 하고, 성공을 하겠냐?]
[굳이 그렇게까지 성공 안 해도 되는데…….]
[김신애! 난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라. 평범하게 빌빌거리면서 살 거라면 너한테 청혼하지도 않았다!]
결혼을 언급하는 기태현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김신애의 모습이었다.
강준은 기억에서 빠져나왔을 때, 김신애는 상기된 얼굴로 강준에게 따져 들었다.
"차라리 경찰 불러 줘요. 경찰에 다 말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경찰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 차량의 블랙박스도 증거품으로 곧 회수할 거고요."
"……!"
김신애는 차량 블랙박스의 얘기가 나오자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강준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여기 오늘 온 목적이 뭡니까?"
김신애는 불안한 눈빛으로 강준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기태현의 책상이었다.
"노트북……?"
송지희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책상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확 열었다. 하지만 김신애는 여전히 입술을 깨물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준의 눈에도 뭔가가 들어왔다.
"송 실장, 거기가 아닌 거 같아."
"네? 그럼 어딘데요?"
"책상이 아니라 책장이네. 책장!"
강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책이 아닌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유골함도 보였다.
송지희는 다가가 유골함을 휙 집어 들었다. 오동나무로 되어 있는 나무 유골함은 기태현이 가장 저렴한 걸로 골랐던 건지 어떤 자그마한 장식조차 없었다.
"소장님…… 유골이…… 없는데요!"
예상과는 달리 유골함의 내부는 비어 있었다. 이미 오미희가 말한 대로 강에다 뿌려 버린 듯했다. 하지만 회귀 전 강준은 작은 시료로도 DNA 추출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송 실장! 여기 틈새에 보여?"
"아뇨! 뭐가 있어요?"
"하얀 가루가 묻어 있지. 분쇄된 유골이 아직 이 유골함에 묻어 있는 거라고!"
"와!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과학수사군요!"
송지희가 입을 크게 벌리며 호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김신애의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김신애 거기 서!"
송지희가 자신을 향해 달려 나오는 걸 본 김신애는 얼른 현관문을 닫아 버리고는 복도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복병을 만났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광역수사대 경제수사팀의 허찬 경사입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렇게 손수 맞이해 주러 나오셨네요."
허 경사는 너스레를 떨며 김신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뒤따라 나오는 송지희와 강준을 보고는 마치 오랜 친구를 본 듯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거! 운동들 좀 하십시오. 달리기가 그렇게 느려서야 범인 잡겠습니까? 흐흐!"
허찬 경사는 함께 온 형사와 함께 김신애의 팔꿈치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허 경사님, 주차장에서 블랙박스 챙기셨죠?"
"이거 말입니까?"
주머니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흔들어 보이는 허 경사였다.
* * *
다음 날, 광역수사대 경제수사팀.
김신애의 차량 블랙박스에 기태현이 유골을 뿌리던 장면이 찍혀 있었다. 자신의 차량이 아닌 여자친구의 차량을 이용한 건 주도면밀했다.
하지만 기태현은 김신애의 차량까지 수사가 진행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누가 어떻게 되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두운 저녁에 찍힌 영상이지만 분석을 의뢰했더니 금방 신원확인이 되네요."
"경사님, 이건 그냥 야산 아닙니까?"
"아마 자기가 사들인 경기도 광주의 임야에 뿌린 모양이더라고요."
"그럼 결국 유골은 사라진 거네요……."
강준은 금형 공장에서 봤던 노영숙의 아들이 떠올랐다. 그에게 온전한 유골을 찾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그래도 과학수사팀에서 유골함에 남은 뼛가루를 가지고 DNA 분석이 가능하다고 하네요."
"아들에게 연락해 봐야겠군요."
"그렇죠…… DNA 대조를 위한 시료를 확보해야 하니까요. 두 시료가 친자로 나온다면 노영숙의 신원은 확인되는 겁니다."
허찬 경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나저나 삼자대면해 놓으니 아주 가관이던데요?"
"기태현과 오성희, 그리고 김신애 말입니까?"
"네, 서로 물고 뜯고 난리네요!"
"덕분에 혐의 입증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나요?"
"그렇죠! 자기네들끼리 술술 부니까요. 서로 뒤집어씌우려고 안달입니다."
껄껄 웃는 허찬 경사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는 화제를 돌렸다.
"근데 소장님, 놓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오미희 말입니까?"
"네, 오미희도 보험금 수령자가 아닙니까? 분명 공모자가 틀림없는데 지난번 영장 청구 때 빠트렸었거든요."
"행방을 전혀 모르는 겁니까?"
"핸드폰도 꺼놓고 차량도 자택에 그대로 있으니 찾을 도리가 없네요. 그렇다고 다른 거 다 제쳐 두고 오미희만 쫓을 수는 없으니까요."
난감한 표정을 짓는 허 경사였다.
"경사님, 오미희 제가 찾아드리면 고기 사십니까?"
"소장님이 행적을 찾아주시려고요?"
허 경사는 히죽 웃으면서 무슨 얘기인지 알겠다는 듯 받아쳤다. 사실 강준이 박성남으로부터 받은 사건은 이미 종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건의뢰 계약서에 따르면 위장 사망한 오성희만 찾으면 계약은 완료되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강준도 오미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제보를 좀 받아 볼까 합니다. 애초부터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까요."
"공개 수사로 전환해 달라는 거죠?"
"네, 그래야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이미 기태현이 늘어놓은 것들만 해도 오미희의 범죄 구성요건은 충분하니까요."
"네, 다음 주 안으로 오미희가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릴 테니 고깃집이나 예약해 두시죠."
"알겠습니다! 근데 혹시 저희가 먼저 잡게 되면 알죠?"
"그땐 제가 사겠습니다. 경사님! 하하!"
둘은 여러 사건을 통해 이미 돈독한 친분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강준도 광역수사대팀이 오미희의 행방에 대해서 신경을 못 쓸 정도로 바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경찰은 체포된 3인이 서로 엇갈리는 증언을 면밀히 분석해 살인의 행위를 재구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태현은 노숙인이던 노영숙을 소개만 해 준 것뿐이지 그녀를 먹이고 재운 건 오성희 자매라고 진술했다. 결국 졸피뎀을 막걸리에 타서 노영숙에게 먹인 것도 자매들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졸피뎀을 서울병원으로부터 처방받고 노영숙의 사망소견서까지 조작한 건 김신애였다.
살인의 공모자들 간의 연결점은 기태현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기태현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법정을 들락거린 경험이 있는 기태현이 물타기 작전을 하려는 거였다.
"다들 흙탕물끼리 섞여 봐야 흙탕물이지."
강준은 광역수사대를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밖에는 송지희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소장님, 우리는 여기서 이제 빠지는 건가요?"
"한 가지가 더 남았어."
"공범들이랑 살인죄 증거까지 경찰에 넘겼는데 이 정도면 우리 할 일은 다 한 거 아닌가요?"
"오미희! 어쩌면 애초에 이 모든 일을 기획한 건 보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오미희인지도 몰라."
송지희도 생각해 보니 노숙인을 대신 죽이고 사망보험금을 타내겠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오미희일 거로 생각했다.
"그러네요. 지금 어디 있대요?"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소장님, 아까 퇴근해도 된다면서요? 저 벌써 데이트 약속까지 잡아 놨는데요?"
"김준혁이랑? 편하게 사무실에서 데이트 해. 괜히 밖에 나가서 돈 쓰지 말고."
"소장님!"
"농담이야, 농담! 퇴근해라. 오미희는 다른 사람이 찾아줄 테니까. 하하!"
"그게 누군데요……?"
송지희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괜히 뜸을 들였다가는 닦달만 당할 터였다.
"더 절실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오미희가 챙겨서 가져간 돈을 되돌려 받을 사람이 누구겠어?"
"박성남이요?"
"그래, 아마 전국 어디든 쫓아갈 거다. 이제 우리 대신 고생 좀 하라고 해!"
강준의 말대로 진짜 안달이 난 사람은 예상했던 돈을 회수하지 못한 박성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