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로이즈 재보험시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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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로이즈 재보험시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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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로이즈 재보험시장 (2)
2022.05.02.
“1995년의 고베 대지진 이후로 일본에서 발생한 큰 지진은 없었습니다. 저도 물론 당시에 손실을 보긴 했지만, 제한적이었죠.”
찰스 벌링턴 남작, 그는 준수한 외모에 자신감 있는 말투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일본어를 섞어 쓰며 상대방과의 친밀함도 어필했다.
“로이즈의 보험계약은 대부분 저 같은 개인 보험인수인들이 모인 신디케이트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서로 위험을 분산하는 겁니까?”
“본인이 설정한 보험금의 한도 내에서 무한 책임을 지는 거죠. 그거 아세요? 타이타닉 침몰 당시에 로이즈에서 천문학적인 보상금인 140만 파운드를 즉시 지급했다는 거.”
“로이즈의 신용이 세계적이라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군요.”
“맞아요! 우리 같은 네임이 파산한다고 해도 로이즈의 중앙기금이 보험계약자에게 지급되어야 할 보험금을 보존해 주죠.”
로이즈 네임 멤버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벌링턴 남작이었다.
“그럼 앞으로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다고 해도 남작님의 보험상품에는 문제가 없는 겁니까?”
호응만 해 주던 강준의 진짜 질문이었다.
“하하! 지금까지 제가 했던 얘기들을 허투루 들으셨군요. 제가 속한 신디케이트는 감당하고도 남을 겁니다.”
찰스 벌링턴의 목소리가 슬쩍 높아졌다. 그걸 지켜보던 노진용 과장이 안절부절못하며 강준에게 말리는 눈빛을 보냈다.
“박 소장님…… 여기서 합자 파트너십을 깨 버릴 작정이십니까……?”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그 말은 벌링턴 남작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손미영이 아닌척하며 둘의 대화를 모조리 엿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 과장님, 전 제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강준은 벌링턴 남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남작님이 일본에서 주택재해보험으로 계약한 보험의 지급 한도가 얼마냐는 겁니다.”
“지급 한도라…… 하하!”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벌링턴 남작은 안면을 바꾸고 조금 빠른 말투로 자신의 돈에 관한 얘기들로 화제를 돌렸다.
“잘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가문은 19세기부터 아시아 시장에서 중개무역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벌어들인 돈으로 런던의 금융가 시티에 진출했죠.”
“그때 진출한 금융이 바로 보험이었군요.”
“네, 당시에는 해상보험에만 한정해 보험상품을 거래했지만, 그 이후로 자동차와 화재, 그리고 항공보험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자연히 로이즈 보험 조합 내에서 저희 가문의 인지도도 높아졌고요.”
강준의 말이 분명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하지만 역으로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라면 처음 보는 비즈니스 미팅 상대자의 말 따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을 터였다.
“……그렇군요, 남작님.”
“아까 지급 한도에 관해서 물으셨죠?”
“네. 서로 간에 확실히 해 둘 건 해 둬야 하니까요…….”
“한도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무제한 한도라고 할까요?”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벌링턴 남작이었다. 옆에 있던 손미영도 강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꼬치꼬치 캐물을 수준의 상대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군요…… 근데 말입니다.”
강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썰어 둔 고기 한 덩이를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테이블의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쯤, 의뭉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따로 알아보니 일본 보험사들이 남작님에게 더 이상 주택재해보험 상품을 팔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소장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강준이 도쿄에 도착한 건 실은 성원화재 일본지사장인 노진용을 만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리고 김준혁이 보내온 자료를 토대로 도쿄와 센다이 지역 일대의 주택 재해보험의 현황을 파악했었다.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부터 위험도가 낮은 것까지.
벌링턴 남작이 보험브로커인 일본 보험사들을 통해 계약한 주택재해보험들은 위험도가 가장 높은 것들이었다.
회귀 전 강준이 경험한 동일본대지진이 두 달 뒤에 벌어진다면 벌링턴 남작이 감당해야 할 보험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늘어날 터였다.
현재의 일본 손해보험사들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다는 건 모르겠지만, 벌링턴 남작의 보험계약이 높은 위험도를 가졌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벌링턴 남작의 재무 상태, 그러니까 보험금의 지불 능력에 대해 수시로 체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노 과장님, 간토해상보험에서 벌링턴 남작과 합자 법인을 추진하려고 한다고 했었죠?”
“……그…… 그건 사실입니다.”
“아뇨.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간토해상보험은 합자 법인은커녕 벌링턴 남작에게 중개한 보험을 해지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간토해상보험이 접근했다는 것도 노 과장이 일부러 흘린 가짜정보였다. 어떻게든 성원그룹을 벌링턴 남작과 이어 붙이기 위한 밑밥일 뿐이었다.
“……그건 어디서 들은 정보인데요?”
목소리를 높인 노 과장은 더는 벌링턴 남작과 손미영을 신경 쓸 여유도 사라진 듯했다.
“저기 소장님……!”
얌전히 앉아 있던 손미영이 매서운 눈으로 강준을 노려봤다. 정체가 드러나니 이제는 거짓말로 잡아떼거나 아니면 상대를 회유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시죠.”
“저도 박강준 씨에 대해 알아보니 꽤 유명한 보험조사관이시더라고요. 근데 그게 따지고 보면 오지랖을 부리면서 남의 뒷조사나 하고 다닌 거 아닌가요?”
이건 회유가 아니라 상대를 깔아뭉개며 진흙탕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강준은 벌링턴 남작에게 성원그룹이라는 활로를 찾아준 게 바로 그녀라는 걸 깨달았다.
“저에 대해 뭐라고 표현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보험사기를 조사하고 밝혀내 제대로 된 보험계약이 이루어지는 데 일조할 뿐입니다.”
“그럼 이번 일은 그런 보험조사관의 업무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재보험시장에 진출하려는 의뢰인인 성원그룹 측을 돕는 것도 대한민국 보험종사자의 한 명으로서 무척 의미 있는 일이죠.”
거창하게 표현한 강준의 말은 성원화재를 배신하려는 노진용과 손미영에게 한 방 먹이는 거였다. 손미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강준을 노려볼 뿐이었다.
회유해도 회유가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미영! 난 그만 일어나겠어……! 더는 이렇게 불쾌한 자리에 있고 싶지 않군. 이봐…… 당신 보스에게 가서 이렇게 전해. 로이즈 보험시장에서 내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앞으로 알게 될 거라고 말이야…….”
은근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그런 얄팍한 협박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전 아직 말이 안 끝났는데요?”
“무슨 말요? 우리 사이엔 이제 할 말이 없을 거 같은데요?”
벌링턴 남작 대신 손미영이 대신 차갑게 대꾸했다.
“지금 가지고 계신 남작님의 주택 재해보험 계약을 저희가 인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옆에 있던 노진용이 그건 월권이라는 표정으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배임행위를 한 그가 강준을 막아 세울 처지는 아니었다.
“어떤 조건으로요? 성원화재에서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안 될 텐데요?”
“일본에서 남작님이 계약한 주택 재해보험을 총 100억 엔에 인수하고 싶습니다. 물론 로이즈 네임 멤버의 권한도 함께요.”
갑작스러운 인수 타령은 벌링턴 남작의 화를 더 부추겼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깟 돈에 휘둘리리라고 생각한 건가요? 당신은 날 몰라도 한참 몰라!”
벌링턴 남작과 손미영이 나가고 나자 노진용 과장이 얼굴이 벌게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늘 일은 본사에 정식으로 보고할 겁니다!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딜을 이렇게 망쳐 버리다니요. 박 소장님은 이제 성원화재 식구도 아니지 않습니까?”
“보고서에 그대로 쓰시죠. 다만, 간토해상보험의 최근 움직임에 관해서도 쓰셔야 할 겁니다.”
“……그…… 그건!”
자신의 약점을 쥐고 흔들자 움찔하는 노 과장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임기응변의 핑계를 내놓기 마련이다. 논점을 흐리는 장황한 논리로 말이다.
“간토해상보험은 기존의 보험계약을 자기들 수익을 더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직거래 계약으로 대체하려는 겁니다. 그건 엄연히 벌렁턴 남작과 합자한 신디케이트를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이고요.”
“신뢰를 먼저 저버린 게 간토해상보험이라는 거군요.”
“업계의 냉엄한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럼, 간토해상보험도 그렇게 말하는지 제가 확인해 봐도 되겠죠?”
얼굴이 붉어진 노 과장이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쳤다.
“박강준 소장! 당신 뭐야!”
결국 자신의 밑바닥을 다 드러낸 그였다.
* * *
다음 날 오전. 신주쿠역 인근 쇼핑가.
정오가 다가올 무렵이었다. 복잡하게 오가는 쇼핑몰의 한복판 카페에서 강준은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카페로 들어왔다. 성원화재 일본지사의 한유철 대리였다. 강준에게 오기까지 그의 고민은 깊어 보였다.
“말씀하신 자료들 가지고 왔습니다. 근데…… 이거 정말 최은정 이사님 지시사항이 맞는 거죠?”
“네, 직접 통화라도 해 보시겠어요?”
“아…… 그게 아니라…… 어쨌든 사무실에는 현장 둘러보고 온다고 얘기하고 나온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한 대리님은 성원화재 일본지사의 진짜 리포트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한 대리였다. 그가 가져온 자료는 간토해상보험이 벌링턴 남작과 함께 구성한 신디케이트에서 계약한 주택 재해보험 현황이었다.
도쿄를 비롯한 사이타마, 요코하마, 지바 등의 대도시를 포함해 이바라키, 후쿠시마, 가나가와의 현급 지역들에 보험가입자가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보상한도는 천만 엔인데, 가구당 연간 보험료가 대략 2만 5천 엔에서 3만 7천 엔 정도 합니다. 물론 보험료는 건물이 목조냐 철골이냐, 그리고 건축연도, 내진등급, 면진건축물인지에 따라 달라지고요.”
“일본은 정부에서 지진보험의 위험 일부를 부담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계약된 지진보험의 70%를 정부에서 재보험으로 인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벌링턴 남작이 소속된 신디케이트에서도 결국 보험금 지급 위험의 30%만 담당하고 있는 셈이죠.”
강준은 자료를 한곳을 가리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여기 후쿠시마에 가입된 13만 채의 가옥들이 모두 파괴된다면…… 벌링턴 남작이 감당해야 할 보험금은 얼마인가요?”
“네? 전부 다 파괴된다면요……?”
어이가 없었는지 한유철 대리는 한번 피식 웃고는 계속 답했다.
“이론상으로 계산해 보자면 지급되어야 할 보험금이 13조 원 정도 되네요. 그중 30%가 벌링턴 남작의 신디케이트에서 부담해야 하니까 약 4조 3천억 원 정도고요. 근데 소장님, 그 정도가 되면 신디케이트고 뭐고 전부 다 파산할 겁니다.”
“신디케이트에 소속된 간토해상보험도요?”
“당연하죠. 간토해상보험이 자본금이 그리 큰 회사는 아니니까요. 근데 그렇게까지 될 리는 없을 겁니다.”
강준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한유철이 손을 내저으며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고베 대지진 당시에 보험금 지급총액이 약 783억엔 정도였습니다. 한화로 약 8,500억 원 규모였죠.”
지난 자료의 수치를 토대로 말하는 한유철이었다. 그의 판단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발생할 동일본대지진으로 지급하게 될 보험금 총액은 고베 대지진 때의 15배에 이르게 된다.
그건 지금의 한유철이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인 게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