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 휴대폰 분실보험 (1) (156/250)


156. 휴대폰 분실보험 (1)
2022.05.05.


도쿄 롯본기 소프트재팬 본사.

손미영은 화가 난 듯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소프트재팬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지금 회장님 안에 있죠?”

“어… 어떻게 오셨는데요. 약속을 잡고 오신 건가요?”

데스크 여직원의 질문에 손미영은 레이저 같은 눈빛을 쏟아냈다. 그러자 나이 든 다른 직원이 얼른 달려와 고개를 푹 숙였다.

“회장님 안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 교육 이따위로 시킬 거예요?”

나이 든 직원은 손미영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그저 고개만 숙인 채 묵묵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사무실 복도를 한참 지나 제일 안쪽에 있는 회장실로 안내했다.

벌컥!

“뭐야?”

“회장님, 아가씨 오셨습니다.”

손주영 회장이 허연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손미영을 냉랭하게 쳐다봤다. 그녀는 손주영 회장의 딸이었다.

“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말이냐?”

“제가 말씀드렸던 신디케이트 건이요. 어떻게 딸인 저를 제쳐두고 성원화재랑 일을 벌이신 거예요? 네?”

“그 영국 놈이 도망쳤다면서? 근데 내가 어떻게 그놈을 믿고 뒤치다꺼리를 해준단 말이냐?”

“도망친 게 아니라니까요! 찰스도 일을 해결하려고 간 거예요! 아버지가 조금만 도와주시면 다 잘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손미영의 벌링턴 남작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애초부터 벌링턴 남작이 일본의 주택 재해보험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대부업체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손주영 회장의 도움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일련의 일들을 노진용 과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손주영 회장은 딸에게 둘만의 힘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면 둘의 관계를 인정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노진용 과장이 숨겨둔 카드라고 생각했던 손주영 회장과의 인연도 실은 딸을 걱정된 손주영 회장이 미리 손을 써둔 카드일 뿐이었다.

“미영아, 그만해라. 찰스인지 뭔지 하는 놈… 지금 뭐 하고 다니는지 너는 알고 그러는 거냐?”

“영국에 있다니까요. 로이즈 보험이랑 직접 보험금 지급 협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쪽에서 지급보증금을 더 올리라고 한데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와이트러스트에 말 좀 해주세요!”

“…안 돼! 이제 그만해라!”

“……아버지!”

살벌한 분위기의 대화가 멈췄고, 무거운 침묵만이 잠시 이어졌다. 손주영 회장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손미영에게 내밀었다.

“이걸 보고도 네 맘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손주영 회장이 준 건 벌링턴 남작이 스페인의 이비자(Ibiza) 섬에서 미녀들과 함께 환락의 파티를 즐기는 장면이었다.

손미영은 손을 벌벌 떨며 그 사진들을 바라봤다. 남자친구의 문란한 행각을 최악의 방식으로 확인하게 된 거였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주영 회장은 그런 딸이 안타까웠는지 아까의 냉랭한 표정을 풀고는 딸의 팔을 일으켜 세웠다.

“미영아, 별거 아니다. 그냥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면 돼. 저번에 내가 얘기한 저가 항공 사업 쪽으로 한번 준비해 봐라. 이 애비가 때가 되면 뒤에서 도와줄 테니까….”

눈에 콩깍지가 벗겨진 손미영은 울음을 터트렸다. 한 번도 그런 모습을 손 회장 앞에서 보인 적 없던 그녀였다.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순간에 자신의 손을 다시 잡아주는 손 회장을 보며 그녀는 생각을 완전히 바꿔먹었다.

“알겠어요… 저 한국으로 갈게요. 가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저가 항공 사업에 도전해 볼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잘 안 됐던 거는 훌훌 털어버려라. 자꾸 뒤를 돌아봐봤자 얻어지는 건 없다.”

“그래도… 그 자식을 용서할 수 없어요! 와이트러스트에 그 인간이 어디 있는지 다 말해버릴 거예요. 다시는 일본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만들어버릴 거라고요!”

“미영아……!”

손주영 회장은 딸이 독한 마음을 품은 게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려도 말려지지 않을 성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 * *

을지로 인쇄골목 광희빌딩

박강준 보험조사사무소.

오랜만에 출근한 강준에게는 예전보다 이런저런 서류들로 둘러싸인 사무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장님 없으셔서 우리가 적적했는지 아십니까?”

김준혁은 강준을 보자마자 너스레를 떨었다. 송지희는 준비해둔 뭔가를 가져와 강준에게 내밀었다.

“소장님, 영수증 처리해야 할 것들이요….”

강준의 일본 출장 기간에 쌓인 비용처리 항목들이었다.

“어이쿠! 뭐가 이렇게 많이 쌓였을까?”

“김준혁 실장한테 얘기 들었어요. 니케이 지수 선물로 30억 원이나 버셨다면서요? 이제는 저희한테 앓는 소리 안 통하세요.”

송지희는 거기다 한술 더 떴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무실 이사를 해야겠어요.”

“어? 그건 왜?”

“찾아오는 손님들이 수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우리가 무슨 흥신소도 아니고….”

“그래서 송 실장은 어디로 가고 싶은데?”

“요 앞 대로에 신축 빌딩 생겼잖아요? 거기가 멋지던데요? 1층에 카페도 있고 출입 보안도 철저하고요.”

“관리비가 만만찮을 거 같은데….”

“소장님! 30억 있으시다면서요? 회사에 투자 좀 하세요.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법인화하시죠.”

둘은 마치 그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합심해서 입을 맞췄다.

“좌우간 저희 이사 가요!”

“사무실 이전합시다!”

강준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 30억… 지금 통장에 없다. 투자했어.”

“네? 투자요? 어디 다요?”

“이번에 성원그룹에서 재보험시장 진출을 위해 설립한 소프트성원리.”

“네? 소프트 뭐시기요?”

“소프트성원리. 소프트재팬과 성원그룹의 합자 법인이니 그렇게 이름을 지은 거고. 마지막에 리는 재보험을 뜻하는 거야.”

“그래서? 30억을 다 투자했다는 겁니까?”

“어. 몽땅 다.”

실망한 표정의 둘이었다.

“걱정하지 마. 매년 배당금 받기로 했다. 그걸로 여기 사무실 운영비는 충분할 테니 이제 너희들은 보험조사 업무에만 신경 쓰도록! 아… 그리고 방금 말한 법인화 그거 하자. 그리고 사무실 이사는… 천천히 하자고. 눈앞에 놓인 일들도 태산일 테니.”

당장 둘의 기대감을 꺾을 이유는 없었다. 강준이 그렇게 말하자 둘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더는 닦달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송 실장이 좀 전에 그랬잖아… 손님들이 찾아왔었다고. 누가 찾아왔었어?”

“이런저런 데서 많이 왔었죠. 떡 팔러 오시는 할머니부터 보험이랑 관련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본인 하소연하러 오신 분들까지요… 실은 그런 방문이 너무 우후죽순으로 많으니까 업무에 방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두 실장님이 이사하자고 주장하신 거구먼?”

“네… 맞아요. 정말 일단 간판이라도 내려야 할까 봐요.”

송지희와 김준혁의 이사 요구는 단순 투정이 아니었다. 강준의 유명세만큼이나 직원들이 무턱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인쇄 골목의 사무실은 이제 정말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 * *

그날 오후. 인쇄 골목 사무실.

일전에 찾아온 적이 있다는 손님이 재방문했다. 그는 중소보험사인 신명보험의 황 과장이었다.

“손해보상팀의 황준범 과장입니다.”

“지난주에도 오셨다고요?”

“네, 저희 같은 중소보험사에는 따로 보험조사팀이 없습니다. 손해보상 쪽에서 보험조사까지 업무를 커버해야 하죠.”

“힘드시겠군요….”

“네, 아무래도요. 일도 치이는데… 골치 아픈 일까지 생기면 업무에 렉이 걸립니다.”

“그래서 저희를 찾아오신 거군요. 편하게 말씀해보시죠.”

황준범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 그간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중소보험사인 신명보험에게는 1년 전에 국내 굴지의 통신사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핸드폰 개통 시에 분실과 파손보험 상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연히 신명보험으로서는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기회니 덥석 물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독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었습니다.”

“보험금 책정이 잘못된 거였군요?”

“아뇨, 그게 아니라 사고율이 완전히 빗나간 겁니다. 스마트폰이 출시되면서 손해율이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한 겁니다. 이걸 한번 보시죠.”

황 과장이 내민 자료에는 지난 몇 개월간의 보험금 청구 건수와 지급 금액이 적혀 있었다. 정확히 스마트폰 출시와 맞물려 손실률이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이번 달에만 10억 원이 넘어갑니다… 별로 많지 않은 금액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같은 작은 보험사로서는 이게 엄청나게 치명적인 손실이거든요.”

“작년부터 손해율이 100%가 넘어갔군요… 올해는 이대로 가다간… 200% 선까지도 갈지 모르겠고요.”

“네, 맞습니다. 통신사 쪽과도 협상 중인데 고객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이라 그쪽에서도 완강합니다.”

황 과장의 말투에선 그간의 곤란함이 묻어났다.

“신명보험으로서는… 고객 자기부담금을 높이는 수밖에 없었겠군요.”

“네, 맞습니다. 근데 그게 잘 안 되다 보니까… 자체적으로 줄여보려는 노력을 한번 해봤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왔다는 얘기였다. 커피잔을 홀짝 들이킨 황 과장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험금 청구한 리스트들을 쭉 보다 보니까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면…?”

“그게 보니까 특정 대리점에서 개통한 휴대폰들이 죄다 분실이 된 겁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대리점이 고객들과 짜고 보험사기를 쳤다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바로 그거죠.”

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회귀 전에도 휴대폰 분실보험 사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은 없었다. 경제과 소속 경찰이었던 그가 다루기에는 너무 작은 사건이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럼 그 대리점들을 조사해 보면 고의적인 보험사기였는지 아닌지가 나오겠네요.”

“……하아… 근데 그 대리점들이 실제로 연락을… 해보니 전부 문을 닫은 겁니다.”

“네? 전부 다요.”

“네. 모조리 폐업했습니다.”

고의적인 휴대폰 분실 보험사기가 분명해 보였다.

“우리가 조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력도 그렇고 관계 기관과의 문제에서도 그렇고요.”

적극적으로 고객을 보험사기로 몰아간다면 보험상품의 원청인 통신사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게 뻔했다. 그래서 외주업체인 강준의 보험조사 사무소를 찾은 거였다.

“아! 물론 박강준 소장님의 명성을 들어서 온 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 사측에서는 소장님을 이번 사건의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사건의뢰를 맡아주십시오.”

강준은 양손의 깍지를 끼고는 황 과장의 뒤에서 미팅 모습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두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의뢰사건에 대해서 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사비용은 얼마나 주실 수 있나요?”

“크게 한 장 드리겠습니다.”

“네? 한 장이라면 1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손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부담할 수 있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강준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네. 귀사의 사건을 맡아드리죠!”

순수하게 외부의뢰로 들어온 박강준 보험조사사무소의 첫 번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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