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로이즈 재보험시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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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로이즈 재보험시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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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로이즈 재보험시장 (1)
2022.05.01.
도쿄 신주쿠역 빌딩가.
강준은 도쿄에 겨울비가 내리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코트 안으로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일본도 추위가 만만치 않네……!”
강준이 만나기로 한 사람은 성원화재의 일본지사장인 노진용 과장이었다. 로이즈 네임인 찰스 벌링턴을 소개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강준을 맞이하러 지사가 있는 빌딩 아래까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박강준 소장님이시죠?”
“네, 노준용 과장님?”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노진용은 대번에 강준을 알아봤다. 그는 적당한 붙임성과 적당한 민첩함으로 현지 보험시장의 조사업무를 그럭저럭 잘 처리해 오고 있었다.
“숙소는 좀 어떠십니까? 다른 곳보다 좀 좁죠?”
“훌륭합니다. 롯본기가 도쿄의 중심이 아닙니까?”
“하하! 그건 그렇죠. 이따 저녁에 벌링턴 남작과 직접 만나게 되실 겁니다. 지금 숙소가 있는 곳 바로 근처에서요.”
일본지사가 있는 사무실 빌딩은 여느 빌딩처럼 회사원들이 보안 문을 통해 출입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강준이 들어서자 사무실의 두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들의 눈빛을 보니 오랜만에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온 듯 어색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차를 내왔다.
‘원래 여기 사람들은 누가 와도 친절한 건지도…….’
거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강준이 한숨 돌리고 나자 노 과장이 조심스럽게 속내를 드러냈다.
“얼마 전까지 성원화재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죠. 지금은 독립 SIU팀을 이끌고 있고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최 이사님이 박 소장님을 보낸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보험조사관이 와서 불편하신 거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사에서 저희를 못 믿는 거 같아서……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최 이사님이 제게 의뢰한 건 로이즈의 개인 멤버인 찰스 벌링턴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거였습니다. 근데 물어보니 과장님께서는 그간 본사 쪽에 벌링턴 남작과 관련한 자료를 주시진 않았더라고요?”
자료 얘기에 노진용의 표정이 민감하게 변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건 현지 지사의 역할을 못 하고 있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저희도 자료는 없습니다…….”
“……자료가 전혀 없다고요?”
“현재로서는 가지고 있는 게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가게 되면…… 정식으로 요청해 봐야 하는 거고요.”
자신감이 떨어지는 말투였다.
“그럼 어떤 근거로 찰스 벌링턴 씨를 추천한 건가요? 근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얼마 전 이곳 유수의 보험사인 간토해상보험에서 벌링턴 남작과 합자 법인을 추진하려고 했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노 과장님께서 일류 회사가 접촉한 사람이니 무슨 이유가 분명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시네요?”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벌링턴 남작은 로이즈의 개인 멤버 자격인 네임이기 때문에 영업이익이나 자산 상황을 공개할 의무도 없고요.”
노진용의 표정에서는 ‘그러니까 찰스 벌링턴에 관한 조사는 네 일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쩌면 둘의 입장이 뒤바뀔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 묻죠. 찰스 벌링턴 씨가 아니라면 성원화재에 다른 대안은 있는 겁니까?”
“……직접 로이즈에 진출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봐야죠. 하지만 재보험시장이 만만한 게 아닙니다. 까딱 잘못했다간 회사가 파산에 이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기존의 로이즈 회원인 찰스 벌링턴 씨에게 묻어가겠다는 거군요.”
강준의 노골적인 표현에 노 과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묻어간다는 건 일본지사의 역할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은 칸막이 없이 길쭉한 형태였다. 강준과 지사장의 대화가 직원들에게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노 과장의 체면이 구겨진 격이었다.
“묻어간다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그간 우리 지사에서 본사 쪽으로 보낸 보고서들이 한국에서의 언더라이팅에 꽤 도움이 된 걸로 아는데요…….”
사람을 한번 들어다 놓으면 밑바닥을 보이는 법이다. 노 과장은 강준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
“보험조사팀에 있어서 잘 몰랐습니다. 그 점은 사과드리죠.”
“아닙니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언더라이팅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을 테니까요…….”
강준은 사과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노 과장이 언더라이팅에 대해 얼마나 전문가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강준이 알고 싶은 건 노 과장이 왜 찰스 벌링턴을 추천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였다.
“좌우간 잘 좀 부탁드립니다…….”
노 과장이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강준이 내민 손을 붙잡자 강준은 곧 그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기억에서 그와 만나고 있는 건 찰스 벌링턴이 아니라 낯선 한국 여자였다. 노란색 불빛이 가득한 술집에는 적당한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최은정 이사가 진용 씨를 안 믿는 거 같던데?]
[안 믿는 게 당연하지.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냥 덜컥 믿는 거부터가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겠어?]
[찰스가 자기 얼마나 믿는지 알지?]
[인제 와서……? 본인이 힘들어지니까 나한테 똥물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고?]
여자가 순간 당황했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찰스가 좀 방만하게 운영하긴 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주택보험들, 여기 일본 보험사 애들이 얼마나 노리고 있는지 자기도 잘 알지?]
자기라고 말하는 거로 보아 둘은 무척 친밀해 보였다.
[그거야 그 사람들도 찰스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그 많은 돈 다 까먹고 파산 직전이라는 거 몰라서 그러는 거잖아!]
노진용은 자신에게 닥친 선택지가 김빠진 사이다 같다고 생각했다. 원래 성원화재에서 이직을 고려하던 그였다. 일본 사업이 지지부진한 성원화재에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때쯤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손미영이었다. 그녀는 찰스 벌링턴의 애인이었다. 찰스에게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남들의 눈에는 찰스 벌링턴과의 관계를 통해 인생 역전을 노리는 여자처럼 보였다.
[진용 씨, 화 풀어. 그리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는 거 알지? 진용 씨가 걱정하는 거만큼 찰스 안 무너져.]
손미영은 노진용의 술잔을 채우며 그를 달랬다.
[그리고 어차피 진용 씨는 월급만 많이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야! 손미영!]
[우리 좀 서로 솔직해지자.]
[솔직히 뭐? 말해 봐!]
[자기도 원래 찰스 씨 밑에서 고액연봉자로 일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성원화재랑 이번에 잘되면 자기 역할은 더 커지는 거야.]
반은 설득됐지만, 아직 반은 설득되지 않은 듯 깊은 한숨을 내쉬는 노진용이었다.
[만약에…… 지진이라도 한번 덮치면 어떻게 되겠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넘어서 그냥 파산이잖아? 그런 폭탄을 내가 총대 메고 성원화재에 넘기라고?]
노진용의 말에 손미영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앞에 있던 소다와리(탄산수를 섞은 술) 잔을 홀짝였다. 둘의 어색한 기운을 끝으로 노진용의 기억이 끝났다.
“그럼 슬슬 일어나실까요?”
강준이 기억에서 빠져나왔을 때, 노 과장은 롯본기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셋만 보는 겁니까?”
“네? 우리 둘 말고 벌링턴 남작을 같이 볼 사람이 또 있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벌링턴 남작이 혼자 나오냐는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노 과장이 잠깐 뜸을 들인 후 답했다.
“사업적으로 연관된 사람은 아닌데…… 그분의 여자 친구분이 나오실 수도 있습니다.”
“방금 여자 친구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아…… 네. 저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찰스 벌링턴 씨는 이미 결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국에 본부인이 있는데 여기서 따로 애인을 구한 거군요.”
노 과장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어디서 뭘 들은 겁니까?”
“그 정도 조사는 하고 왔습니다. 전 노 과장님도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부정하기도 그렇다고 긍정하기도 애매한 질문이었다.
“일단 나가시죠.”
대화를 듣고 있을 직원들을 핑계로 노 과장은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속으로 노 과장이 궁금한 건 그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였다.
강준이 일본에까지 와서 벌링턴 남작을 조사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사생활이 복잡하긴 했지만, 벌링턴 남작이 공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노 과장은 의구심을 가진 채 강준과 함께 롯본기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소장님, 둘밖에 없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찰스 벌링턴에 대해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 쪽에 접근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까 전보다는 좀 더 솔직해지셨네요. 계속 말씀해 보시죠.”
침착한 말투로 대꾸하는 강준이었다.
“실은 벌링턴 남작의 애인이 한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이혼하고서요? 아니면 애인으로 말입니까?”
“하하! 소장님, 우리끼리니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편하게 얘기하시죠.”
“벌링턴 남작한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국의 갑부입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처럼 결혼제도에 얽매여 살진 않죠.”
“흠 정말 그럴까요……?”
택시는 정체가 심한 도쿄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착하려면 꽤 많은 시간을 택시 안에서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노 과장은 갑자기 그런 상황에 압박감이 느껴져 왔다.
“소장님, 혹시 또 알고 계신 다른 정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혼소송을 하고 있다는군요. 영국에 있다는 본부인은 일본인이고요.”
“네? 그게…… 정말입니까?”
노진용도 모르고 있었던 정보였다. 찰스 벌링턴에게 애인이란 그저 소모품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한국인 애인을 위해 사업 방향을 튼다는 건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정보의 출처는 최은정 이사님입니다. 사법연수원 동기가 도쿄에서 국제변호사로 일하고 있다더군요. 그 동기 친구분이 찰스 벌링턴 씨를 조사한 거고요.”
그 말을 들은 노진용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최은정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고액연봉이라는 미끼에 넘어가 회사에 폭탄을 안겨 줄지도 모를 벌링턴 남작을 끌어들인 사실이 벌써 드러난 건지도 몰랐다.
“소장님, 우리로서야 벌링턴 남작이 이혼소송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좋은 조건으로 합자 회사를 세우는 우리 목표만 이루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저도 찰스 벌링턴 씨의 사업에 관한 걸 조사하면 그뿐이고요.”
묘하게 받아치는 강준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어느새 진눈깨비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대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소장님을 성원화재 소속으로 소개하겠습니다…… 괜히 복잡하게 설명하는 게 좀 그래서요…….”
“상관없습니다…… 춥네요. 빨리 들어갑시다!”
강준은 도착한 호텔 입구의 회전문 안으로 먼저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