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휴대폰 분실보험 (3) 2022.05.07.
서대문구 홍제동. 평범해 보이는 휴대폰 매장에는 직원도 없이 양태식 혼자서 가게를 보고 있었다. 물론 진짜 휴대폰을 팔기 위한 의지는 없어 보였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간단한 간판만 걸려 있고, 신상 휴대폰으로 가득해야 할 내부의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왔냐? 거기 앉아.” “여기 서류요. 오늘은 다섯 명입니다.” 여재훈은 항상 그랬듯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재한 중국인들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꺼냈다. “재훈아, 지금 급하냐?” “아뇨. 이것만 하고 여기서 바로 퇴근하면 됩니다.” “일 얘기는 좀 있다가 하고 내가 소개해 줄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누군데요?” 양태식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는 속셈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챈 여재훈이었지만,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내 동창 친구 놈인데, 알아두면 너한테도 좋을 거다. 걔가 이런저런 사업을 좀 하거든.” “네…… 뭐 저야 좋죠…….” 떨떠름하게 알았다며 대꾸했지만, 여재훈은 속으로 짜증이 났다. 매번 양태식이 일을 꾸밀 때 쓰는 패턴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떼어 주는 이득이 아까워 술수를 쓰려고 하는 것이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판을 키우려는 거였다. “근데 형님, 저 이거 다섯 명이니까 50만 원씩 총 250만 원인데 그중에 절반이 선수금이니까 125만 원 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일단 자신이 챙겨야 할 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겠다는 여재훈이었다. 양태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노려보듯 대꾸했다. “어, 줘야지.” 그는 책상 아래에 있는 금고를 열고는 5만 원짜리 뭉치를 한 묶음 꺼내 여재훈에게 내밀었다. “백만 원이야. 오늘은 현금이 이것밖에 없네. 다음에 올 때 나머지 줄게. 괜찮지?” 여재훈은 그 자리에서 미수금 확인서라도 받아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차피 뒤가 구린 거래였다. 꼬치꼬치 따지다가 양태식과의 관계가 틀어질 것 같았다. 고만고만한 알을 낳는 거위 배라도 그냥 찢어버리기보다는 당분간은 참고 버티는 게 나았다. “네, 그러시죠…….” 양태식은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가게 문을 닫고는 인근 술집으로 향했다. 첼로라는 간판을 내건 술집은 지하 계단을 통해 들어가는 주점이었다. “……태식 형님, 제가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이런 데는 다음에 오시죠.” “아휴, 걱정하지 마!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요.” 정색하고 답하는 여재훈에게 양태식도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지금 사람들 기다리고 있는데 안 들어가겠다고?” “……그럼….” 여재훈이 주점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건 주점 같은 데를 본인이 꺼려서가 아니었다. 단지 술을 먹여 놓고 사업적인 얘기를 꺼내는 양태식의 술수에 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인사만 하고 나오는 걸로 하죠.” “새끼…… 까칠하긴! 인마! 넌 그런 모습이 매력이라니까! 하하!” 입에 발린 말로 여재훈과의 어색해진 분위기를 뭉개는 양태식이었다. 큰 덩치의 양태식은 여재훈의 어깨에 손을 턱 얹고는 그를 계단으로 끌고 내려갔다. 룸에는 벌써 일행이 와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은 양태식과 함께 차대번호를 위조해 보험사기를 쳤던 고병훈이었다. 그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여전히 수입차 전문 카센터를 운영 중이었다. “여기는 내 동창 고병훈. 이쪽은 말했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놈이 있다고! 여행사 다니는 재훈이.” 양태식의 소개에 둘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여재훈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태식이 친구 고병훈입니다.” 여재훈의 시선은 나머지 한 명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이 왔다. “혹시 중국분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어찌 아셨소?” “대충 알죠. 이 일만 몇 년째 해 오고 있으니까요.” “좌우간 반갑습니다. 금해철이라고 하오.” 여재훈은 금해철에게 고개를 잠깐 숙이고는 앞에 놓인 물컵의 물을 들이켰다. “아, 좋은 술 놔두고 왜 이래. 한 잔 받아!” 신이 난 것처럼 보이는 양태식이 재훈의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천천히 술을 따르며 양태식이 능구렁이처럼 본론을 꺼내 놨다. “우리 사업을 이제 좀 키워 봐야 하지 않겠어?” 여재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양태식의 속셈이 어떤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의 몫을 빼앗을 요량인 거였다. “여행사 오가는 조선족들 체류비자로 휴대폰 개통해 봤자 얼마나 개통하겠어? 안 그래?” “저번에 한 대리점에서 갑자기 개통을 많이 하면 의심을 살 수 있다고 그러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러니까 여기 내 친구인 병훈이가 온 거잖아. 얘가 비싼 수입차 카센터를 하거든. 그래서 돈이 좀 많아. 하하!” 고병훈은 그런 자기소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양태식에게 호응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병훈이가 자금을 대서 대리점을 여러 군데 만들면 개통을 더 많이 할 수 있겠지?” “……그렇죠.” “그리고 여기 흑룡강성…… 어디서 오셨더라?” 양태식이 금해철을 보고 물었다. “흑룡강성 하얼빈임다.” “맞다! 하얼빈. 거기서 한국에 단기로 올 수 있는 중국인들을 이쪽으로 보내면 재훈이 네가 서류작업하고! 그리고 내가 분실 폰으로 보험금 청구하고! 그러면 딱딱 일이 맞아떨어지지 않겠어?”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재훈을 압박하는 양태식이었다. 결론적으로 여재훈으로서는 수익과 역할이 함께 줄어드는 형국이었다. ‘나보고 그만 먹고 여기서 그만두라는 건가?’ “네, 뭐…… 한번 고민해 보죠.” “고민하긴 뭘 고민해. 바로 일 진행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이미 판을 다 짜 놓고 통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자! 그럼 애들 들어오라고 하고 오늘은 진탕 놀아 보자고!” “태식아,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돈 낼 생각 마라.” 고병훈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다. “자식이! 내가 돈 낼 틈을 안 주네! 틈을 안 줘!” 양태식이 껄껄거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얼빈에서 왔다는 금해철은 아직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는지 그저 미소만 띨 뿐이었고, 양태식과 고병훈은 눈빛을 교환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태식이 형, 근데……!” 목소리를 높인 여재훈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왜? 뭐 문제 있어?” “아까 보험조사관이 오전에 절 찾아왔어요.” “뭐? 왜 그걸 이제 얘기해!” 표정이 확 변한 양태식이었다. “지금 휴대폰 여러 대 개통해서 분실 보험금 받은 사람들 직접 찾아다니고…… 그러는 중인가 보더라고요.” “하…… 시발……!” 하지만 벌써 일을 벌여 놓은 양태식이었다. 옆에 있던 금해철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거 그럼 앞으로 보험금 못 받는 거 아니오?” 양태식은 당황한 눈빛을 얼른 감추고는 말을 이었다. “원래 한국 보험사들이 보험금 안 줄라고 뺑끼치는 건데…… 그건 그것대로 제끼고 가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노숙자들한테 대포통장 다 받아 놨는데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안 되지…….” 자신도 투자한 게 있으니 낙장불입이라는 얘기였다. 양태식은 고병훈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중요한 건 돈을 투자할 고병훈의 의중이었다. 조선족 브로커인 금해철이나 여행사 직원 여재훈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면 그만이었다. “재훈 씨, 보험조사관이 누가 찾아왔는지 기억해요?” “박강준 보험조사사무소라고 하던데…… 아는 데예요? 소속도 정확하지 않던데…….” 여재훈의 말에 양태식과 고병훈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경악했다. 자신들이 일전에 엿 먹은 게 바로 박강준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발…… 그 새끼는 우리만 쫓아다니나…….” “태식이 형 아는 사람이에요?” 양태식의 혼잣말에 여재훈이 따져 물었다. “신경 안 써도 돼. 보험회사 다니는 놈이었는데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놈이거든. 게다가 지금은 보험회사 다니고 있지도 않을걸?” 양태식은 강준의 소식에 대해서 접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강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그였다. 어쩌면 바로 이번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시 술자리가 무르익기 시작했고, 여재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룸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예 밖으로 나와 연달아 두 대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발길을 어디로 둬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시발…… 일 커지기 전에 털고 나가야지…… 저런 생 양아치 같은 새끼들이랑 어울렸다가는 나까지 좆된다……!” 여재훈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강준은 아까 낮에부터 놈들을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얼굴인 양태식과 고병훈을 한꺼번에 보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어떻게 해야 두 놈을 한꺼번에 일타쌍피로 잡을지 고민하는 동안 밤이 됐고, 그렇게 주점 앞에서 몇 시간째 잠복 중이었다. 강준은 아직 둘의 보험사기 행각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양태식은 노숙자 명의를 동원해 앞장세우고 자신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게 특기였다. 기존 범죄 혐의로 경찰 수배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체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흐지부지한 처벌을 받고 끝날 가능성이 컸다. ‘사기 범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법원이 너무 관대하단 말이야……!’ 그때 갑자기 강준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박강준입니다.” ―아침에 뵙던 하남여행사의 여재훈입니다. 강준은 차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벌떡 허리를 세웠다.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재훈이 직접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제가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서 생각이 안 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왜 제 명의로 휴대폰이 개통됐는지 알 거 같아서요. “……도림동에 있는 휴대폰 매장에서 도용당한 거 아니었습니까?” 강준은 자신의 눈앞에서 통화하고 있는 여재훈의 서성거림을 주시했다. 그는 초조한 듯 발걸음을 왔다 갔다 했다. ―실은 그 도림동 매장을 운영하셨던 분이 제가 알던 분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근데 왜 오전에는 말씀을 안 하신 건가요?” ―그건……. 통화음 너머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강준이 정곡을 찌르자 움찔한 여재훈이었다. ―우선 만나 뵙고 자세한 얘기 나누고 싶네요. “어디서 뵐까요?” ―지금 어디 계시나요? 강준은 차 문을 열고는 첼로 주점 입구로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재훈은 고개를 홱 돌렸다. “어! 어…… 어떻게!” “일단 자리를 옮겨서 말씀 나누시죠. 오늘 밤 서로 할 얘기가 많을 거 같은데.” 여재훈의 얼굴에서는 당혹감이 드러났다. 강준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