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휴대폰 분실보험 (4)
(159/250)
159. 휴대폰 분실보험 (4)
(159/250)
159. 휴대폰 분실보험 (4)
2022.05.08.
첼로 주점 룸 안.
“태식아, 걔 어디 간 거야?”
“새끼가…… 화장실 간다더니만 또 내뺐나 보네.”
병훈의 물음에 술이 잔뜩 오른 양태식이 거칠게 답했다.
“그나저나 박강준 그 새끼가 붙었다는데…… 진짜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계획대로 해야지.”
“그러다가 우리…… 지난번처럼 뒤통수 맞고 경찰에 잡히는 거 아니냐?”
탕!
양태식이 술잔을 테이블에 내리찍었다.
“시발! 우리가 언제까지 그 새끼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해? 어! 그 좆같은 새끼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너 할 일이나 잘하면 돼!”
고병훈은 순간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양태식의 성질머리를 알기에 바로 맞받아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대리점 몇 개만 개설하면 돈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양태식의 말에 의심이 생겼다.
‘내가 굳이 내 돈 들여가며 이렇게 위험한 데 투자해야 해?’
고병훈은 얼굴이 벌게진 양태식의 눈치를 살피며 술잔을 홀짝였다.
“금 사장,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나랑 일 하나 합시다.”
“무슨 일을 말이오?”
“우리 사업에 방해되는 새끼 좀 없애 버리자고요.”
“뭐요? 난 그런 일은 안 하오.”
단박에 자르는 금해철이었다. 하지만 양태식의 강준을 향한 복수심과 술기운에 덧붙여진 오기가 그냥 누그러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금 사장은 한국 뜨면 그만이잖아! 안 그래? 대한민국 경찰이 하얼빈까지 가서 금 사장을 잡을 거 같아! 어?”
금해철은 잠시 침묵하더니 술잔을 비우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 치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님다. 그냥 가볍게 입으로 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나도 그냥 말해 본 거 아닙니다. 나 이번에 한탕 크게 해 먹고 중국으로 뜰 겁니다. 잘됐네! 금 사장 있는 하얼빈으로 같이 갑시다. 나랑 가서 거기서 사업 하나 같이 하는 거 어떻습니까?”
술자리에서 뭔들 하지 못할 얘기는 없었다. 하지만 금해철은 양태식의 말에서 한 가지 귀에 박힌 게 있었다.
자기와 중국에서 사업을 같이하자는 말, 그건 바꿔 말하면 양태식이 여기서 해먹은 돈을 몽땅 자신이 다시 벗겨 먹을 수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태식아…… 일단 상황을 좀 보자…….”
고병훈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마! 상황을 보긴 뭘 봐?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뭐 그건 그런데…….”
“아까 재훈이가 했던 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휴대폰 분실 건수가 확 늘어나서 통신사에서도 자부담금을 높인다고 하더라…….”
분실 보상에 있어서 고객부담금을 높일 거라는 얘기였다. 고병훈은 아까 들었던 의심이 더 확고해졌다. 굳이 끝물에 돈을 태울 필요는 없었다. 그게 동창 친구인 양태식의 부탁이라고 해도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 확 땡겨야지! 자, 내일부터 바빠질 거니까 오늘 화끈하게 놀아 보자고!”
고병훈은 더는 분위기를 깰 수 없어 건배를 함께 하긴 했지만,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술자리가 슬슬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병훈아, 대리 불러라.”
“대리는 무슨! 운전하고 갈 수 있으니까 염려 마. 근데 여기 금 사장님은 어디서 지내시나요?”
여재훈이 있을 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알고 보면 하얼빈에서 온 금해철과 고병훈도 오늘 처음 본 사이였다.
“저는 영등포 쪽에 잘 곳이 있슴다. 형님 가족네가 그쪽에 있어서요.”
“아…… 가족분들이 한국에 계시나 보네요.”
“네, 10년 전부터 들어와서 살고 있슴다.”
양태식이 말이 길어지려 하자 대화에 끼어들었다.
“병훈아, 오늘은 얼른 들어가고 내일 나랑 얘기했던 곳들 둘러보자고. 알겠지?”
“그래, 대충 정리하자고…….”
“나는 여기 금 사장님하고 할 얘기가 남아서…… 조금 더 있다가 갈게.”
“어? 뭐 그러던지. 그럼…… 먼저 간다.”
“그래, 수고했고!”
고병훈은 찜찜함이 계속 남았다. 둘이 자신만 빼놓고 무슨 얘기를 나눌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병훈의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룸에 남은 양태식은 금해철에게 남은 양주를 따랐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은 거요?”
“뭐 꼭 그렇다기보다 하다가 만 얘기는 마무리 지어야죠.”
“무슨 얘기 말이오?”
금해철은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우리한테 붙은 보험조사관…… 떼 내줄 수 있겠어요?”
“내가 직접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소? 나도 일을 맡겨야 하는데 그럼 실비가 들어갈 수밖에 없슴다.”
“아니…… 진짜 우리가 지금 겨우 그런 사이밖에 안 됩니까? 뭐 처음 만나서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참!”
성질이 난다는 듯 술잔을 들어 원샷하는 양태식이었다. 그는 강준을 처리하는 데 돈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놈들에게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금해철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도록 일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자기 맘대로 그를 옭아맬 수 있으니까 말이었다.
“똑바로 말해 보시오.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소?”
양태식은 떨군 고개를 비스듬히 들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번 일 끝날 때까지는 우리 일에 간섭을 못 하도록 해야겠죠…….”
무척 모호한 말이었다. 죽여 달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겁만 주라는 건지 확실하지 않은 말이었다. 금해철은 자신에게 책임을 미루는 양태식이 미덥지 못했다.
“최근에 박강준 그 새끼가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무슨 사무실 쪼그만 거 하나 냈더라고요. 우리가 보험금 받을 때까지만 조용히 있게 하려면 한번 뒤엎어줘야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금 사장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하고 가서 겁만 한번 줘요. 보험금 무사히 잘 받으려면 금 사장이 그 정도 역할은 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금해철은 보험사기극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찾던 상황이었다. 양태식의 제안은 오히려 그의 머릿속을 단순하게 만들어줬다.
“알겠슴다. 양 사장을 위해서 내가 처리하겠소…….”
양태식은 그런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 * *
몇 주 뒤. 강남역 지하상가.
상황은 고병훈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그의 투자자금으로 마련된 총 10여 개의 대리점에서는 수백 대의 최신형 스마트폰이 신규 개통되었다.
“병훈아, 처음부터 이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강남에 새로 차린 휴대폰 대리점에서 양태식은 싱글벙글 신이 난 듯했다.
“야! 보증금으로 들어간 것만 벌써 몇억이다. 그리고 매월 들어가는 월세만 천이 넘어! 근데 현금은 안 돌지! 완전히 미치겠네!”
“인마, 보험금 들어오면 그게 거의 10억 가까이 돼. 근데 뭐가 걱정이야?”
“넌 책임질 게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어? 나만 내 돈 꼬라박고 말이야!”
“병훈이 너 감방까지 갔다 온 놈이 왜 그렇게 간이 작아졌어? 어?”
그 말에 고병훈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투자를 철회하려던 그에게 투자금을 억지로 끌어낸 건 양태식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강요였다.
양태식은 고병훈의 수입차 카센터에서 어떻게 부품 바꿔치기를 하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결국 카센터 직원을 매수해 고객들의 명단을 빼돌렸고, 그다음은 양태식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갔다.
고객들에게 부품 바꿔치기를 알린다는 걸 빌미로 전과자인 고병훈의 코를 완전히 꿰어 버린 거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고병훈은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현금을 휴대폰 분실보험사기에 꼬라박은 거였다.
돈이 투자된 순간 둘의 입장은 바뀌었다. 양태식은 여유가 넘쳤고, 고병훈은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보험금이 들어오기까지 고병훈은 피가 말랐다.
“개새끼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해?”
지하상가의 옆 가게에서 목소리가 높아진 둘을 주시했다. 양태식은 능글맞게 웃었고, 고병훈은 속만 타들어 갔다.
“지금쯤 금 사장이 잘하고 있을 테니까 넌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리고 넌 조바심 좀 내지 마라. 어릴 때부터 그래서 넌 매일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고병훈은 마지막 말에 애써 누르고 있던 자제력의 끈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누가 보든 상관없이 양태식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번 일 잘못되면 친구고 뭐고 아주 죽여 버릴 거야. 알겠냐?”
둘은 더는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감정이 상해 있었다. 양태식은 보험금이 들어오면 금해철과 함께 그 돈을 들고 나를 생각이었고, 고병훈은 일이 잘못되면 양태식을 진짜로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 * *
을지로 박강준 보험조사사무소.
자정이 넘은 시각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고, 젊은 남자들 서너 명이 들이닥쳤다. 금해철은 1층에서 경비원을 붙들고 있었고, 강준의 사무실에 몰려간 자들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쾅! 쾅쾅!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남자들이 사무실 내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뒤엉킨 채 실내의 전등을 켜려고 여기저기를 더듬거렸다.
“야! 스위치 여기 있다!”
한 명이 불을 ‘탁’ 켰을 때, 사무실에 침입한 남자들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굳어 버렸다. 금해철이 설명하기로는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이미 자신들보다 건장한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치 내려놔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강준이었다. 그런 강준의 뒤에는 연남시에서 올라온 장재식과 번암주류의 직원들이 버티고 있었다. 강준은 보험사기극에서 한발을 뺀 여재훈으로부터 사무실이 습격받을 거라는 정보를 이미 전해들은 상태였다.
전등 아래서 보니 사무실에 무단침입한 남자들은 생각보다 앳된 얼굴들이었다.
“너희들 뭐야? 누가 시켜서 온 거야?”
남자 중 한 명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인력사무소에서 나온 건데요?”
“뭐? 지금 장난해?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진짜인데요…….”
덩치가 있는 장재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침입자 중 한 명이 알아서 입을 열었다.
“진짜 인력사무소 맞는데요…… 저희 데리고 온 사람 지금 빌딩 경비실에 있을 겁니다. 경비원 잡아서 CCTV 지울 거라고 했거든요…….”
“조직적이네, 너희들 깡패야?”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진짜 아닙니다!”
“일거리 있다고 해서 온 거예요!”
“우리도 이런 일인 줄은 몰랐다고요.”
강준은 그들 속에서 금해철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
“너희들 지금 조선족 사장 밑에서 일하는 거지?”
남자들은 말투로 미루어 보건대 조선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었다.
“요즘 인력시장 조선족들이 전부 다 잡았거든요…… 우리같이 특별한 기술 없으면 조선족 사장한테 잘 보여야 해요. 솔직히 저희도 내키지는 않는데…… 일 안 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죠…….”
현실적인 얘기였다.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원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 자신들도 불법침입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너희 지금 내려가서 조선족 사장 데리고 와라. 금해철 사장 말이야……. 안 그러면 싹 다 경찰에 넘기는 수가 있어!”
“지…… 진짜 경찰에 안 넘기실 겁니까……?”
“그래, 속고만 살았냐?”
침입자들은 금해철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던 강준에게 놀란 눈치였다. 강준의 말마따나 그들도 이런저런 세상의 속임수에 당하고 살았을 터였다.
“네. 데려오겠습니다! 약속한 겁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얼른 데려와!”
잠시 후, 속아서 사무실로 올라온 금해철은 뒤늦게 도망치려 했지만, 장재식의 주먹에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금해철은 정신을 다시 차렸다.
“당신들 누구니?”
“네가 더 잘 알잖아. 양태식이 죽여 버리라고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다!”
강준의 말에 금해철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채고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아니! 그냥 겁만 주고 오라고 그랬어! 진짜야…… 죽이라고 한 적은 없어! 정말 난 억울하다…… 정말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