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독립 사무소 개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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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독립 사무소 개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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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독립 사무소 개업 (1)
2022.04.24.
2010년 10월.
강준은 을지로 인쇄골목에 사무실을 차렸다. 얼마 전 확인해 본 그의 은행 계좌에는 20억 원의 현금이 있었다.
금융위기 때 하락장에 베팅해서 번 50억 원의 돈 중 절반이 넘는 돈을 보험사기 조사와 피해자 구제를 위해 사용해 온 거였다.
‘어차피 그 돈이 진짜 내 돈은 아니었잖아?’
회귀로 인해 알게 된 정보로 번 돈이었다. 그걸 보험조사관인 강준이 쓸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비용 때문에 엄두 내지 못할 조사를 한다거나 보험사기…… 아니 보험사에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
그렇게 쓰고 남은 돈이 20억 원이었다. 최은정 이사가 도와주겠다고는 했지만, 수입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신규 조사원들을 채용하고 사무실을 꾸려가려면 눈 녹듯 사라질 돈이었다.
“에이, 그냥 부동산이나 사 둘 걸 그랬나? 임대료나 또박또박 받아먹으면 세상 편한 일일 텐데!”
강준은 텅 비었다 싶은 사무실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느새 사무실에 들어왔는지 최은정이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가왔다.
“내가 아는 박강준 씨는 좀이 쑤셔서 그렇게는 못 살 걸요?”
“어! 언제 왔어요?”
“방금요. 투자금을 준대도 기어코 안 받더니만 겨우 이런 낡은 건물에 사무실을 차린 거네요.”
“뭐, 투자금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사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딱 부러지게 계약 연애의 관계를 끝내자고 말한 적이 없는 둘이었다.
“전 그 관계를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죠. 투자자와 피투자자의 관계로요.”
“사기로 고소당하기 딱 좋은 관계인데요?”
강준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누군가 사 온 음료수를 꺼내 최은정에게 내밀었다.
“줄 게 이것밖에 없네요.”
“잘 마실게요. 근데 두 개 더 꺼내야 할 거 같은데요?”
“……네?”
최은정이 턱으로 강준의 뒤를 가리켰다. 사무실에 김준혁과 송지희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차장님! 접니다!”
“사무실 개업하신 거 저희한테 말씀도 안 하시고 섭섭해요!”
둘은 박스 하나씩을 가슴에 안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게 뭐냐? 개업식 선물이냐?”
“아니요. 저희 물건인데요.”
“그걸 왜 여기 가지고 왔어?”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저희는 차장님 독립하시면 꼭 같이 따라간다고요.”
강준은 순간 가슴이 찡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 쫓아오다니! 회귀 전 혼자 윗선에 맞서다 쓸쓸하게 폐차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게 떠올랐다.
‘이번 생애엔 그리 외롭진 않네…… 근데 잠깐! 이 녀석들까지 건사하려면 남은 돈으로 부족하겠는데!’
“김준혁, 송지희 너희는 안 돼! 든든한 직장에서 괜히 왜 나온다는 거야? 그리고 둘이 결혼한다며?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결혼해서 자리 잡을 때까지 성원그룹에 딱 붙어 있어!”
“정말 치사하게 혼자서만 이러기 있습니까?”
“너희들 나 따라서 여기 왔다가는 다 같이 굶어 죽는다!”
“에이, 차장님. 생각보다 저희 밥 많이 안 먹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은정이 나섰다.
“강준 씨 걱정하지 말아요. 당분간은 우리 성원화재에서 일거리를 줄 거니까 굶을 일은 없을 거예요.”
“최 이사님, 진짜입니까……?”
“진짜죠. 그럼 가짜겠어요?”
“저랑 약속한 겁니다!”
강준의 얼굴에 그제야 여유 있는 미소가 번졌다. 어차피 보험조사를 혼자서 풀어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입 조사원들을 채용하려고 했던 계획을 경력직 채용으로 변경하는 것뿐이었다.
“너희들 연봉은 대충 어떤지 알지?”
“차장님이 알아서 챙겨주시겠죠? 물론 업계 평균이라는 게 있지만요…….”
“우리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하자고! 원래 이런 거는 치사하게 느껴져도 서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거든. 연봉은 성원화재에서 받았던 수준의 20% 삭감! 그리고 사건 해결 시 의뢰금액의 10% 인센티브! 어때?”
김준혁은 송지희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이내 강준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김준혁, 그렇게 안 보였는데 인제 보니 시원시원한 구석이 있네?”
김준혁과 송지희가 강준의 독립 SIU 사무실에 합류하면서 걱정했던 건 본인들의 연봉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준이 제풀에 지친 모습을 보게 되는 게 더 걱정되는 그들이었다.
“그나저나 박 차장님, 그럼 이제 저희가 뭐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음…… 어디 보자 사장님?”
“어색한데요?”
옆에 있던 송지희가 단칼에 강준의 의견을 잘랐다.
“그럼 송 대리는 뭐가 좋겠어?”
“소장이요. 보통 탐정사무소 이런 데 보면 소장이더라고요. 박 소장님 어때요?”
“소장이라……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이런 일에는 연륜과 경험이 더 필요한 거 아닌가요?”
“그…… 그렇지.”
김준혁도 옆에서 거들었다.
“제 생각에도 소장 괜찮은데요. 차장님 명성도 이용할 겸 박강준 보험조사사무소 어떻습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고! 너희는 실장 어떠냐? 실장! 왠지 드라마에 나올 법만 직함 아니냐?”
“대리보다 강등된 거 아닙니까? 근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안 망하면 그걸로 감지덕지합니다!”
송지희가 그런 김준혁의 입을 딱 막으며 화제를 돌렸다.
“차장님, 근데 명성정공 얘기 들으셨어요?”
“어, 윤 대표가 구속됐다며?”
“리안건설에서 윤재구를 손절한 거 같아요.”
“자기네들한테까지 번지는 걸 막겠다는 거로군.”
“석재곤 감독관도 함께 구속됐고요.”
“윤재구 대표야…… 벌금 내고 가석방되겠지만, 석재곤은 졸지에 신세를 망쳤군.”
“당연한 결과죠. 지위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겼으니까요.”
강준은 옆에 있던 최은정 이사를 바라봤다.
“최 이사님, 최진태 대표가 직접 지시한 거 같나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윤미경 감사의 말을 거스를 만큼 뚝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물론 자기 앞을 가로막는 걸 어떻게든 부숴 버리는 사람이긴 하지만요…….”
야비하고 악랄한 야심가지만, 얄팍한 인간. 그게 바로 최진태였다.
“참, 이제는 스스로 회장 직함에 올랐어요. 그걸 또 칭송해 주는 언론들이 있다는 게 좀 한심하지만요.”
“번암지구 게이트는 아예 묻혀 버린 건가요?”
“한승일 시장이 물러나면서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리안건설이 아파트 시공을 서두르고 있어요. 아무래도 새로운 시장이 나타나면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사실 이번 석재곤 감독관과의 유착 문제도 충분히 검찰에서 리안건설과 엮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요?”
“그러니까요…… 답답할 노릇이죠. 관계부처 구워삶아서 얻는 이익이 엄청날 텐데 이렇게 명성정공 같은 하청업체 하나 날리는 걸로 끝났으니까요.”
최은정은 더 심각한 얘기를 이어가려다 개업식 분위기를 망치는 거 같아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박강준 SIU팀의 개업식이네요! 옛 상사로서 오늘은 제가 쏘죠!”
“와! 그럼 오늘 소고기 먹는 겁니까?”
“네, 맘껏 드세요. 여러분들의 독립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하니까요!”
김준혁이 군침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자 강준이 놀리듯 한마디를 던졌다.
“김준혁, 침 좀 닦아라.”
“저 오늘 말리지 마십시오. 이제 앞으로 쪼들리며 살 텐데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죠.”
김준혁은 강준의 계좌에 아직 20억 원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랬기에 강준의 상황에 최대한 맞춰 주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강준은 내심 그런 김준혁이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군침이 도네! 다들 가자고! 요 앞에 한우집으로!”
“한우집으로 집합!”
* * *
서울구치소.
강대희 이사가 영치금을 넣은 후 윤재구 대표를 면회했다. 구속 수사가 될 줄 모르고 있었던 윤재구는 아직도 자신이 구치소에 들어온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강 이사! 연락은 해 봤어?”
“……그게….”
“왜?”
“연락이 안 됩니다!”
윤재구가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건 5촌 누나인 윤미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걸 말이었다.
“대표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좀 그렇습니다만…….”
윤재구는 떨군 고개를 들고 강 이사를 쳐다봤다. 뭔가 악재가 또 남아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국토부에서 불량 강관 파이프를 사용했다면서……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얼마나?”
“2억입니다…….”
명성정공이 사용한 강관 파이프는 양면을 도금해야 하는 품질기준과는 다르게 외부 면만 아연도금하고 내부는 페인트 처리를 한 불량 강관 파이프였다.
언론은 산업안전감독관인 석재곤이 그런 불량 자재의 사용을 묵인해 줬다며 사회면의 한 꼭지를 채웠다. 하지만 그 언론들 가운데 리안건설을 언급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리안건설에서 두 달째 정상적인 결제를 안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현금이 바닥나서 은행 어음을 못 막을지도 모릅니다…….”
“시발! 여기 있는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윤재구였다. 자신이 지시를 내려야 할 참모 앞에서 성질부터 냈다. 한심한 그였지만, 강대희는 그런 윤재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강대희가 회사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법인의 임원으로서 필요할 때마다 연대보증에 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회사가 망하면 강대희마저 은행으로부터 채무상환의 압박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한참 숨을 고른 윤재구는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풀이 죽은 목소리를 말했다.
“지난번에 송 지점장이랑 얘기가 잘된 거 아니었어? 우리한테 대출 연장해 주기로 했잖아?”
“그게…… 며칠 전 연락이 왔는데…… 대출 연장이 불허됐답니다.”
“뭐? 왜?”
“아무래도 그쪽에서도 눈치를 챈 거 같습니다.”
“쉽게 말해 봐!”
“애초에 은행에서도 리안그룹을 보고 대출을 내 준 거니까요…… 끈 떨어지니 바로 회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떠는 윤재구였다. 애초에 경영적인 수완은 별로 없는 그였다. 다만,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5촌 조카가 건설사 대표가 되자 발 빠르게 자재설비업체를 꾸린 것뿐이었다.
그간의 영화가 과분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으아아아!”
그의 단말마 같은 비명에 교도관들이 뛰어나왔지만, 윤재구는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움찔거리는 교도관이었다.
그가 구치소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몰랐지만, 안에서는 경제사범인 윤재구를 꽤 대우해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 이사…… 난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부도입니다. 그건 막아야죠.”
“부도나 봤자 어차피 법인 파산 아니야? 안 그래? 대표 이사 책임이야 내가 여기서 좀 더 살면 그만이고!”
“대표님……! 저는 어떻게 하고요? 임금체불 때문에 직원들도 저만 보면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강대희는 자신이 보좌했던 윤재구가 이 정도의 무책임한 인간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강 이사…… 다음에 얘기하자!”
일방적으로 면회를 끝내고 구치소 안으로 들어가는 윤재구였다. 강대희는 이제는 자신도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할 시간이라고 느꼈다.
윤재구에게 남은 마지막 사람이 떠나는 순간이었다.