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 로이즈 재보험시장 (4) (155/250)


155. 로이즈 재보험시장 (4)
2022.05.04.


2011년 3월.

도쿄 일대에서 강진이 발생했다. 진원지는 센다이 지역인 미야기현 오시카반도로부터 동남쪽으로 130km 떨어진 해저였다.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

도교 일대는 곧바로 정전에 휩싸였고, 일대의 도시들에서는 간헐적인 건물 붕괴와 대형화재가 잇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명적이었던 건. 강준이 회귀 전 알고 있었던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이었다.

폭발이 일어난 원자로를 식히려 사용됐던 바닷물이 오염되면서 일본은 향후 방사능 오염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다행인 건 성원화재 경영진들이 한유철의 보고를 듣고는 마지막 순간에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 합류 결정을 취소했다는 점이었다.

지진이 발생하자 성원화재의 도쿄 사무실도 분주해졌다.

“소장님! 저희가 지진을 예측하는 자료를 만들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걸 예측할 수 있으면 보험이라는 게 애초부터 없었겠죠. 피해 상황이 집계되면 각 보험사의 피해보상 현황을 확인해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출장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간 강준이 로이즈 재보험시장의 진출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듯이 동일본대지진은 성원화재가 국제 재보험시장에 진입할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며칠째 강준은 한유철 대리와 함께 정신없이 피해집계 상황을 정리하고 이리저리 정보를 수집했다. 오전 시간이 후딱 지나는 건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한 대리님 일단 점심부터 드시고 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근처 초밥집에 예약해 놓겠습니다.”

한 대리가 말한 초밥집은 인근에서 꽤 인기가 좋아 점심때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식당이었다. 좌석이 많지 않았기에 정작 강준은 식당에 도착해서도 자리가 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는 성원화재 일본지사장이었던 노진용이었다. 그의 옆에는 낯선 일본인 여자가 있었다.

“노 과장님, 오랜만이군요…….”

강준이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역시 그 초밥집에 예약한 거였다. 이제 식당에 자리가 날 때까지 서로 어색한 순간을 버텨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벌링턴 남작하고 일이 잘 안 됐다면서요?”

“정말 아찔했죠. 만약 그 신디케이트에 들어갔다면 아마 지금쯤 멘붕에 빠졌을 겁니다.”

“……이번 지진은 여기 일본인들에게도 충격이 클 겁니다. 근데…… 아직 여기 도쿄에 계시네요.”

“네. 로이즈 재보험시장 진출을 포기한 건 아니거든요.”

노진용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제가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진심 어린 조언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실은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가 일본의 대부 금융업체들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쪽에서 돈을 끌어와 주택재해보험 사업을 벌일 만한 재무 상태를 만든 거죠. 지금 아마도 벌링턴 남작은 일본을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찰스 벌링턴이 대규모 부채를 떠안고 파산한다는 얘기였다.

“손미영 씨도 같이 영국으로 간 걸까요?”

“하하! 그건 소장님이 벌링턴 그 인간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손미영이 어떻게 되건 그 인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죠.”

“전과는 얘기가 다르군요. 전에는 벌링턴 남작이 손미영과 함께 있으려고 한국 보험시장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노진용이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님, 저도 제가 잘못한 거 압니다. 그때는 저도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남아 보려고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살아남으셨나요?”

노진용은 강준의 질문에는 차마 답하지 못한 채 한유철을 바라보며 화제를 바꿨다.

“……한 대리는 잘 지냈지? 지사장으로 승진했다며?”

“네, 과장님…… 송구합니다.”

본사 측에서는 얼마 전 이례적으로 대리 직급이었던 한유철을 과장으로 승진시키고는 동시에 지사장으로 임명했다.

“전 이제 중국하고 이곳을 오가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직이 아니라 창업을 하신 거네요.”

벌링턴 남작에게 버림받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네. 일본에 3천 개가 넘는 유통점을 가진 업체에 선이 닿았거든요. 거기 납품하는 제품들을 중국에서 생산해 보려고요.”

“일종의 무역업이군요.”

“……그렇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없는 사업일 뿐이었다. 해외 지사의 지사장으로 있었던 노진용으로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격이나 다름없었다.

식당 안에 좌석이 생겼는지 종업원이 나와 안내했다.

“아무쪼록 잘 되시기를 빕니다.”

“노 과장님, 그럼 또 뵙겠습니다.”

둘이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노진용이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유철에게 건넸다.

“이거 내가 결정적일 때 쓰려고 했던 건데…… 이제 나한테는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그가 내민 건 구겨진 명함 한 장이었다.

“아니 이분은! 재일교포 출신의 전설적인 투자자 손 회장이 아닙니까?”

“보험업계에 관심이 있으시더라고…… 내가 벌링턴 남작 쪽으로 합류하면 써먹으려고 했던 카드인데…… 손미영이 그것까지는 몰랐던 거겠지.”

한유철에게 건넨 명함의 주인공은 한국의 기업들에도 많은 투자를 하는 소프트재팬의 손주영 회장이었다.

“이제 한 대리가 일본지사장이 되었으니 한번 잘해 봐. 아마 성원화재가 이번 기회에 치고 들어온다면 분명 도움을 주려고 할 거야.”

“감사합니다. 과장님!”

일견 초라해 보이는 노진용의 모습에서 짠한 감정을 느끼는 한유철 대리였다. 제대로 된 송별회도 없었던 노진용 과장의 퇴직이었다.

“노 과장님, 새로운 사업 건승하십시오!”

“그래, 고맙다.”

비록 배임행위를 한 노진용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훈훈했다.

* * *

한 달 후, 도쿄 시부야.

노진용의 말대로 벌링턴 남작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가 운영하는 신디케이트는 지급 불능 상태에 빠졌다. 런던 로이즈에서는 벌링턴 남작이 예탁한 예탁금을 즉시 회수하고, 그의 신디케이트의 자격을 정지시켰다.

대신, 런던 로이즈에서는 직접 보험계약자들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300년 전통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와! 이거 좋네요. 어디서든 메일을 다 열어볼 수 있고 말이죠.”

“선물이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누가 준 선물인데요…….”

강준은 한국에서 최초로 출시된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는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그의 옆에는 강준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최은정 이사가 함께 걷고 있었다.

“김성호 이사님이 지금 손주영 회장과 만나서 세부적인 합의사항을 결정할 거예요.”

“……알아서 잘 하시겠죠. 근데 만약에 그룹 내에 재보험사업팀이 만들어지면 김성호 이사님이 직접 맡으시는 건가요?”

“아마도요. 근데 사업팀 정도를 넘어설 거예요. 우리가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에서 지급했어야 할 보험금의 일부를 분담하는 대신 런던 로이즈에는 멤버 권한을 달라고 할 거거든요.”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에서 미지급한 보험금은 2조 원에 육박했다. 그중 일부를 손주영 회장이 투자해 주는 대가로 성원화재는 손 회장과 함께 독립 재보험사를 만들 예정이었다.

이제 성원화재는 국내 보험업계로는 처음으로 런던 로이즈 재보험시장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근데 김성호 이사님이 빠지시면 전략기획부는 이사님이 맡게 되는 건가요?”

“아뇨. 전 아직 경험이 부족해요. 김성호 이사님 빈자리는 인사팀 쪽의 이희성 이사님이 맡으실 거예요.”

“그렇군요…… 근데 이 선물로 퉁칠 겁니까? 이번에 일본 오가며 시간을 꽤 많이 쏟아부었는데?”

강준의 말에 최은정이 씩 웃으며 돌아봤다.

“강준 씨가 선물거래로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정말이에요?”

“네? 그걸 어디서 들으셨대요?”

“다 아는 수가 있죠. 솔직히 말해 봐요. 얼마나 벌었어요?”

강준은 일본에 출장 오면서 김준혁에게 증권계좌의 출금을 맡겼던 게 떠올랐다. 그때 증권사 창구에서 잔고를 확인했는지 김준혁은 연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댔었다.

“와! 김준혁 이 녀석! 이렇게 입이 싸다니!”

“나한테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어요?”

입을 삐죽 내민 최은정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 미리 실토하죠. 이번에는 판을 좀 크게 벌였습니다. 백억 원이 조금 넘네요…….”

“네? 백억 원이요? 준혁 씨는 30억 정도라고 하던데?”

아차 싶었다. 김준혁이 본 계좌에는 30억 원만 들어 있는 계좌였다. 분산된 강준의 계좌를 전부 확인한 건 아니었던 거였다.

“아…… 김 실장이 그렇게 말했었나요? 하하…… 좌우간 뭐……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강준 씨, 선물거래는 너무 위험해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겠지만, 그런 거래는 개인투자자들이 하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크죠.”

“알고 있습니다. 선물거래는 이제 그만하려고요. 편하게 부동산 건물이나 사서 월세나 받고 살 겁니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아요. 결국 지금 운영하는 SIU팀으로 계속 돈이 들어가겠죠.”

최은정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험금 지급을 안 해 주려는 보험사와 장단을 맞추지 않는 이상 돈 벌기 쉽지 않은 게 독립 SIU사무소의 현실이었다.

“큰오빠와도 벌써 얘기가 된 건데 이번에 신설하는 재보험사 신규 법인에 강준 씨가 투자할 수 있게 해드릴 거예요.”

“설마 제 계좌의 돈을 다 넣으란 얘기는 아니겠죠……?”

“당장 쓸 돈 빼고는 다 넣어요. 재보험사업은 그룹 차원에서 안정성이 있게 가져가려는 계획이니까요. 앞으로도 많은 자금을 끌어모아야 하니 배당도 매년 괜찮은 수준으로 할 거고요.”

배당금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바뀌는 강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선물투자로 번 자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고민이던 참이었다.

성원그룹 재보험사의 주주, 그리고 고배당.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나중에 상장은 할 겁니까?”

“글쎄요? 만약 잘 굴러간다면 상장을 생각하지 않을 이유는 없죠. 국내 보험사들도 믿고 맡길 만한 재보험사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교차로에 멈춰선 강준은 혼자 입꼬리를 올리며 행복한 상상에 잠겼다.

“뭐 해요? 안 건너갈 거예요?”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자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교차로를 둘러싼 대형 빌딩의 전광판이 바뀌면서 손주영 회장이 등장했다.

손주영 회장이 자신이 투자한 기업을 광고하는 영상이었다. 강준이 최은정과 함께 교차로를 건너고 있을 때, 그녀에게 선물 받은 스마트폰이 울렸다.

스마트폰에는 성원그룹과 손주영 회장이 재보험사를 설립할 예정이라는 속보 기사가 떠 있었다. 이제 강준은 SIU팀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은정 씨, 우리 뭐 먹을까요?”

“웬일이에요? 제 이름을 다 부르고?”

“지금 업무시간 지났잖습니까? 저 배고파요. 얼른 갑시다!”

강준의 자연스럽게 최은정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16555215642987.png

1655521564299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