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로이즈 재보험시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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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로이즈 재보험시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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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로이즈 재보험시장 (3)
2022.05.03.
한유철 대리의 일본 주택재해보험에 대한 진짜 보고서는 얼마 후 전략기획팀 최은정 이사에게 직접 보고됐다.
그 보고서에는 강준과 함께 둘러본 후쿠시마 인근의 주택 중 상당수가 목조주택이라는 정보도 적혀 있었다.
물론 쓰나미가 덮쳐 물에 휩쓸려간다면 목조이건 철골이건, 내진설계를 했건 안 했건 결과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해안가로부터 떨어진 곳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후쿠시마와 도쿄 인근의 건물들이 몇 퍼센트나 무너지느냐에 따라 보상금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터였기 때문이었다.
“한 대리님, 다행히 방사능에 대한 피해보상 약정이 없는 게 다행이네요…….”
“네? 방사능이요?”
“원전 말입니다. 후쿠시마 인근 해안에 원전이 있지 않습니까?”
한유철 대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소장님, 일본이 원전으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는 나라입니다. 역사도 더 오래됐고요.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거에 철저한 사람입니다. 지진이 왔다고 설마 원전에 문제가 생길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운전대를 붙잡은 한유철 대리가 강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는 거 때문에 원전 사고가 터진 거야!’
“몇 년 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쓰나미 기억 안 나시나요? 그때 쓰나미가 어떻게 도시를 집어삼키는지 모두 잘 봤잖습니까.”
각진 소형차는 철길 앞의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둘은 후쿠시마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강준은 그곳 해안가 일대를 다시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때 옆 차선으로 차 한 대가 정차했다.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가자 낯익은 여자가 강준을 바라봤다. 벌링턴 남작의 애인인 손미영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기차가 지나가자 손미영의 차는 철길 건너의 공터 앞에 다다라 멈춰 섰다.
“소장님, 우리도 차 세울까요?”
“얘기 좀 하자는데, 들어는 봐야죠.”
손미영과 친했던 일본지사장 노진용은 별다른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는 자신이 업무에서 배제당했다는 걸 눈치채고 사표를 쓰려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강준은 이미 최은정 이사에게 향후 일본지사장으로 한유철 대리를 추천했다. 그간 본사에 보냈던 자료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 손미영이 강준을 직접 찾아온 거였다.
굽이 뾰족한 스틸레토힐을 신은 손미영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강준의 차로 걸어왔다.
“또 보게 되네요.”
“저희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무실에 전화해 봤죠. 후쿠시마 방면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여길 지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손미영에게 이전과 같은 적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변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근데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뭔가요?”
“얘기가 잘됐다는 걸 알려드리려고요.”
“네? 무슨 얘기 말입니까?”
“저희 신디케이트에 성원화재가 합류하기로 결정됐어요. 물론 그건 박 소장님이 최은정 이사님께 연락해 보면 바로 확인이 가능할 테지만요.”
금시초문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벌링턴 남작과의 합자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재정 상황을 최은정도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근데 갑자기 그가 운영하는 신디케이트에 합류한다고? 강준은 믿을 수 없었다.
“노진용 과장이 윗선을 설득한 건가요? 며칠째 회사에 모습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 사람은 앞으로 더는 성원화재에서 볼 수 없을 거예요.”
“노 과장이 원하던 대로 고액연봉을 받으며 벌링턴 남작의 일을 돕기로 한 건가요?”
“아뇨. 이제 그 사람과 저희는 관련이 없어요.”
한마디로 노진용 과장을 버렸다는 거였다. 최은정과 손미영은 중간에 끼어 있던 노 과장을 버림으로써 양측의 껄끄러웠던 관계를 묻기로 합의한 건지도 몰랐다.
“잠시…… 잠시만요……!”
강준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최은정이 자신에게 말도 없이 그런 결정을 진행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녀는 엄연한 성원화재의 경영진이며, 강준은 그저 외주업체 사장일 뿐이었다.
“지금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는 이유가 뭐죠?”
“최 이사와 이번 합자 결정을 하면서 제가 내건 조건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설마…… 나를 배제하라고 한 건가요?”
“잘 아시네요. 이제 박강준 씨는 우리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넓은 오지랖도 우리한테는 그만 부렸으면 하고요.”
입가에 미소를 띤 손미영은 승리감을 만끽하기 위해 온 거였다. 자기가 직접 강준을 잘랐다는 걸 알려 주고 그걸 듣는 당사자의 표정을 즐기려 한 건지도 몰랐다.
“싫은데요.”
“……네? 지금 뭐라 그랬죠?”
“싫다고요. 뻔히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걸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순 없죠.”
“이제 당신하고 상관없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벌링턴 남작이 보험금을 지급하지 못한다면 같은 신디케이트에 참여한 성원화재가 물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일본의 재해보험들 때문에 우량한 한국 보험사들의 자산이 빨리는 격이고요.”
손미영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보시는군요.”
“원래 의심하는 게 제 일이거든요. 게다가 보험은…… 항상 최악의 순간을 상정해야 하고요.”
“로이즈의 멤버가 된다는 건 그 정도의 계산은 할 수 있는 언더라이팅 능력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은근히 성원화재의 역량을 무시하는 손미영이었다. 강준은 차로 돌아가 서류 하나를 꺼내 들고 되돌아왔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게 뭐죠? 또 누구 뒷조사를 한 건가요?”
“아뇨. 완전히 틀리셨네요. 이건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일본 근방의 해역에서 지난 한 달간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에 대해 분석 자료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지진이라도 일어난다는 건가요?”
“몇 년 전 발생했던 남아시아의 쓰나미! 그리고 1년 전 발생한 칠레의 쓰나미! 아마 그것보다 더 큰 쓰나미가 조만간 일본을 덮칠지도 모릅니다.”
강준의 말에 눈썹이 꿈틀거리는 손미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뿐이다. 그녀는 지진 예측 따위보다는 벌링턴 남작이 일본 보험업계에서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예측은 나도 하겠네요. 그럼, 우리 다시 보는 일이 없도록 해요!”
등을 홱 돌리고 강준으로부터 멀어지는 손미영이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한유철 대리가 물었다.
“박 소장님…… 정말 지진이 일어난다고 보시는 겁니까?”
“네, 전조 증상이 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나저나 한 대리님. 오늘은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네? 여기까지 왔는데 말입니까?”
“최은정 이사와 얘기를 좀 나눠봐야 할 거 같아서요…….”
아직 캘리포니아 대학의 최근 지진보고서를 최 이사에게 얘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벌링턴 남작과의 합자를 되돌릴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 * *
서울 을지로 성원화재 본사.
강준의 급작스러운 귀국에 비상 회의가 소집됐다. 그리고 회의에는 최진호 대표와 실질적으로 재보험시장 진출을 추진했던 김성호 이사가 함께 참석해 있었다.
“이사님,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겁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재보험시장 진출을 밀어붙인다는 건 무리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항상 지진의 위험에 노출되어 왔어요. 그래서 정부에서 지진보험에 대해 70%의 재정지원을 해 주는 거고요. 전 그 정도면 크게 위험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최은정 이사가 조곤조곤 답했다. 그녀는 강준과 이번 일로 부딪히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무작정 강준의 말에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 내가 봐도 이번에는 박강준 소장이 너무 고집을 부리고 있어. 이번에는 우리 경영진의 결정을 따라.”
“이제는 제가 그룹 식구도 아닌데, 여기 계신 분들의 결정에 왈가불가할 처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유보할 필요는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두 달 만이라도요.”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는 시점이 딱 두 달 뒤였다. 지금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에 참여했다가는 성원화재가 천문학적인 손실을 볼 게 뻔했다.
“박 소장님, 저희도 위험을 감지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벌링턴 남작 측에서는 주택재해보험의 갱신이 이뤄지기 전에 신디케이트의 조성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 조성이 끝나 버리면 우리로서는 로이즈 재보험시장에 진출하는 걸 1년 뒤로 미뤄야 하는 거고요.”
최진호 대표가 솔직한 사정을 얘기하며 강준을 설득했다. 그제야 강준은 성원화재가 벌링턴 남작의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왜 그와 손잡게 되었는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벌링턴 남작의 재정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번 신디케이트는 1년짜리예요. 그사이에 큰 재해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1년 뒤에는 좀 더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재계약을 맺을 수 있겠죠.”
최 대표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강준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강준은 좀 더 자극적으로 공포를 부풀리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제가 더는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일본지사에서 몇 년째 근무 중인 실무자의 말을 한번 들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실무자라면 한유철 대리요?”
“네…… 물론 이런 간부회의에 참석할 만한 직급은 아직 안 되지만….”
“들어오라고 하세요. 직급이 무슨 상관입니까? 현장 얘기를 들어보는 게 중요하죠.”
강준은 최진호 대표의 성향으로 보아 절대 거부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었다. 전화기를 든 강준이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한유철 대리를 불러들였다.
잠시 후, 들어온 한유철 대리는 쭈뼛거리며 꾸벅 인사하고는 준비해 온 노트북을 펼쳐 들었다.
“이 사진들은 제가 2주일 동안 박 소장님과 함께 도쿄 인근과 센다이 지역의 재해보험 계약 주택들을 실제 둘러본 것들입니다. 보시다시피……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에서는 건축 연한이 30년 이상 된 목조주택 위주로 가입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다른 재해보험에 비해 보험료가 30%나 비쌌죠…….”
돈을 벌기 위해 보험상품의 위험도는 상관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리고…… 같은 지역의 다른 보험사들의 계약 주택들도 직접 방문해 비교해 봤습니다. 대부분 내진설계가 되어 있고…… 보장한도는 제한적입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한 번 지진이 일어나면 그야말로 엿가락처럼 철골 구조물들도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만한 충격을 견디게끔 설계되어 있지 않나요…?”
“지진이 한 번 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여진이 오면서 반복적으로 충격을 가하니까요. 벌링턴 남작의 재해보험 계약 물건들은 확실히 취약합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시기에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서 한 번은 터질 거라는 게 지질 전문가들의 의견이고요.”
“캘리포니아 대학의 보고서 말인가요……?”
“실은 일본 내부의 기상청에서도 많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언론에서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 조심스러워하는 것뿐이고요…….”
한유철 대리의 마지막 말은 강준이 덧붙인 내용이었다. 동일본대지진 직전까지도 일본의 언론에서는 그런 큰 재난이 닥쳐올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공포마케팅은 언제나 승산이 있는 법이었다. 최진호 대표와 이사진들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